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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동아야, 도둑 제 발 저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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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 26
조회수 : 1511회
댓글수 : 1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04/01/22 05:32:14
원본글 작성시간 : 2004/01/19 19:16:15

조선·동아야, 도둑 제 발 저리냐 조선·동아야, 니들은 독립운동도 불법이라고 했었지

-史랑

조선·동아야, 도둑 제 발 저리냐?
[기자의 눈]이종훈 /장관님의 '불법 모금' / 8일부터 민족문제연구소와 한 인터넷 매체가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위해 벌이고 있는 모금운동이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불법행위로 드러났으나 소관 부처인 행정자치부 장관이 오히려 이를 두둔하고 있어 빈축을 사고 있다. 행자부 재정과는 15일 오후 6시반경 민족문제연구소에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불특정 다수인에게 성금을 모금하는 것은 위법이므로 즉시 모금을 중단하고 법 절차를 따라 달라”는 장관 명의의 공문을 보냈다. 기부금품모집규제법에 따르면 기부금 모집은 행자부와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허가를 받아야 가능하다. 이 모금운동은 이 절차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행자부의 요청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주최측과 일부 네티즌이 반발하자 행자부는 2시간 만에 “모금 중단 요구를 철회한다”는 공문을 다시 주최측에 보냈다. 다시 보낸 공문에는 ‘실무진이 잘못 판단했다’는 해명도 들어 있었다. 행자부 고위 관계자는 “실무진이 법리적 해석에만 얽매여 잘못 판단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법리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장관의 질책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후문이다. 허성관(許成寬) 행자부 장관은 “모금운동을 중단시키지 말고 법적 근거를 갖게끔 사후 절차를 밟게 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행자부는 당초 이 불법 모금운동을 일주일이나 모른 척하고 있다가 일부 시민단체가 “우리도 정부의 허가 없이 모금운동을 하겠다”고 항의하자 부랴부랴 공문을 보냈다. 뒤늦게 공문을 철회하면서 행자부가 군색하게 이 모금운동의 순수성과 자발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는 ‘취지만 좋으면 법을 어겨도 된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허 장관의 태도는 더 큰 문제다. 허 장관은 한 인터넷 매체에 “나도 10만원을 냈다. 모금의 순수한 뜻을 감안해 사후 신청해도 허가해 주겠다”고 말했다. 장관은 법에 따라 국정을 책임지는 각료라는 점을 감안하면 허 장관은 “이번 모금운동은 어쨌든 불법이니 일단 중단하고 법적 절차를 밟은 뒤 다시 시작하라”고 말했어야 한다. 이종훈 사회1부 기자 그러나 친일언론이라는 논란에 휩싸였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사뭇 다른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동아일보는 17일자 초판에서 '장관님의 불법모금' 제하 기자칼럼을 통해 모금운동의 불법성을 지적하면서 행자부가 이를 방치했고, 허성관 행자부 장관을 비판해 네티즌들의 질타를 받았다. <동아>는 배달판에서는 관련 칼럼을 뺐다. 조선일보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지금까지 이와 관련해 단 한 건의 기사도 싣지 않고 있다. 조선일보에 2004년 1월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네티즌 파워'는 없다. '민족정기 되살리기'는 없다.
<친일인명사전>편찬을 위한 모금 운동의 모금액이 5억을 육박하고 있는 가운데 이에 대한 언론들의 관심이 커지고 있지만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위에 보도된 것처럼 외면을 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뭘까요? 한마디로 도둑이 제발 저린 겁니다. 동아일보 기자의 글에는 한마디만 해 주겠습니다. 독립 자금을 모으다가 발각된 독립군들을 처벌하며 일제 앞잡이들이 이렇게 얘기하였을 것입니다.“이번 모금운동은 어쨌든 불법이니 일단 중단하고 법적 절차를 밟은 뒤 다시 시작하라” 다음은 이번 모금운동의 당사자이며 친일파 추적과 <친일인명사전>편찬에 앞장서온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제공하는 방응모, 김성수의 친일 행적입니다. ■ 방응모 (方應謨) 1883~l950 1937년 [조선문예회]참가 1938년 [조선명사 59인 각도 순회강연] 참가 1939년 배영 궐기 대회 황군 만세 선창 1940년 [국민총력 조선 연맹] 참사 1941년 [조선임전 보국단] 이사 1941년 [임전 대책 협의회] 위원 1941년 [채권 가두 유격대 참가] 일제의 전쟁 채권을 강매 친일 잡지인 [조광]의 발행인으로 활동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중역 ■ 김성수 (金性洙) 1891~1955 1910 일본 와세다 대학 입학 1914 정경학부 졸업 1915 중앙학교 인수 , 경성직뉴주식회사 인수 1920 동아일보 창간 1922 동아일보 통한 물산장려운동 1923 민립대학설립운동 1932 보성전문학교 인수 및 교장취임 1938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인 및 이사로 참석 1939 협화회의 재경성유지간담회에 참석·발언 1941 흥아 보국단의 결성에 준비위원으로 참여, 임전보국단 감사 1945 미군정 수석고문에 피선 1946 한국민주당 수석 총무,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 고려대학교 설립 1947 신탁통치 반대투쟁위원회 부위원장에 피선 1949 민주국민당 최고위원 1955 야당인 민주국민당 고문으로 활약하다가 병사함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사장들이었던 이들이 친일반민족행위에 앞장서고 일제의 침략 전쟁에 참여하였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이들의 친일 내용이 <친일인명사전>에 실릴 것이 100% 확실합니다. 지금까지 자신들은 친일을 한 적이 없으며 민족 신문이었다고 강변해왔던 것이 모두 거짓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이들은 애써 외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방응모의 주요 친일 글들입니다.
