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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긋지긋한 기억에도 추억이 새겨져 있었다면
게시물ID : readers_2281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부두노동자
추천 : 2
조회수 : 42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11/23 04:07:23
 
 
 
우리집은 아주 가난했다. 서울시 서대문구 남가좌동의 한 작은 집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나는 그 일대에서도 아주
가난한 집에 살았다. 50번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카센터를 지나면 작은 삼거리 골목이 나오는데, 항상 똥차가 서있는 그 골목을 가로질러
들어가면 황량한 공터에는 누군가가 심어놓은 호박이 자라고 그 공터를 지나 좌측으로 보면 파란철쓰레기통 옆에 연탄재 그득그득 쌓여있는
집이였다. 집안으로 들어가면 우측에 화장실과 그 옆에 창고가 보이고, 길고 좁게 뻗은 마당 한켠에는 어머니가 언제나 채소를 씻고 있었다.
바퀴벌레가 자주 나오는 마룻바닥 위에는 나무로 된 선반과 그 위에 아버지가 중동 다녀오면서 사온 일제 밥솥 그리고 골드스타 냉장고가 있었다.
 
아버지는 중동에 다녀오면서 또한 인켈 오디오와 코끼리 tv도 사왔는데, 사실 그것들은 아버지가 유년시절부터 꿈꿔온 서울 복판의 2층짜리 집에
들어갈 예정이였던 것들이였다. 큰아버지가 아버지의 중동외화를 전부 써버리면서 남은것은 그것들밖에 없게 되었는데 나는 그것들 때문에라도
우리집이 굉장한 부자인줄로만 알고 지냈지만 남들이 다 사는 죠다쉬 쓰리쎄븐 가방을 사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에는
그리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어린시절 아버지에게 많이 맞으면서 자랐다. 구구단을 외우지 않아서, 학교에서 선생님 말씀을 듣지 않아서, 아빠가 자는데 만화영화를
봐서, 혹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아서였다. 나는 아버지가 술을 마시기를 매우 기다렸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술을 마시게 되면 나를 때리지 않았고
치킨을 사줬다. 다음날 학교에 갈 때 먹고싶은 떡볶이 때문에 백원만 달라고 해도 아버지는 웃으면서 돈을 줬지만 술을 마시지 않은 평소의 날에는
사소한 실수만으로도 뺨을 맞거나 발로 채이기 일쑤였다.
 
나는 술을 마시면 온화해지는 아버지가 좋았다. 평소에는 잘 웃지도 않고 말도 안하던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말이 많아지고 잘 웃었다.
 
잠깐 서두에 집 이야기를 했던가. 남가좌동 중에서도 가장 가난할 것만 같은 그 집에 살면서 또 그렇게 무서운 아버지 밑에서 나는 나들이를
기대할 수 없었다. 아버지에게 술이라도 먹여 어떻게 나들이를 가볼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우스운 생각도 하지만 남들이 자연농원이니 롯데월드니
그런데를 갖다왔다고 하면 또 선생님이 '우리 학생들 놀러갔던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보세요' 하면 나는 가본적도 없는 놀이공원 이야기를
지어내야만 했다. 선생님은 내가 놀이공원 이야기를 지어내서였는지 아니면 엄마가 선생님한테 육성회 선물을 안줘서 그랬는지 내 그림을 볼때마다
너는 그림이 어떻고 생긴게 어떻고 하면서 손바닥이나 뺨을 때렸고 집에가서 그 이야기를 하면 아버지는 또 술을 마시고 웃었다.
 
여름엔 너무 더워 선풍기가 뜨거운 바람을 내뿜고 겨울에는 항상 장판 밑이 까매질 정도로 연탄을 태워도 춥던 그 집에서 아버지는 어느날부터인가
한달에 한번 우리를 김포의 한 창고로 부르곤 했다. 토요일날, 학교를 마치고 집에오면 어떤날은 엄마가 평소보다 좋은 옷을 입고 갈아입을 옷을
챙겼는데 세살터울의 동생은 사탕먹으며 엄마가 땋아주는 머리를 기다리고 그럼 난 말하지 않아도 책가방을 방에 던져놓고 새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날은 김포 가는날이였다.
 
