옵션 |
|
조선이 유지했던 200여년 간의 평화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전쟁에 의해 처참하게 찢겨나갔다. 비옥한 농토는 황폐화가 되었고 백성들은 노예로 고향을 등지고 떠나갈 수 밖에 없었다. 또한 그동안 업신여겨온 야인들과 왜구들에 의해 지존이 피난을 가거나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은 조선에 살고 있던 모든 이들에게 치욕적인 일이나 다름 없었다. 그렇기에 조선은 양 난으로 겪은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조세감면이라던가 대동법 등을 도입하여 복구에 열중하고 군사 제도를 재편하여 다시는 허무하게 당하지 않도록 힘을 쏟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양 난과 조선이 맥 없이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원인에 대한 규명과 잃어버린 자신감에 대한 회복이었다. 유득공과 한백겸을 비롯한 몇몇 사대부들은 그 원인으로 수, 당과 같은 대제국들에 대항한 고구려나 발해가 가지고 있었던 고토를 잃어버린 것을 보아 그동안 소홀히 했던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의 역사를 재조명하기 시작했다.
사실 조선은 발해에 대해 제외하다시피 했다. 고려에서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의 사신들의 목을 배고 그들이 가져온 낙타를 굶어 죽이는 것 과 같은 강경책을 내세우고 발해의 유민들을 받아들이는 등 발해에 어느 동정적이고 그 뒤를 잇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이는 발해에 대한 친근한 정서도 있지만 그보다는 발해가 가진 영토에 대한 권리를 내세우며 북방 영토를 차지하려는 고려의 속내였다. 그러나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트리고 조선을 세움에 따라 상황은 변하였다. 유교적 사상을 받아들인 모든 동아시아의 국가가 그러하듯이, 새로운 왕조가 기존 왕조를 무너트리고 질서를 세우기 위해선 정당하고 합리적인 명분이 필요했다. 그렇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개의 ‘상징 조작’이 필요했는데, 첫 번째는 고려말, 어려웠던 백성들의 삶을 이성계가 하늘의 뜻을 받들어 그들을 구제했다는 영웅담과 두 번째로는 단군조선 이래로 한반도에 존재해온 왕조들을 계승했다는 역사적 의미를 찾고자 했다. 그렇기에 조선은 용비어천가와 같은 대 서사시를 만드는 한편, 옛 왕조에 대한 공식적인 제사와 동시에 과거 왕조들이 유지했던 영토에 대한 확고한 지배가 필요했다. 또한 조선 건국 초기에 정도전의 요동 정벌 문제 등으로 명과의 충돌로 인해 명에게 요동을 비롯한 압록강 이북에 대한 욕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야만 하는 점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동국여지승람이라던가 동국통감을 통하여 단군를 비롯한 조선 이전의 왕조들이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인 한반도 안으로 일부러 비집어 넣었다. 물론 고구려와 같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만주에 영토를 유지한 왕조가 존재했지만 고구려가 후기에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것처럼 다소 억지로 보이더라해도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에 위치한 것으로 보이게 했다. 그렇기에 단군조선 → 기자조선 → 위만조선 → 사군 → 삼한 → 삼국 → 신라 → 고려 → 조선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확립했으며 이 과정에서 발해는 조선의 선대 국가가 아닌 별개의 국가로서 이해되었으며 최치원이 당 황제에게 올린 글을 기반으로 발해를 자국사로부터 제외 시키려고 했다.
이런 조선의 태도는 임진왜란을 시작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전란 초기, 왜군에 의해 허무하게 군이 무너지고 임금이 의주로 피난가는 등, 임진왜란이 조선에 특히 사대부들에게 던진 정신적인 충격은 너무나도 컸다. 그렇기에 사대부들은 이러한 충격을 극복하기 위해 수, 당이라는 거대한 제국에 저항했던 고구려를 재인식 함으로써 자신감을 찾고자 했다. 특히 한백겸은 이를 학문적인 차원에서 접근하였고 동국지리지를 편찬하였다.
한백겸은 조선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외침이 많았던 이유를 고구려의 영토였던 요동과 심양, 그리고 부여지역을 고구려 멸망 이후 신라가 수복하지 못했던 것을 이유로 든다. 이는 고구려의 옛 땅을 압록강 이남으로 수축한 조선 전기의 시각으로부터 발전한 것으로써 그는 기존 동국통감과 동국여지승람의 오류를 찾아내 지적하고 고구려의 영토를 새로이 입증하는 등,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으로의 영토가 존재했다는 걸 입증했다. 이러한 대외 진출적인 한백겸의 서술은 물론 그의 신중하고도 열렬한 학술 고증 또한 존재하겠지만 또한 한백겸이 북인이라는 사실 또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북인들은 절대적인 군주의 지위와 부국강병을 외쳤고 당시 누르하치로 인해 전란의 조짐을 보이는 북방지역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던 것이다. 그렇기에 북인 중 한 명이었던 한백겸 또한 북방지역에 대한 재조명과 재인식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또한 조선 전기, 건국의 정당성의 확보를 제일 먼저 추구 했던 것과 달리, 임진난 이후에 이미 조선 왕조 지배 체제는 굳건해졌기에 조선이 굳이 옛 왕조들의 영토를 아우르지 않았다고는 해도 건국으로부터 20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조선의 정당성에 의문을 던질 이들은 존재치 않았다.