"황국 일본이 명치유신 이후 일청(日淸), 일로(日露)의 양 전역을 지나 오늘 만주사변과 지나사변을 겪는 동안 우리의 발길은 대륙에 힘차게 드듸서게 되었으니 여기 일본의 뻐더가는 생장(生長) 발전의 힘찬 거름을 볼 수 있거니와 이제 2천 6백년 2월 11일 기원을 당하와는 천황, 황후 양 폐하와 성수무강(聖壽無彊) 하옵심을 삼가 비옵고 천태자 전하, 의궁친왕(義宮親王) 전하, 조궁(照宮), 효궁(孝宮), 순궁(順宮), 청궁(淸宮) 4내친왕(內親王) 전하의 어강녕(御康寧)을 빌어 마지 안는다…… 이 전국적 제전에 임하여 오인(吾人)은 국운의 창성과 황군장병의 무운장구를 삼가 기원하여 마지않는 바이다(조광 1940. 3월호 <봉축 2천6백년의 기원절(紀元節)>)" "밖으로는 혁신 외교 정책을 강행하여 하루바삐 동아신질서 건설을 완성시켜서 세계의 신질서를 건설하고 한 걸음 나아가서 세계 영구평화를 기도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국민은 모름지기 이선에 따라 행동하고 생활하고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조광 1940. 11월호)" "우리에게는 사태가 악화되면 악화되는 데 따라 거기에 상응한 준비가 있다. 이로써 어떠한 방해가 온다한들 조금도 괘념할 필요가 없다. 더구나 제국의 운명을 도(睹)하고 있는 이 성업(聖業)에 있어 어찌 한 걸음인들 후퇴할 것인가. 다만 우리의 물심양방면(物心兩方面)으로부터의 총력전 준비에 있다. (조광 1941.7월호)"
다음은 김성수의 주요 친일 글들입니다.
"작년 5월 8일 돌연히 발표된 조선의 징병령 실시의 쾌보는 실로 반도 2천 5백만 동포의 일대 감격이며 일대 영광이라. 당시 전역을 통하여 선풍같이 일어나는 환희야말로 무엇에 비유할 바가 없었으며 오등(吾等) 반도 청년을 상대로 교육에 종사하는 자로서는 특히 일단의 감회가 심절(心切)하였던 바이다....그런데 이 징병제 실시로 인하야 우리가 이제야 명실상부한 황국신민의 자격을 얻게 된 것은 일방으로 전 반도 청년의 영예인 동시에 반천년 (半千年) 문약의 분위기 중에서 신음하던 모든 병근(病根)을 일거에 쾌치(快治)하고 거일(去日) 신생(新生)할 제2의 양질(良質)을 얻은 것이다. 어찌 반갑지 아니하며 어찌 감격치 아니하리요. 하고(何故) 오하면 문약의 고질을 치료함에는 오직 상무의 기풍을 조장함이 유일무이의 양약인 까닭이라.(매일신보 1943.8.5 논설 '문약(文弱)의 기질을 버리고 상무(尙武)의 정신을 찬양하라' 중에서" "대동아 건설은 제군의 사소한 존재를 돌아볼 사이도 없이 매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매진 앞에 제군이 천재일우의 호기를 잃어버리고 그로 말미암아 반도가 이에 뒤떨어질 때 우리는 대동아 건설의 일분자는 그만두고 황민으로서 훌륭히 제국의 일분자도 될 수 없을 것이다. … 우리는 단시일일지라도 위대한 의무를 수행함으로써 내지인이 오랫동안 바쳐온 희생에 필적할 임무를 수행할 수 없을까. 이 임무를 수행할 절호의 기회가 지금 이 순간에 우리 앞에 열려진 것이다. 제군의 희생은 결코 가치 없는 희생이 안 될 것을 나는 확언한다. 제군이 생을 받은 이 반도를 위하여 희생됨으로써 이 반도는 황국으로서의 자격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반도의 장래는 오직 제군의 거취에 달려 있다고 할 것이다.(매일신보 1943.11.7 '학도여 성전(聖戰)에 나서라' 중에서)"