몇번 버스인지 기억도 안나는 버스를타고, 신촌에서 내리면 신촌에서 또 등촌동 가는 버스를 탔는데 가는길에 항상 인공폭포를 지났고
두어정거장쯤 더 가다가 내려 김포 검단 방향으로 들어가는 읍내에서 내리면 그 어느때보다 해맑은 아버지가 마이티 트럭을 몰고 우리앞에 오곤했다.
우리는 아버지의 차인줄만 알았던 그 차에 낑겨타고 조금 더 가다가 정육점에서 내려 고기를 아주 많이 사고, 술과 음료수를 아주 많이 샀다.
 
비포장도로를 조금 달리다보면 장사를 하는지 안하는지도 모를 슈퍼에 들러 소고기라면 네개를 사고서야 마침내 창고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소똥냄새가 항상 나는 그 창고 앞쪽으로는 도로를 제외한 모든것들이 논밭뿐이였다. 산이라고는 저 멀리 조금 보이는게 전부고 사람목소리는 커녕
동물소리만 간혹 들리는 아주 조용한 그곳이 바로 우리가 김포창고라고 부르는 곳이였다. 아버지가 우리를 그곳에 부르는 날은 아버지가 창고숙직을
하는 날이였다.
 
창고라고는 하지만 그곳에서 꽤 많은 일을 한다고 말이라도 하는 듯 창고옆에는 우리집에 세배쯤 큰 가정집이 하나 있었다.
아버지는, 평소에는 직원아저씨들이 일하는 곳이지만 오늘은 우리집이라고 마음껏 놀아도 좋다고 했다. 나는 창고 구석에서 거의 썩어가는
잠자리채를 들고 나와 집에서 챙겨온 잠자리통을 함께 가지고 주택 뒷편 풀이 무성한 잡초밭으로 향했다. 거기엔 잠자리도 거미도 또 방아깨비와
메뚜기가 아주 많았다. 동생이 몇번인가 버스를 갈아타고 오느라 피곤에 지쳐 자고있는 사이에 나는 종횡무진 잡초밭을 돌아다니며 곤충을 잡았고
해가 뉘엿뉘엿 지며 밥냄새가 올라올 때쯤이 되어서야 토요일날 하는 '위제트'를 보려고 집으로 기어들어가곤 했다.
 
집에서는 아버지가 위제트를 보지 못하게 했다. 왜냐하면 야구를 봐야 했으니까. 그렇지만 김포창고에 간날은 내가 위제트를 볼 수 있었다.
나는 위제트를 보며 말벌박제된 모형도 만지며 놀고 유난히 해맑은 아버지에게 장기도 배우고 팔씨름도 했다. 그러다보면 엄마가 저녁준비
다 됐다며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불판을 올려놨다. 밤새도록 삼겹살을 구워먹으며 아버지는 나와 동생에게 노래도 시키고 옛날이야기도 많이
들려주고 엄마와 술도 많이 마셨다.
 
김포창고에서 돌아오는 길은 항상 일요일 이른 오후였다. 유난히 피곤한 아버지가 우리를 트럭으로 집앞까지 내려다주고 다시 김포로 향하는것은
지금생각해보면 굉장히 힘든일이였지만 버스를 다시 타고 그 먼 거리를 되돌아가는 것이 어머니에게 굉장히 힘든일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아버지 당신은 그게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을테다.
 
지긋지긋한 기억에도 추억이 새겨져 있다면...
아마 그런 부분들이 추억이라고 부를만한 것들이 아닐까 한다.
남들이 가지고 있는 놀이공원이나 또 어떤 맛난 음식들에 대한 좋은 기억이 있는 반면 그들에게도 말하지 못할 어두운 시절이 있었듯,
또 나에게도 남들이 가진 모든것을 가지지는 못했지만 남들은 경험할 수 없는 좋은 기억들이 있듯이
작고 큰것의 차이일 뿐이다. 나 역시. 그래.
 
 
나에게도 작지만 추억이라는게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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