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에서 이어진 글 ~~~~~~ -본론- 제목 : 불교인이 본 기독교 이 글은 서기 1992년 6월 13일에 서울의 서강대 종교. 신학연구 소에서 윤호진 교수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과)가 '불교인이 본 기독교' 란 제목으로 강연한 원고입니다. -길상사 게시판에서 퍼옴- 1. 서론 2. 신의 창조문제 3. 구세주로서의 예수 4. 기독교의 사랑 5. 예수의 기적과 부활 6. 결론 으로 구성 되어 있습니다.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을 아시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1.서론 언제인가 한 기독교 친구는 나에게 "너는 기독교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아무것도 모르면서.."라고 말했다.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까지 지나가는 이야기로 기독교에 대해 말하는 일은 있었지만 이번처럼 글로 쓴 일은 한번도 없었 다. 그 이유는 내가 믿지 않는 다른 종교를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글을 청탁 받았을 때 선뜻 승낙할 수 없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라는 문제를 위해서는 이와 같은 글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독교와 불교의 올바른 대화를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두 종교간에 넘을 수 있는 벽과 그럴 수 없는 벽을 서로가 확실하게 아는 일일 것이다. 기독교에 서는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되는 사실일지라도 불교에서는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기독교인들에게 신(神)의 존재는 당연한 것이 겠지만, 불교인들은 교리적으로 <절대자(神)>의 존재를 받아 들 일 수 없는 것이다. 불교인들에게 신에 대해 아무리 설명해 주어 도 기독교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그와 같은 신의 개념에는 도달시 킬 수 없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에게 불교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 다. 이 글은 토론을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다. 단지 불교인이 기독 교와 접하면서 (특히 성경이나 신학서적을 읽으면서) 생각하게 되 는 것을 그대로 말해보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이 글을 가능한대 로 솔직하게 쓰려고 한다. 기독교인들에게는 듣기 거북하고 또 충 격을 줄 수 있는 표현이라 해도 피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게 함 으로써 불교인이 기독교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다 확실하게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신의 창조문제 신의 창조문제 만약 불교인들에게 신과 인간의 창조문제에 대해 말하라고 한 다면, 그들은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인간 이 신을 만들었다>(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불교인들에게는 신이 존재하는가 않는가라는 것은 아예 문제로 제기조차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문제 역시 문제로 제기될 수가 없다. 이와 같은 입장에 서 있는 불교인들이 구약성서의 창세기를 읽 을 때 그것이 그들에게 진지한 것으로 나타날 리가 없다. 일종의 신화, 또는 동화와 같은 것으로 밖에 생각되어지지 않는다. 그 이 상의 것으로 받아들이라고 한다면 한마디로 그것은 불가능한 일 이 될 것이다. 불교의 우주관에 의하면, 우리 가 살고 있는 세계, 즉 지구는 우주의 중심도 아닐 뿐 아니라 셀 수도 없이 무수하게 존재하고 있는 세계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 다. 우리가 말하는 태양계(지구가 아니고)같은 것이 1,000개 모여 있는 것을 소천세계(小千世界) , 이 소천세계가 1000개 모인 것을 중천세계(中千世界) , 다시 이 중천세계가 1000개 모인 것을 대천세계(大千世界)라 한다. 그러므로 이 대천세계는 우리 태양계같 은 것이 100억개 이상 모인 것을 가리킨다. 우주에는 이와 같은 대천세계가 역시 무수하게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세계들은 어떤 에너지(業力)에 의해서 형성되었다가 (成), 그런 상태로 유지되 다가 (住), 그리고 파괴되어 (壞), 원자상태로 분해된다 (空). 이와같은 성,주,괴,공의 운동은 끝없는 시간에 걸쳐 되풀이 되는 것이다. 인간도 다른 존재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이 우주적인 흐름 속에서 생(生)과 멸(滅)을 되풀이 하면서 존재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와 같은 우주관을 가지고 있는 불교인들에게 구약에서 말하고 있는 세계창조의 이야기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불교인들은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불교인들은 창세기를 포함한 구약을 읽으면서 신의 인간창조와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설명에 심한 반발을 느끼게 된다. 신의 전지전능(全知全能)도, 신의 사랑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신의 무지(無知),무능(無能),무자비(無慈悲),독선(獨善) 같은 것만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신은 인간을 창조하면서부터 잘 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신이 저지른 그 한번의 잘못 으로 인해 신 자신은 물론이고, 인간들도 한없는 고통을 받게 되 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신은 처음 인간을 만들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같은 아담 과 이브에게 <먹으면 반드시 죽을> 그 위험한 선악과나무 (그것이 상징적인 것이었다 할지라도)를 그들 곁에 심어둘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신이 진정으로 그의 자식과 같은 아담과 이브의 장래를 생각했다면 그런 나무는 아예 만들지 말았어야 했을 것이고, 그 것을 만들지 않을 수 없는 어떤 사정이 있어 부득불 만들었다면 일이 잘못되고 난 뒤에 한 것처럼, 미리 아담과 이브가 그 나무 에 접근하지 못하게 무슨 장치를 설치해야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 다. 