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가 거실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TV에는 살인사건이 보도되고 있었는데, 그 수법이 잔인하고 같은 동네에서 연쇄적으로 살인이 일어나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범인은 택배 배달원이나, 믿을 만한 가짜 신분을 밝혀 집주인을 안심시키고 침입했다고 합니다.”
차분한 앵커의 목소리가 TV에서 흘러나왔다. 여자가 더욱 관심을 둘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연쇄살인이 자신이 사는 아파트 단지의 근처에서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동네 곳곳에는 형사와 수사관들이 오고 가고 동네 주민들이 사건 현장에 몰려 수근 되는 등, 여러모로 분위기가 불쾌해져 있었다. 사실 형사들이 아파트 주위를 오고 가는 것에 대해, 여자가 다른 주민들보다 조금 더 언짢은 감정을 가지는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띵-동” 여자가 커피를 마시려고 TV를 끄고 일어났을 때, 마침 초인종이 울렸다. 여자는 현관문 쪽으로 걸어나갔다. “누구세요?” 라고 여자가 묻자, 약간은 딱딱하고 직업적인 말투의 답변이 돌아왔다. “아, 여기 주민들을 상대로 목격자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몇 가지 여쭈어 볼 수 있을까요?” 여자는 조금 당황한 듯 보였지만, 이내 침착하고 현관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키가 훤칠하지만 안색이 피곤해 보이는 한 남자가 한 손에는 작은 가방을 들고, 다른 손에는 형사 배지를 보란 듯 내밀고 있었다. 하지만, 여자는 마치 누군가 보고 있기라도 한 듯 허둥지둥 주위만 살폈다. 그리고 이내 안정을 취하고는 한 발짝 물러서며 들어오라는 시늉을 했다. “아… 예” 남자는 그녀의 시늉에 무의식적으로 건성적인 대답을 하고 한 발짝 들어섰고, 문은 약간의 틈만 남겨 놓고 반쯤 닫혔다. 그리고 남자는 별다를 게 없는 집을 쓱 둘러보고선 말을 이었다. “아… 뭐 아시겠지만, 이번 사건 때문에 혹시 뭐 특별히 수상한 사람이나 물건을 보신 적 있으신가 하고 왔습니다.” 여자는 약간 초조한 기색을 띠며 조용하고 느릿하게 대답을 했다. “저… 그게 사실…” 여자는 말을 흐렸지만, 무엇인가 단서를 아는 듯한 여자의 말투에서, 남자의 신경은 바짝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여자가 말을 이었다. “아, 그게 제가 수상한 사람을 보긴 했어요.” 여자의 말투는 마치 남자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듯했다. 남자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직감적으로 알아채고는 놓치지 않고 말을 했다. “저희가 비밀보장은 확실하게 해 드리니까, 안심하고 말씀하셔도 됩니다.” 하고는 더욱 집안으로 들어섰고, 현관문은 조용히 닫혔다. 여자가 우물쭈물하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남자는 그런 여자의 행동이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넌지시 말을 던졌다. “그래도 누군가가 볼까 봐서 그러세요? 그럼 제가 나갈 때는 어떻게든 베란다 창문으로 나가겠습니다.” 남자의 농담 섞인 말투에, 그제야 안심이 된 듯이 여자는 손짓하며 좀 더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한다. “마침 커피를 마시려던 참인데, 앉아서 이야기 드릴게요.” 남자는 흔쾌히 수락했다. 여자가 어떤 단서를 알고 있기에 남자의 태도도 적극적으로 변해 있었다.
