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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의 아버지 박태준 회장님을 추모하며
게시물ID : soccer_1198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수원블루윙
추천 : 5
조회수 : 89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1/12/14 14:49:19
포항 스틸러스의 아버지 박태준 명예회장님께서 타계하셨습니다.
아시아 최강 포항 스틸러스와 전남 드래곤즈, 스틸야드와 광양경기장을 남기고 떠나신 고인의 업적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일전에 김현회기자가 썼던 칼럼을 올려봅니다.

축구게시판이니만큼 정치적 색은 잊고, 축구인으로서 박태준 회장님을 추모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김현회 | '철강왕' 박태준의 못 말리는 축구사랑 일대기
http://sports.news.nate.com/view/20110518n10147

'철강왕' 박태준과 포항제철, 그리고 스틸야드 

“그 대머리 할아버지가 얼마나 대단한 분이시기에 그러시나요?” 지난 15일 포스코 박태준 명예회장이 포항 스틸야드를 찾았다는 소식 이후로 많은 이메일을 받았다. 언론에서도 포항과 전남 구단 창단 및 축구전용구장 건설에 대해 간단히 몇 줄로 그의 경력을 소개하는데 그쳐 박태준 명예회장이 축구에 기여한 바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이 많다. 논란이 있는 정치인 박태준에 대한 업적은 제외하고 오늘은 박태준 명예회장이 얼마나 한국 축구를 위해 대단한 일을 했는지 자세히 소개하려 한다. 

광석 캐는 축구선수, 1960년대의 현주소 

“박 장군이 맡아서 한 번 제대로 일을 추진해보게.” 1964년이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박태준 육군 소장을 청와대로 불러 이렇게 말했다. 이렇다 할 산업이 없어 고민하던 중 중석 수출을 주요산업으로 발전시키려 했고 적임자로 박태준 소장을 지목한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각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박태준 소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예편한 뒤 이렇게 대한중석 사장으로 임명됐다. 그리고 1년 만에 박태준 사장은 만성적자에 시달리던 대한중석을 흑자로 돌려세웠다. 

“아니, 자네들 운동장에 있어야지 여기에서 뭘 하는 것인가.” 박태준 사장이 강원도 영월의 상동광업소를 시찰하던 때였다. “광석 캐고 있는데요.” 함흥철과 한홍기, 조윤옥, 김정석 등 당대 최고의 축구선수들이 곡괭이를 들고 막장으로 가는 모습에 박태준 사장은 충격을 받았다. 박태준 사장이 대한중석을 맡기 전인 1962년부터 대한중석 실업 축구단이 존재했지만 환경은 이 정도로 열악했다. 축구단 운영에 필요한 1억 원은 당시에 무척 큰 돈이었다. 훈련 시간을 제외하고는 선수들도 광부들과 함께 채굴 작업에 나서야 했다. 

박태준 사장은 불호령을 내렸다. “당장 이 친구들을 서울로 올려 보내게. 숙소를 마련해서 축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 이 친구들이 여기에서 광석 캐는 것 하고 공 열심히 차는 것 하고 어느 쪽이 더 나라에 도움이 되겠나.” 대한중석이 당시에도 1,000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이던 대단한 기업으로 성장하자 박태준 사장은 본격적으로 축구단을 개편, 정비했다. 서울에 숙소를 만들어 체계적인 훈련을 하도록 했고 선수들에게 국내 최고 대우를 해주는 등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대한중석의 전성기와 쇠퇴 

선후배 관계가 엄격했던 1960년대 당시 최대한 개개인의 의사를 존중한 것도 이례적이었다. 여간 시간에는 영어 강사를 초빙해 선수들의 영어 공부를 돕기도 했다. 훗날 한홍기 감독은 이 시절에 배운 영어를 바탕으로 축구 원문 서적을 탐독했을 정도였다. 그러자 곧바로 성적이 났다. 대한중석은 1965년과 1966년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에서 최강팀이던 제일모직을 제압하고 연거푸 우승했고 홍콩에서 열린 국제 대회에도 나설 정도로 실력이 급성장했다. 국내에는 대한중석의 적수가 없었다. 