그리고 설사 그들이 신의 뜻에 반해 그 과일을 따먹었다 하 더라도 신이 그들의 자애로운 부모와 같은 입장에 있었다면 <옳 고 그름>(선악)조차도 모르는 상태의 아담과 이브에 대해 그렇게 가혹한 벌을 줄 수 없었을 것이다. 단 한번의 회개의 기회도 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잘못에 대해 그 일과는 관계도 없는 그들 의 후손들에게까지 영원한 벌을 내린 처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한다. 게다가 더욱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은 신 자신은 보호자 로서의 책임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부모가 아무 것도 모르는 아기 곁에 위험한 농약 병을 두었다가 아기가 그 농 약을 마시고 탈이 났을 경우 그 부모는 어린애를 벌주지는 않는다. 그 대신 농약 병을 아기 곁에 둔 그 부주의에 대해 그들 자신 이 책임을 느낀다. 에덴동산 이후의 일들도 비슷하다. 신이 미리부터 이 세상이 죄 악으로 가득 할 줄 몰랐다고 한다면 신은 전지한 존재라고 할 수 없을 것이고, 그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두었다면, 그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었거나 전능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불교인들이 구약을 읽으면서 받게 되는 인상은,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신이 모든 것을 알 수 있고(전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전능)존재이기를 바라고 있지만, 실제로 그들이 모시고 있는 신 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는 것이다. 신은 인간을 창조하기 전에 자 기의 창조물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예측할 수 없었고, 그 후에 도 그들을 통제하고 관리할 능력이 없었던 것 같다. 신 자신도 그 것을 인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신은 인간을 창조한 뒤 곧 <왜 사람을 만들었던가>, <공연히 사람을 만들었구나>라고, 자신의 행위에 대해 후회를 하고 있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인간 들을 홍수로 모조리 쓸어버리거나, 유황불로 태워 버리거나, 또는 여러가지 언어를 사용하게 함으로써 혼란에 빠지게 한다. 구약 에서는 신이 그의 피조물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과 싸움을 하느라 고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구약을 읽으면, 신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신에 대한 존경이나, 감사, 사랑등의 감정을 조금도 느낄 수 없다. 우리에게 나타나는 신은, 앞뒤 일은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능, 자기에게 복종하는 자만을 사랑하고 도와주는 편애, 자기일 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 잘못을 저지를 때는 가차없이 벌 을 주는 무자비, 독재적이고 폭군적이고, 옹고집장이 노인의 모습이다. 불교인들이 가장 이해할 수 없어하는 것은 구약의 그 내용보다도, 기독교인들이 이와 같은 신상(神像)으로부터, 어떻게 <신은 전지전능하고,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는 존재>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3.구세주로서의 예수 구세주로서의 예수 창조자로서의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는 불교인에게는, 그 창조 자가 보내었다는 구세주도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임에는 틀림없다. 불교인들에게는 예수는 붇다나, 공자, 소크라테스와 꼭 같은 한 사람의 인간일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불교인들에게는, <예 수는 신이 보낸 메시아인가, 그는 십자가에 못박힌 뒤 3일 후에 부활 했는가> 라는 문제는 아예 처음부터 문제로 제기조차도 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성경속에 나오는 예수의 메시아로서의 모든 활동 이나 그것과 관련된 모든 가르침은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않게 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황당무계>한 일에 그렇게 진지하게 매달리 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이해할 수 없어하기 까지 한다. 불교인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그 자신들만이 예수를 <구세주>로 믿 을 수 없어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자체내에서도 그를 신이 보낸 메 시아라고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첫째, 예수를 <무염잉태(無染孕胎)>했다는 예수의 어머니와 그의 친 형제들조차도 예수를 메시아 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예수가 고 향에서 가르치자 그들은 <그분(예수)이 정신이 나갔다>라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를 붙들러 나서기까지 했음을 본다. 예수와 오 랜동안 함께 살았던 고향사람들도 그를 <고작 장인(목수)>정도로 보 았을 뿐 구세주와 같은 ?건?