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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이야기 5.5 선생님 가족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게시물ID : readers_2294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원칙과정의
추천 : 15
조회수 : 1327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5/11/30 09: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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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평균 수명이 늘어나고 노인 인구의 증가 속도도 점점 빨라지는 요즘, 응급실에도 노인 환자가 많습니다. 그만큼 응급실에서의 암환자 치료건수도 날로 많아져, 서울의 큰 대학병원 응급실은 마치 암환자의 대기 병상처럼 운영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대학병원에서 치료받던 암환자는 다른 병원에서 치료받기가 어려워 상태가 나빠지면 해당 대학병원 응급실로 이송됩니다. 그러면 응급실에서 응급처치 후 입원을 해야 하는데, 병실과 중환자실이 모자라 응급실에서 수일간 입원 대기를 해야 합니다. 그럼 뒤이어 들어오는 환자들은 더 오랜 기간 입원이 지연되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입원도 입원이지만 갑자기 상태가 나빠진 암환자의 치료를 어디까지 해야 할 것인가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기대 여명이 짧은 말기 암환자에게 고통을 배가 시키는 중환자 치료를 모두 다 시행할 것인지, 아니면 가족들은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인간적인 모습의 마지막 준비를 위해 가족들이 배려를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있습니다.


급한 소식을 듣고 달려 온 보호자들은 다급한 마음에 또는 죄책감과 불안함에 살려만 달라고, 무조건 모든 치료를 진행해 달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로는 반대로, 환자의 오랜 투병 생활에 지친 보호자들이 의식 없는 환자를 빨리 편하게 보내 달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두 경우 모두 진정으로 환자의 의사를 존중한, 환자를 위하는 선택이 아니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침상 한 자리가 어느 때보다 간절한 경우가 있습니다


새벽에 갑자기 호흡곤란이 심해져 응급실을 찾아온 60대 여자 환자분이 있었습니다. 환자분은 의식은 있었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호흡이 힘에 겨워 헐떡대고 있었습니다. 보호자분들 말로는, 환자는 말기 담낭암 환자인데 어제까지 상태가 괜찮다가 갑자기 밤늦은 시각 호흡곤란을 호소했다고 했습니다.


혈압과 의식은 유지되고 있었지만 호흡 속도와 혈색을 보아서는 여타 환자였다면 바로 기관 삽관을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말기 암환자라는 말을 듣고 나서 우리 의료진은 치료를 위한 고민과 동시에 환자의 적극적인 치료에 대한 의지 여부와 그 결정에 대한 존중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환자 상태가 나빠 바로 기관 삽관을 통해 인공호흡을 하기로 결정했는데 보호자가 환자는 연명치료는 원치 않는 상태였다고 하면 그때 가서 다시 환자의 삽관 튜브를 뺄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이 연출되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이 환자분은 의식이 있어 산소를 최대한으로 투여하면서 보호자분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말기 암이라는 얘기를 들으셨으면
이 정도 상태라면 결정을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환자가 평소에 연명치료나 인공호흡기 치료,
심폐소생술을 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하신 적이 있나요?


같이 오신 보호자들은 아직 그런 결정을 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럼 기관 삽관을 하게 되면 인공호흡기 치료를 해야 되고
중환자실에서 치료받아야 하는데,

상태가 암 때문에 나빠진 것이라면 연명 기간 동안
인공호흡기를 떼지 못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겠습니다.


자세한 설명을 시작하자 보호자들이 동요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태가 나쁘지 않다가 갑자기 호흡곤란이 발생해 응급실에 왔는데 이런 결정까지 해야 한다고 하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말기 암환자의 치료를 맡은 주치의는 보통 이런 결정들에 대해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설명하고 그 결정을 존중하기 위해 문서화해 두도록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결정에 참여하지 않은 보호자의 경우 상황을 모르는 경우도 있고, 상태가 나쁘지 않아 아직 그 결정을 하지 않은 경우도 있더군요.