하지만 곧바로 위기가 찾아왔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북한이 8강에 오르자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은 양지 축구단을 만들어 대한중석 핵심 선수들을 대거 빼갔다. 대한중석의 전력이 급격히 약해진 건 물론이었다. 중국이 텅스텐 발굴에 뛰어 들면서 대한중석도 점차 쇠락하던 그때 박정희 대통령이 또 다시 박태준 사장을 청와대로 불러 들였다. 한국 축구 역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한 대한중석 실업 축구단과 당대 최고의 스타들이 위기로 내몰린 순간이기도 했다. 

“우리나라가 철강 강국으로 도약해야 한다고 보네. 다들 비웃겠지만 국가의 운명이 걸린 사업이야. 자네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걸세.” 박정희 대통령은 박태준 사장에게 종합 제철 사업을 시작할 것을 지시했고 박태준 사장은 이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철이 있어야 농기계도 만들고 철길을 깔고 공장을 건설할 수 있었다. 철은 공업화를 위한 초석이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대한중석 사장을 그만둘 경우 축구단에 대한 투자와 선수들의 인프라 개선은 또 다시 후퇴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박태준 사장은 속으로 다짐했다. ‘제철소가 안정되면 반드시 그 선수들을 데려오겠어.’

포항제철, 경제사와 축구사를 새로 쓰다 

정부가 75%를 투자하고 대한중석이 25%를 보태는 합작투자 형태로 포항제철이 설립됐다. 당시 세계은행(IBRD)에서는 ‘한국에서 종합제철 사업은 시기상조’라는 보고서를 내놓으며 실패를 공언할 정도였다. 국내에는 아무런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신일본제철에 가 기술을 전수받아야 했다. 하지만 당시 신일본제철은 시덥지 않은 기술을 전수해주면서도 온갖 거만함을 떨었다. 거들먹거리는 신일본제철에 부글부글 끓던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은 이때 무릎을 탁 쳤다. 신일본제철에 실업축구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1970년 4월 1일 1기 설비를 착공한 지 3년 2개월 만인 1973년 6월 9일, 아침 7시 마침내 뜨거운 쇳물이 포항제철의 용광로에서 흘러나왔다. 한국 경제사에 있어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때맞춰 박태준 회장은 대한중석의 용사들을 다시 불러 모았다. 경제사의 역사적인 순간과 맞물려 포항제철 축구단은 이렇게 탄생했다. 박태준 회장은 포항제철 1기 준공 기념식에 맞춰 포항제철 축구단과 신일본제철 축구단의 친선 경기를 제안했다. “그간 신일본제철로부터 배운 게 많아 친선을 도모하는 의미로 한 경기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박태준 회장은 이날을 벼르고 있었다. 

대한중석 시절 당대 최고였던 선수들이 다시 모였다. 신일본제철 회장도 이 경기를 지켜보기 위해 포항종합운동장을 찾았다. 제철 기술이나 축구 실력이나 모두 신일본제철이 한 수 위라는 생각에 무척 여유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포항제철은 이날 이회택의 두 골을 비롯해 막강 화력을 뽐내며 신일본제철을 5-2로 격파했다. 박태준 회장은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신일본제철로부터 받은 자존심의 상처를 축구 경기로 되갚아주는 순간이었다. 포항제철 축구단 창단은 1973년이지만 전신을 대한중석으로 보는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다. 

비록 실업축구단끼리의 대결이었지만 흑백 텔레비전을 통해 이 모습을 지켜본 국민들은 열광했다. 신일본제철이 일본의 일개 실업팀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단지 일본을 이겼다는 사실이 기쁠 뿐이었다. 이후 몇 차례 두 팀 간의 친선경기가 열릴 때면 박태준 회장은 신일본제철 회장에서 이렇게 약을 올렸다. “오늘은 우리를 한 번 이겨보시죠.” 박태준 회장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일본에 큰소리 칠 게 하나라도 있어 좋았다.” 그는 해외 출장 때면 축구관련 책자를 꼭 챙겼고 김용식 감독, 한홍기 코치에게는 영국에서 발행하는 축구전문잡지를 정기구독하라고 할 정도로 축구에 애정이 많았다. 