존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오랜 세월동안 그렇게 간절하게 하나님이 보낼 그들의 메시아를 기다 려온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예수에게서 진정으로 구세주의 모습을 보았다면 아무리 완고하고 사악한 사람들이었다고 하더라도 예수를 그렇게까지 십자가에 매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를 죽였던 것은 예수가 <사기꾼>으로서 그들의 신을 모독한다고 생각하 고, 그와 같은 사기꾼을 처단하는 것이 신을 더 잘 섬기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예수가 직접 선택해서, 모든 것을 보여 주고 가르쳤던 열 두 제자들 가운데서 조차도 예수를 메시아라고 확신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몇몇은 그를 정치적인 메시아로 생각하 고 있었던가 하면, 어떤 제자는 부활한 예수가 눈앞에 나타났는데도 믿지 못해 십자가에서 받은 상처를 확인까지 해야했다. 그리고 예수의 처형앞에서 보인 제자들의 비겁함과, <빈무덤>앞에서 보인 그들의 반 응에서도 그들이 예수의 존재를 얼마나 믿지 못했던가 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제자들은 두고서라도 당사자인 예수 그 자신조차도, 자 신을 메시아라고 믿고 있었던가 하는 의심을 가지게 한다. 모든 인류를 구한다는 크나큰 사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파견된 예 수가, 그리고 죽으면 삼일 후에 부활되어 하느님 곁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예수가, 죽음 앞에서 어떻게 그렇게 겁을 내고, 고통스러워하고, 또한 절망했을까. 제자들에게 <내 영혼이 근심에 싸여 죽을 지경입니다>라고 고백하기도 하고 ,그가 이 지상에 오기 전에 이미 예정된 그 죽음 앞에서 <할 수만 있다면><이 (죽음 의) 잔이 저를 비켜가게 하소서> (살려 주소서)라고 하면서 고통스러 워 하다가, 끝내는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절망해 버리고 만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예수 자신이 부활도, 메시아 로서의 역할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 런 생각들은 성경을 읽을 때마다 하게 되는 것이다. 초점에서 약간 벗어나지만, 죽음 앞에서 예수가 보인 모습은, 인류 역사상에서 보통 수준을 넘어선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념이나 사상 또 는 신의등의 이유로 죽게 되었을 때 보여주는 그 떳떳한 모습과 비교가 된다. 우리들 가까이에서 예를 들면, 사육신의 한사람인 성삼문, 또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죽어간 안중근의사, 사상운동과 민주화운동 을 하다가 죽어간 수 많은 사람들, 그들은 죽은 뒤 부활이나 천당에 서의 영생과 같은 약속이 없었는 데도 예수가 당한 것보다 훨씬 더 큰 고통과 고문을 견디면서 떳떳히 죽음 앞에 섰다. 불교인들에게는 예수의 죽음은 거의 아무런 감동도 주지 않는다. 감히 말한다면 오히려 평범하고 유치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그 피흘림을 기독교인들은 인류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일같이 생각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죽음은 예수 자신의 자의에 의한 것이 아 니라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했던 타의에 의한 것같이 보인다. 예수가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피하고 싶었다 하더라도 신의 뜻을 거역하고 자 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할 수 있었겠는가. 아마도 그와 같은 일은 어 림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예수의 죽음은 신의 뜻이었지 예수 자신의 뜻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타의에 의한 죽음이 그렇게 위대한 죽음일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인류사에 있어서 그 정도의 죽음은 흔해빠진 것 이었다. 예수의 존재는 신의 <인류구원>이라는 시나리오에 출연한 <배우> , 또는 그의 <심부름꾼>에 불과했던 것같이 보인다. 거의 모든 중요한 사건에 대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이루어졌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 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배우>, 또는 <심부름꾼>에 불과 했다면 예수의 위대성은 어디에 있는가. 배우로서, 또는 심부름꾼으로 서는, 아무리 자신의 역할과 임무를 잘 수행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연기자 또는 심부름꾼으로서 만의 공로뿐일 것이다. 아니면 예수의 위 대성이 그의 가르침의 내용에 있다는 것인가, 짧은 기간의 그의 활동 에 있다는 것인가.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서 <구원>에 대한 것이 핵심 이라고 한다면,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불교인들에게는 신을 통한 구 원의 가르침이란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위대성을 그가 행한 활동에서 보아야 한다면, 예수가 인류역사상의 위대한 종 교인들 가운데서 어느 누구보다도 특출한 종교적인 활동을 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상의 여러 관점에서 예수를 보았을 때, 불교인들에게는 예수의 모 습이 인류 역사상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처럼 나타나지를 않는다. 그렇 기는커녕, 그에게서 거의 아무것도 특별한 것을 볼 수가 없다. 예수 는 순수한 인간이 아니라, 우주를 만든 창조주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지상에 파견한 구세주라는 말은 불교인들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은 재언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교인들에게 무엇 보다도 불가사이하게 보이는 것은, 어떻게 해서 기독교인들은 성경속 의 그 불투명한 예수라는 인물과, 그리고 그와 관련된 그와 같은 <황 당한> 사건들을 가지고 그렇게도 확고부동한 구세주의 상을 세울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