위의 글들을 읽어보니 어떠세요? 이들이 얼마나 일제를 찬양하고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까지 같은 동포들을, 심지어는 자신의 제자들까지 전쟁터로 내몰았는지 명백히 아시겠지요? 지금까지 계속되는 조선과 동아의 변명과 진실 가리기는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리는 것과 똑같은 어리석음일 뿐입니다. 다음은 백범 김구 선생의 지시로 작성된 희산(希山) 김승학(金承學) 선생의 육필원고의 일부분으로서,‘반민족특별재판소재판관·검찰관’이라는 소제목이 붙은 사료의 뒷장의 '친일파 군상'이라는 중간제목 아래부터 적혀 있는 내용입니다. (2001.8, 월간중앙에서 발췌함) ※ 친일파 명단에 기록된 숫자는 임시 정부측의 판단으로 짐작됨. 정계, 관계, 실업계 인물(43명) 1. 이성환(李晟煥) 15 임전보국단 간부, 국민동원총진회 이사장 2. 이승우(李升雨) 15 전 경성부회 의원, 전 국민총동원 이사 3. 윤치호(尹致昊) 13 1945년 12월 사망 4. 김연수(金秊洙) 8 경성방직 사장, 전 만주국 명예총영사 5. 고원훈(高元勳) 10 중추원 참의, 전 도지사 6. 신태악(辛泰嶽) 5 변호사 7. 조병상(曺秉相) 10 종로경방단장 8. 여운홍(呂運弘) 2 친일논문 발표, 시국 강연 9. 인정식(印貞植) 3 사회주의에서 전향후 국민문학 등에 친일논문 발표 10.박희도(朴熙道) 1 전 동양지광 사장 11.이각종(李覺鐘) 1 전 총독부 촉탁, 국민정신총동원 연맹 상무이사 12.김한경(金漢卿) 1 동양지광 등에 친일논문 게재 13.김시권(金詩權) 3 전 도지사 14.박인덕(朴仁德) 9 전 청화여숙장 15.이정섭(李晶燮) 1 조선 임전보국단 의원 16.김사연(金思演) 3 중추원 참의, 전 도지사 17.문명기(文明琦) 1 전 조선신문 사장 18.한상룡(韓相龍) 10 전 중추원 고문, 전 관동군 최고 고문, 조선총력연맹 사무국장 19.정교원(鄭僑源) 3 전 도지사 20.차재정(車載貞) 2 전 대동민우회 간부 21.이성근(李聖根) 6 전 중남지사. 전매신(每新) 사장 22.박흥식(朴興植) 7 조선비행기공업회사 사장 23.박춘금(朴春琴) 2 민족학살 도모한 대의당 당수 24.안인식(安寅植) 2 총력연맹 참사 25.한규복(韓圭復) 3 중추원 참의, 충북지사 26.이종린(李鍾麟) 9 천도교 요인 27.최 린(崔 麟) 8 천도교 요인. 중추원 참의 28.최남선(崔南善) 4 사학자 29.박윤진(朴允進) 1 친일 시국 강연 30.이돈화(李敦化) 3 천도교인 31.장덕수(張德秀) 7 전 보성전문 교수 32.방응모(方應謨) 2 조선일보 사장 33.김석원(金錫源) 1 일본 육군 소좌 34.김동원(金東元) 5 평양상공회의소 회주 35.박정형(朴正衡) 2 가(假), 경무국 경찰(현재 세도 부림) 36.정방오(鄭方五) 1 가(假), 전 일제 헌병대(현재 세도 부림) 37.김신석(金信錫) 1 은행가 38.손영목(孫永穆) 8 강원,전북 지사. 국민동원총진회 이사 39.고일청(高一淸) 1 임전보국단 간부 40.차재명(車載明) 3 황국신민의 십자군 간부 41.문덕상(文德常) 3 황국신민의 십자군 간부 42.박상준(朴相駿) 5 귀족원 의원 43.김오성(金午星) 1 공산주의에서 전향후 월북 일제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발행하도록 허가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일제가 발행하는 신문으로 일제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천황폐하 만세를 백날 떠들어봐야 조선인들은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선인들이 발행한 신문으로 조선인들 스스로 독립 운동을 비판하고, 일제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게 하려는 교활한 술책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일제의 간악한 의도와 술책대로 친일 신문의 역할을 하며 우리 민족을 이간, 분열시키고, 일제에게 우리 민족을 팔아먹었던 것입니다. 