박태준 회장의 못 말리는 축구사랑 

박태준 회장은 1983년 프로축구가 출범하자 눈을 외국으로 돌렸다. 프로축구 역사상 외국인 선수 1호인 세르지오와 호세가 포항제철 소속으로 뛰게 된 것도 박태준 회장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프로라면 당연히 경쟁력 있는 외국인 선수를 데려와야 한다”고 구단에 강력한 의사를 전달했다. 한국 축구사에 ‘최초’라는 수식어와 숱한 인연을 맺었던 박태준 회장이 프로축구에 외국인 선수를 최초로 들여왔다는 사실은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앞선 사고방식으로 먼 미래를 내다봤다. 

“‘발칸의 마라도나’ 게오르게 하지를 아는가.” 박태준 회장은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앞두고 간부회의에서 뜬금없이 이런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루마니아의 축구선수 하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모두들 고개를 저었다. “아마 하지가 조만간 엄청난 활약을 펼칠 걸세. 두고 보라고.” 박태준 회장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였고 실제로 하지는 4년 뒤인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세계 축구팬들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박태준 회장의 선견지명이 돋보인 유명한 일화다. 

하지만 그는 맹목적으로 축구를 사랑하지는 않았다. 프로축구 발전에 저해되는 일이 벌어질 때면 대놓고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게 대한축구협회처럼 거대한 단체여도 할 말은 반드시 했다. 1984년의 일이었다. 당시 대한축구협회는 LA올림픽 최종 예선전을 이유로 각 구단에 대표선수를 슈퍼리그 개막전에 출전시키지 말 것을 지시했다. 국가대표 축구보다 프로축구가 뒷전인 탓에 아무도 이 문제에 불만을 표시하지 못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포항제철도 최순호와 박경훈, 이길용 등을 뺀 채 개막전을 치러야 했다. 

그런데 박태준 회장은 협회에 정식으로 항의 공문을 발송했다. 요지는 이랬다. ‘축구 중흥과 국가 체육발전을 위해 우수선수 발굴 육성이 축구단 운영의 근간이나 축구협회의 일관성 없는 선수 관리로 방향을 잃게 됐다.’ 박태준 회장은 더 나아가 직접 협회 고위 임원을 만났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래 가지고 어떻게 프로축구를 정착시키고 중흥을 꾀하겠는가. 언제까지 대표팀만 그렇게 바라보고 있을 것인가. 대표 선수의 발을 묶는다면 우리는 슈퍼리그 개막전 출전을 보류하겠다.” 
 
스틸야드, 세상의 빛을 보다 

1988년 말이었다. 당시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에 나선 대표팀은 무패 행진을 내달리며 가볍게 월드컵 본선 진출 티켓을 거머쥐기 직전이었다. 이 사실에 대해 이탈리아 언론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전용구장 하나 없는 축구 불모지인 한국에서 월드컵 2회 연속 본선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비아냥 섞인 보도가 터져 나왔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축구전용구장은 고사하고 천연 잔디 구장도 한 손가락에 꼽을 만큼 열악한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 축구전용구장이라니…. 해외 언론의 보도가 굴욕적이었지만 우리로서는 전용구장을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우연히 박태준 회장이 이 보도를 접하게 됐다. 그는 부글거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한국 축구의 발전에 그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던 박태준 회장은 해외 언론의 보도에 분노했다. 당시 월드컵 2회 연속 진출이라는 쾌거에 가렸지만 사실상 불모지나 다름없는 우리나라의 축구 환경은 반드시 개선이 필요했다. 박태준 회장은 모두가 안 될 것이라던 철강 산업을 세계적인 반열에 올려놓았던 추진력을 또 한 번 발휘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는 곧바로 관계자를 불러 들여 이렇게 말했다. “당장 축구전용구장을 건설해. 당장이야.” 

포항제철 건설 때와 마찬가지로 국내에 축구전용구장을 지을 만한 기술은 없었다. 이때까지 지어본 적도 없고 지어볼 생각조차 한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축구전용구장이란 게 있는 지도 모르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당시 축구전용구장을 설계한 이는 “맨 땅에 헤딩하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당시 포항에는 종합운동장이 있어 따로 축구를 할 곳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축구전용구장을 짓는다고 하자 뒷말도 많았고 반대도 극심했다. 국정감사장에 나가 이 문제로 국회의원들의 손가락질을 받았고 국내에 아무런 자료가 없어 해외 유명 축구전용구장을 돌아다니며 발품을 팔아야 했다. 