한백겸은 단순히 고구려의 재인식 뿐만 아니라 기존 자국사의 계보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기존 고조선에서 한사군, 삼한을 거쳐 삼국으로 이어지는 관점 대신 삼한과 한사군을 분리시키고 고구려가 일어나 한사군의 땅을 차지하고 마한, 변한, 진한과 같은 삼한이 신라, 가야, 백제가 되었다는 이분적인 관점을 제시했다. 한백겸은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를 잇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냈으며 그 후계자를 찾기위한 노력으로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적 계승성으로의 과정을 제시함으로 후대의 연구에 크나큰 도움을 주었다.
그렇다고 하나 기존 전형적인 국사관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안정복이나 이백같은 이들은 한백겸의 이원론적 국사관은 인정했지만 그 정통성은 북방이 아닌 압록강 이남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기자조선의 뒤를 이었다는 자국관은 명의 멸망 이후 조선이 중화의 계승자라는 소중화의 이데올로기를 뒷 받침 하는 중요한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기자조선에서 마한으로 그리고 그 마한이 통일 신라로 이어졌다는 계보가 정통성을 가졌다는 관점이 늘어났고 발해가 고구려의 영토를 차지했지만 말갈로 인식한다는 등, 자국이면서 외국으로 보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렇기에 발해의 위치는 고구려를 계승한 것이 아닌 발해가 존재함으로서 고구려의 영토가 상실되었다는 입장을 보였다.
발해가 사대부들로부터 자국사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18세기까지 가야한다. 그 시기에 들면 남방적 전개 대신 북방적 흐름을 강조하는 움직임이 나타나며 이휘종이라던가 유득공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 발해가 드디어 자국사로의 편입이 가능해진다. 그렇지만 이렇게 북방적 흐름을 강조하는 이들조차도 기자에서 마한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휘종은 대신 기자 → 마한 → 신라가 아닌 기자 → 마한 → 고구려라는 공식을 내세웠다. 그의 입장에서는 고구려야 말로 마한과 가장 가까운 존재이면서도 기자의 문화와 법도를 이은 존재가 삼국 중에서 고구려라 주장했다. 여러 이유가 존재하나 가장 큰 이유로는 고구려가 기자 조선의 영토 대다수를 계승했다는 점일 것이다. 이런 인식으로부터 발전하여 발해 또한 고구려의 영토적, 문화적 계승자로서 기자로부터 내려온 소중화를 이을 수 있었으며 발해의 멸망으로 기자의 영역을 잃어버렸다고 판단했다. 그렇기에 이종휘는 신라를 폄하하다시피 한 동시에 적극적인 북방 영토로의 진출을 주장했다. 현 조선 왕조가 기자의 후계자로서 중화를 회복하기 위해선 기자 영토의 회복 밖에 없으며 이를 이룩하기 위해선 고토 회복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휘종의 뒤를 이어 유득공은 한백겸의 지리인식과 이원적 자국사 인식을 받아들이면서 이종휘의 북방 중심의 자국사 인식을 드러냈다. 유득공은 신라의 근친과 왜와 가까웠으며 대동강 북쪽으로 진출했다는 점을 들어 발해의 위치를 강조하면서도 이휘종처럼 발해 만을 외치지 않았다. 유득공은 이휘종의 고구려 중심의 자국사 인식과 발해의 계승 관념을 이어 받는 동시에 전통적인 남방 중심의 역사인식을 통괄하여 발해와 신라를 대등하게 인식하는 남북국론을 제시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유득공은 한백겸과는 달리 현 조선이 북방 영토를 상실한 이유로 신라의 영토적 포기 보다는 고려의 계승 의식 포기를 들었다. 특히 고려가 발해의 역사를 집필하지 않았다는 점은 유득공에게 매우 아쉬운 부분이었고 결국 이는 그가 직접 발해고를 편찬하는 이유가 된다.
현 중국은 통일론적 다민족 국가론을 이유로 동북공정을 내세우며 발해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폄하시키는 등 자국사로의 편입을 추구하고 있다. 이는 기존 중국의 전통적인 화이관과 충돌하는 일임에도 중국은 현 정권 유지를 이유로 이를 계속하여 진행하고 있는 추세이다. 이러한 태도에 맞서 우리는 북방적 중심사에 더욱 더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는 동시에 단순한 침략의 원인이 아닌 동북아 평화를 위한 연구로 진행되어져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출처 | 이것도 과제 ㅎ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