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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은 자신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시물ID : readers_2293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문장수집가
추천 : 10
조회수 : 532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5/11/29 12:5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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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영은 자신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흔하디흔한, 아무런 의미도 감동도 없는 이름이었다. ‘나는 알지도 못한 채 태어나 날 만났고, 내가 짓지도 않은 이 이름으로 불렸네.’ 지영은 며칠 째 같은 노랫말을 흥얼거렸다. 한 번 꽂히면다른 노래가 귀에 들어올 때까지 한 곡만 씹어 듣는 게 지영의 오랜 습관이었다. 같은 노래라도 시간과 장소, 심지어 어떤 구멍에서 나오는지에 따라 다르게 들린다. 이어폰을 끼고 발목까지 쌓인 낙엽을 헤치며 걸을 때는 , , , 쿵딱하는 박자에 발을 맞추는 게 꽤나 유쾌했다. 온기는 없어도 여전히 눈부신 겨울 햇빛이 널 다그쳐 살아가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하지만 가위에 눌리다 겨우 잠에서 깬 새벽 네 시에는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노래가 너무 아프다. 나는 알지도 못한 채 이렇게 태어났고 태어난 지도 모르게 그렇게 잊혀지겠지’에서 목이 메기 시작하더니 존재하는 게 허무해 울어도 지나면 그뿐이라는 가사를 따라 부르다 울음이 터진다. 아이폰에서는 수백 번을 틀어도 똑같은 노래가 나오는데 지영의 입에서는 이 노래가 웃음이었다가, 다짐이었다가, 울음이 된다.


  어제 본 영화에서는 자신을 내치지 말아달라고 무릎 꿇은 부하에게 상사가 이렇게 말했다. “그러게 잘 좀 하지 그랬어. 아님 잘 태어나든가.” 그 말을 씹고 또 씹다 보니 피 맛이 났다. 생각해 보면 지영이 가진 것 중에 그가 원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피부색, 국적, 집안, 외모, 이름까지. 하물며 휴대전화 번호조차도 중학생 때 엄마가 만들어 준 그대로 10년을 썼다. 지영은 전화번호 하나라도 원하는 것을 가지고 싶어 대리점을 찾았다. 그러나 끝 번호 네 자리만 정할 수 있을 뿐 가운데 네 자리는 정해진 몇 개 중에 골라야 한다는 말에 지영은 직원의 가슴팍에 달린 이름표를 그의 눈앞에 들이밀며 당신은 당신 이름이 마음에 드느냐, 이제 이름도 바꿀 수 있는 세상인데 왜 전화번호 하나 내 마음대로 못 바꾼단 말이냐고 벌컥 화를 내고 말았다. 그는 거칠게 지영의 손을 떨쳐내며 자기는 연예인과 이름이 같아 좋다고 내뱉는다. 그래, 그나마 희철은 연예인 중에서도 흔한 이름은 아니구나


  이름에는 대개 부모의 욕심이 담긴다. 정작 본인들은 자기 이름값을 하고 사는지 돌아보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누워서 자다가 우유 먹고 똥 싸고 우는 것밖에 할 수 없는 갓난아이에게 멋대로 이름을 붙이는 것은 개목걸이에 이름을 쓰며 이 개는 내 개요.하는 것과 같다. 사이코패스에게 납치되어 죽을지 따돌림을 당하다 맞아 죽을지 수학여행을 가다 바다에 빠져 죽을지 알 수 없는 세상에서 이런 사람이 돼라며 일방적으로 임무를 부여하는 것은 악독한 폭력이다. 자기가 어떤 인간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들이 어떻게 감히 타인에게 멋대로 이름을 붙인다는 말인가. 검토되지 않은 삶은 가치가 없다고 했던가. 이름에도 자격 심사가 필요하다. 서른 살까지 치열하게 자기를 탐색하여 흔들리지 않을 정체성을 세운 사람들만이 자신이 원하는 이름을 달고 살 자격이 있다. 그렇게 스스로 부여하고 세상에 허락받은 이름을 가진 사람에게만 자식을 낳을 권리를 주는 것이다. 역사에 길이 남을 영웅은 못 되더라도 최소한 자기 자신과 자식에게는 떳떳해야 하지 않겠는가.


  요즘 들어 살아도 의미가 없고 죽어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지영은 죽기 전에 이름이나 바꿀까 생각한다. 의미가 없다는 뜻으로 무의? 흔적도 없다는 뜻으로 무흔? 그림자도 없다는 뜻으로 무영? 죄다 무슨 무협소설 주인공이나 스님 이름 같다. '결국 나는 스스로 붙일 이름조차 없으면서 내가 짓지도 않은 이름으로 살고 있구나. 죽어서조차 내가 짓지 않은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더욱 싫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어떤 이름으로 기억되든 그것조차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이래저래 마음에 안 들지만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지영이었다.


* 본문에 인용된 노래 가사는 이소라 7, <Track 9> 의 가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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