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닮지말아야하고 닮아야한다.
게시물ID : humordata_22871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껄뱅이오십
추천 : 12
조회수 : 1455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05/03/10 15:24:38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은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자주 평화통일에 모두 바치신 민족의 지도자이며 겨레의 큰 스승이시다. 선생은 1876년 황해도 해주 백운방(白雲坊)에서 극빈한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서당교육을 받았으며, 1893년 동학에 입도하였고, 1894년 팔봉접주(八峰接主)로 임명되었다. 황해도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선봉장이 되어 해주성을 공격하였다. 동학농민운동 후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 안태훈(安泰勳)의 집에 머물면서 유학자 고능선(高能善)에게 유학을 배웠으며, 만주지역을 시찰하다 의병활동에 가담하였다. 1896년에는 치하포에서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를 위해 일본 육군중위 스치다(土田讓亮)를 처단하고, 체포되어 인천감리서에 투옥되었다. 선생은 옥중에서 신서적들을 읽고 개화사상을 키웠으며, 탈옥 후 승려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1899년 환속한 후에는 황해도 각지에 학교를 설립하는 등 신교육운동에 노력하였다. 또한 1905년 을사조약 무효투쟁을 벌이는 등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에는 국권회복운동의 국내 최대 비밀조직이었던 신민회에 가입하여 황해도 총감으로 활동하다가, 1911년 안악사건 105인사건 등으로 수감되었다. 1915년 출옥한 후에는 동산평농장의 농감생활을 하며 농민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 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임시정부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령 등을 역임하면서 당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임시정부를 지키고 활성화시키기 위하여 진력하였다.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1932년의 이봉창 윤봉길 의거를 일으켜 내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선생은 일제의 추격을 피해 피신생활을 하면서, 한인청년들을 중국군관학교에 입학시켜 군사훈련을 받게 하는 등 다가올 독립전쟁에 대비하였다. 1940년 충칭(重慶)에 정착한 선생은 임시정부 주석(主席)으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여 군사활동을 전개하였으며,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이루었고, 연합국으로부터 전후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는 등 항일운동의 최선봉에서 조국독립을 위해 투쟁하였다. 1945년 해방된 조국에 돌아온 선생은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 결정된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민족 스스로의 통일독립국가 건설을 주장하며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1948년에는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연합 소위원회의 결의에 반대하며, 남북한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의하고, 평양에서 '남북조선제정당 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를 개최하였다 이후 선생은 민족통일을 위한 노력을 전개하다가, 1949년 6월 26일 통일운동을 저해하려던 세력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닮으십시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패전기념일(종전일·8월15일)을 피해 13일 오후 4시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범들의 위패가 보관돼 있는 야스쿠니(靖國)신사를 전격 참배했다. 일본 총리가 재임 중에 8·15를 맞아 공개적으로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한 것은 1985년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총리 이후 16년 만의 일이다. 96년 7월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당시 총리가 참배했으나 이는 자신의 생일에 개인자격으로 한 비공개 행사였다. 고이즈미 총리는 참배하면서 방명록에 ‘내각총리대신’이라고 서명했으나 신도(神道)의식을 따르지 않고 공식참배인지 사적참배인지도 밝히지 않았다. 그는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관방장관을 통해 발표한 담화에서 “전진(戰陣)에서 사라져간 여러 영령들 앞에서 오늘날 일본의 평화와 번영이 그들의 희생 위에서 세워졌음을 생각하며 매년 평화에 대한 맹서를 새롭게 해 왔다”며 “이 같은 내 신념을 설명하면 우리 국민과 근린제국의 여러분도 이해해 줄 것이라는 생각에서 8월15일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겠다는 취지를 설명해 왔다”고 밝혔다. 그는 한국과 중국의 반발을 의식한 듯 “가능한 한 빨리 중국과 한국의 요인들과 아시아 태평양의 미래와 평화 발전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싶다”고 덧붙였다. 고이즈미 총리는 참배가 끝난 뒤 기자들과의 일문일답에서도 “한국 중국 등 이웃나라와 우호관계를 꾀하고 싶다”며 “오해가 있다면 풀고 싶다”고 말했다. 닮지 말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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