벌써 현관문이 닫혔지만, 남자가 거실로 발을 옮기자 조용한 집의 분위기가 한층 더 조용해지는 것 같았다. 남자는 소파에 앉아 집안을 둘러보며 가방에서 수첩과 펜을 꺼냈다. 그리고 부엌에서 주인 여자가 준비해오는 커피를 기다렸다. 잠시 후, 여자가 양손에 커피를 들고 와서는 조용히 커피를 남자에게 내밀었다. 남자는 커피를 받고는, 형식적으로 한 모금 마셨다. “저 사실은…” 이번에는 여자가 먼저 말을 꺼냈고, 이미 형사의 손에는 수첩이 들려 있었다. “아… 커피 맛은 어때요?” 엉뚱한 여자의 질문에, 안 그래도 피곤한 상태였던 남자는 살짝 짜증이 났지만 애써 감추며 말을 이었다. “아, 커피가…” 남자는 커피를 조금 더 깊게 마셔보고는 조금은 솔직하게 말을 했다. “조금 씁쓸한 맛이 있긴 해도 마실 만합니다.” 여자는 아쉬운 듯 말을 이었다. “그래요? 비싸게 주고 산 건데… 씁쓸한 맛이 나다니…” 만약 지금 살인 사건에 관한 조사 중이 아니었다면, 이런 쓰고 맛이 없는 커피를 비싸게 주고 사다니 한심하다고 비아냥거리고 싶었지만, 남자는 그보다 더해야 할 일이 많았기에 차분히 말을 했다. “혹시 수상한 사람이라도 보셨다던가…” 말이 끝나자 여자는 천천히 남자를 훑어 보더니 말을 이었다. “사실 어떤 남자를 보기는 했어요. 그게 그 사람은 왠지 남들보다 피곤해 보였고 뭔가를 조사하러 다니는 듯했거든요.” 남자는 수첩에 기록해가며 질문을 던졌다. “그럼 혹시 옷차림이나 머리스타일이 기억나시나요?”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기록을 하고 있던 남자는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게 170쯤 넘어 보이는 키에, 청바지를 입었었고…” 분명히 말이 더 남았는데도 여자는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는 엉뚱한 말을 했다. “커피 좀 더 드셔 보세요.” 살인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자꾸 커피에만 신경 쓰는 여자의 태도를 못마땅해하며, 남자는 일부러 커피를 양껏 들이켜 마신 후 여자에게 쏘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사실 소파에 앉아 있어서 그런지, 몸이 점점 나른해지는 것도 남자의 짜증 섞인 말투에 한몫했다. “저희가 지금 한 시라도 범인에 대한 인적 사항을 수집해야 합니다.” 여자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까 못다 한 말을 이었다. “청바지를 입고, 황색 티를 입고 있었어요.” 여자의 말투는 좀 전과는 다르게 약간은 떨리는 목소리였다. 남자는 그런 여자의 행동이 조금 이상했지만, 신경 쓰지 않고 기록을 이어가며 말을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점은요?” 여자는 여전히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노란색 체크무늬가 있는 가죽 가방을 들고 있었어요.” 그 말을 듣고 남자는 기록을 중지하고는,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바지와 티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인상을 양껏 찌푸리며, 옆에 놓인 자신의 가방을 보았다. 그리고 엄청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청바지에 황색 티를 입고, 노란 체크무늬 가방을 가진 사람은, 바로 남자는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게 뭐 하자는 겁니까!” 언성을 높여 말하며, 수첩을 강하게 바닥에 내리쳤다. 그 모습을 본 여자는 아직 할 말이 더 있다는 듯이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좀 전의 떨리는 목소리와는 다르게 오히려 차분한 목소리였다. “형사님, 생각을 해보세요. 제가 사는 동네에서는 신분을 속이고 사람을 죽이는 살인마가 돌아다니고 있다 구요” 남자는 화가 났지만, 일단 여자의 말을 끊지 않고 계속 들었다. 그리고 여자가 말을 이었다.
“이런 살인마가 동네에 있을지도 모르는데… 평범한 사람이라면 형사라고 해서 쉽게 문을 열어 주겠어요?”
남자는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하지만, 이내 다리에 힘이 풀리고 눈꺼풀이 무겁게 감겼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을, 여자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