포항제철 건설 당시 볼트 하나 하나까지 불량품이 있는지 점검했던 박태준 회장도 직접 팔을 걷어 올리고 축구전용구장 건설에 뛰어들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박태준 회장은 그렇게 1990년 11월 10일 한국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축구전용구장을 완공했다. 이 경기장은 최고의 환경을 자랑한다. 경기장과 관중석의 간격은 불과 3m다. 제 아무리 훗날 우리나라에 멋진 월드컵경기장이 많이 들어섰다고 해도 이 경기장을 따라올 수는 없다. 관중석 어디에 앉건 한 눈에 그라운드를 바라볼 수 있는 시야도 일품이다. 우리는 이 명품 경기장을 이렇게 부른다. 스틸야드. 

박태준 회장은 시간이 날 때마다 경기장을 직접 찾아 그라운드의 잡초를 뽑았다. 그리고 1995년, 국제축구연맹(FIFA) 실사단이 2002 월드컵 유치를 선언한 한국을 찾았다. 그들은 한국 축구의 인프라를 직접 확인하고 싶어 했다. 대한축구협회는 고민할 것도 없이 실사단을 포항으로 안내했다. 한국이 보여줄 축구 인프라는 이 축구전용경기장 뿐이었다. 지방 도시에 우뚝 선 축구전용구장을 본 실사단은 “원더풀”이라면서 연신 감탄했다. 아마 스틸야드가 없었다면 우리는 과연 실사단에게 한국 축구의 인프라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있었을까. 

박태준 회장의 정신, 스틸러스 웨이 

박태준 회장은 포항제철과 스틸야드뿐 아니라 전남 드래곤즈와 광양전용구장 역시 같은 방식으로 추진해 성공적인 결과물을 내놓았다. 특히 광양전용구장을 만들 때는 증축을 고려해 지붕을 얹지 않을 정도로 미래를 내다보는 등 당장에 급급한 일만을 처리하지 않았다. 박태준 회장의 추진력과 결단이 없었다면 우리는 2002 한일월드컵과 축구전용구장, 프로축구의 발전을 남의 이야기로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지난 15일 자신이 건설하고 직접 잡초를 뽑았던 스틸야드에 돌아온 ‘왕회장님’의 모습은 그가 한국 축구에 기여한 부분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좋은 계기가 됐다. 

포항스틸러스는 깨끗하고 정정당한 승부를 추구하고 팬을 위한 축구를 구사하겠다는 ‘스틸러스 웨이’로 K리그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런데 놀라운 건 이 ‘스틸러스 웨이’가 박태준 명예회장의 정신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포항스틸러스 김태만 사장은 ‘스틸러스 웨이’에 대해 묻자 이렇게 답했다. “당시 축구전용구장 및 클럽하우스 건립, 유소년 클럽시스템 운영 등을 어떻게 생각하고 추진했는지 존경스런 마음이 절로 우러났다. 박태준 명예회장의 창의적인 사고에 자극 받았다. 그분의 정신에 누가 되지 않는 일원이 되려고 고민한 끝에 만들어진 게 바로 ‘스틸러스 웨이’다.” 

박태준 명예회장이 1973년 포항제철 용광로에 직접 집어넣은 불은 38년이 지난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꺼진 적이 없다. 그의 열정과 함께 자란 한국 축구도 마찬가지다. 박태준 명예회장이 한국 축구에 지핀 불은 포항제철의 용광로에서 38년째 활활 타오르고 있는 불처럼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이다. 한국 축구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박태준 명예회장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마지막으로 그가 22년 전 국회 국정감사 당시 축구전용구장 건설을 트집 잡는 국회의원에게 했던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 “혈세 낭비라 생각하는 논리를 말해보라. 대한민국에도 축구전용구장이 없는 게 문제지 건설한다는 것이 왜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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