심폐소생술 거부의사, DNR (Do Not Resuscitation)



환자분은 몇 달 전 폐렴을 앓았었고 최근에는 다리가 붓고 움직이면 숨이 찬 적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되니 호흡곤란의 원인이 폐렴의 악화인지 심장이 부어 제대로 기능을 못하는 심부전인지, 또는 암과 관련되어 폐에 물이 차 역할을 못하는 폐부종인지, 폐동맥이 작은 암덩이에 의해 막히는 색전증인지 감별이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동식 흉부 X-ray 촬영 결과도 폐 염증 소견과 동시에 기관지 부종 소견이 함께 있어 감별이 더더욱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가족들과 상의 결과 일단 적극적인 치료를 우선 시행해 보기로 하고 기관 삽관을 진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기관 삽관을 위해 수면유도제를 투여한 뒤엔 지속적으로 환자를 진정시키기 때문에 마지막 인사를 할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저는 삽관을 준비하는 짧은 시간 동안 환자분과 보호자분들이 잠깐 대화할 시간을 주기로 했습니다. 따님은 울면서 말했습니다, 인사하지 않겠다고. 다 나아서 목에서 관 빼면 그때 인사할 거라며 울고 있었습니다. 다른 가족들은 차분히 환자분께 힘을 내라며 손을 잡아 주는 것으로 인사를 마쳤습니다.


수면유도제가 들어가자 환자의 의식은 곧 없어졌고, 기관 삽관을 마친 후 인공호흡기를 연결하자 서서히 산소 수치는 좋아졌습니다. 그 사이 나온 혈액검사 결과는 염증 수치 상승과 함께 폐동맥 색전증에서 올라가는 수치가 높게 확인되었습니다. 암은 색전증의 위험인자로, 색전증이 맞다면 급히 혈전 용해제나 수술적 제거술을 고려해야 하는 상황, 급히 흉부 전산화 단층촬영 검사(chest enhanced CT scan)를 시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긴박한 여건에서 CT를 촬영하기 위해 준비하던 중 환자의 혈압이 갑자기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120을 유지하던 수축기 혈압이 90 이하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맥박은 120, 환자는 쇼크 상태로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태로는 CT를 촬영하는 그 10여 분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심정지가 올 수 있어 대단히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설상가상 암투병으로 인해 환자의 말초혈관이 모두 수축해 있어 수액치료도 원활하지 못했습니다. 일단 심장에 가까운 굵은 혈관인 중심정맥을 잡고 강심제를 써서 혈압부터 안정화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암 환자의 경우 기관삽관을 하기 전, 고려해야 할 사항이 많습니다


다행히 중심정맥을 통해 강심제를 사용한 후 서서히 혈압이 안정되었습니다. 이후 촬영한 CT 소견으로는 폐렴에 의한 심한 흉수가 확인되었고 폐동맥 색전증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항생제를 사용하며 인공호흡기 치료를 하고 중환자실에서 지켜봐야 하는 상황. 보호자의 감사 인사를 들으며 환자를 중환자실로 옮길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환자의 호흡곤란 원인이 치료 가능한 부분인 폐렴이기에 망정이지, 암의 경과 악화에 의한 호흡곤란이었다면, 보호자분들로부터 고맙다는 말씀을 들을 수 있었을까요? 또한 입원 경과 중 인공호흡기를 떼지 못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때에도 보호자분들이 의사를 고마워할 수 있을까요?




현재까지는 의료기관 간에 실시간으로 의료기록이 공유되는 시스템이 없습니다. 그렇다 보니 환자가 암환자라 하더라도 평소에 어떤 상태였는지, 치료 중이었는지 치료 포기 상태였는지, 연명치료 거부 의사를 밝힌 적이 있는지 여부를 타 병원 응급실 의료진 입장에서는 알 수 없습니다. 응급상황에 같이 오신 보호자의 진술에만 의존해서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이죠.


평소 연명치료는 거부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말기 환자의 경우라도 갑자기 환자의 상태가 나빠져 응급실을 찾은 상황에서는 의료진의 설명이 이해가 어렵고 받아들이기 힘들 수 있습니다. 가족의 입장이라면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릅니다. 이 갑작스런 상태가 치료를 잘 해서 잠시 위기만 넘기면 더 오래 곁에 있을 수 있는 상태인지 아니면 오랜 기간 고통만 가중시키는 결정이 될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아니, 의료진도 신이 아니기에 정확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 배운 바와 경험에 비추어 앞으로의 경과를 예측할 뿐입니다. 이럴 때 한 보호자는 제게 이렇게 물어 왔습니다.


선생님 가족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보호자로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의료진에게 결정에 대한 책임을 지우지 않고 속에 담은 의견을 물어보기 가장 적절한 질문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우리 응급실 의료진들은 이런 얘기를 합니다. 생을 정리할 때가 되거나 치료가 불가능한 병에 걸리면 DNR (Do Not Resuscitation, 심폐소생술 거부의사)부터 챙길 거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시행하고 있는 중환자 치료에 있어 한 가지 중요한 의무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보호자로서 환자에게 존중해 줘야 할 한 가지 중요한 권리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이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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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brunch.co.kr/@csj3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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