왜 유종필, 추미애, 조순형, 김경재, 김영환이 노무현 대통령 비판에 앞장서고 있을까요? 일제가 조선, 동아를 발행하도록 한 이유와 같습니다. 노무현을 지지했던 정치인들이 노무현을 비판하게 하여 노무현 지지자들을 분열시키려는 목적입니다. 왜 브레이크뉴스를 인용하여 조선, 동아가 서프라이즈를 공격할까요? 브레이크가 옛 노무현 지지 네티즌들이 만든 반노무현 사이트이기 때문입니다. 개혁 세력으로 개혁 세력을 분열시키겠다는 것이죠. 브레이크는 조선, 동아에게 칭찬 받으니까 이 기회에 이름 알려지니까 좋을 겁니다. 또 모르죠. 노무현 대통령이 개혁에 성공하면 자신들은 반노무현 세력이 아니었다고 강변할지도. 자신들이 비판하여 개혁에 성공하도록 도움을 준 것이라고. 이런 사람이 또 있죠. 드디어 민주당 복귀에 성공한 김민석. 후보 단일화를 위해 정몽준을 지지했었다고 하면서 배신이 아니라고 강변하죠. 마지막으로 한가지 예만 더 들겠습니다. 이름쟁이는 남프, 동프, 브레이크에서 왜 더 인기가 있고 칭찬을 받는지 잘 알 것입니다. 노무현 킹메이커가 노무현을 비판하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제 제발 자신은 충신이고, 서프는 간신이란 강변은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조선, 동아가 친구하자고 할지도 모르니까. 다음 글은 제가 예전에 썼었던 역사 패러디입니다. 재미로 보세요. 옛 이야기 : 역사 발굴 - 말깔족을 아시나요? 남북국시대 북쪽 발해에는 말갈족이 있었다. 그러나 남쪽 신라에는 말깔족이 있었다. 말깔족은 이름 그대로 말로 까는 족속으로 크게 보아서 좃족, 쭝족, 똥족의 족당들이 모인 족속이었다. 원래 왜구 출신으로 더러운 입에서 시끄러운 소리만 나오는 이 꼴통들이 귀찮아 왜구들도 노략질하러 왔다가 이 꼴통들을 버리고 도망가 신라에 남아서 말깔족이 되었다. 이 말깔족은 그래도 왜놈 출신이라고 자기들을 버린 것도 잊은 채 왜놈 욕하는 척 하면서 왜놈들을 위해 신라 사람들을 속이고,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돌아다녔다. 말깔족들은 하는 말마다 쪽발이 말 비슷하게 하면서 자기들은 토종이라고 매일 우겼다. 그렇다면 말깔족들의 특징을 살펴보자. 첫째, 하는 말마다 거짓말이거나 유언비어였다. 알아듣기 힘든 말로 주접을 떨면서 얘기하지만 들을 가치도 없는 말들이었다. 주로 하는 주접은 빨갱이, 퍼주기, 용공, 좌경, 언론 탄압, 개혁 피로 등이었다. 둘째, 애국, 애족을 밥먹듯이 얘기하면서 사실은 나라 팔아먹고, 민족을 속이는 말만 했다. 천민들이라 군대도 안 간 족속들이 당나라의 서역 공격에 특전 화랑을 보내야 하네 어쩌네 하면서 당나라에 아부 떨 생각만 하였다. 백성들은 우리도 왜구들처럼 말깔족들이나 파병하자고 주장하였다. 셋째, 발해와 통일해야 한다고 말로만 하면서 남북국을 이간질시키고, 발해 백성들 굶겨 죽이라고 선동하고, 전쟁분위기로 몰고 가며, 매일 <퍼주기>라고 욕했다. 넷째, 나당 전쟁 때 당나라군의 앞잡이가 되어 당나라 만세를 외치고 다니더니 전쟁 끝난 후에도 친당파 척결이 안되어 정신 못 차리고 또 당시 강대국이었던 거란 만세, 일본 만세를 계속 떠들어댔다. 다섯째, 당시 왕이었던 대중왕이 지들이 밤의 왕이네 하면서 다음 왕을 누굴 뽑을까 오만과 거만을 떨며 깐죽거리던 말깔족 족장들을 감옥에 가두고, 그 동안 더러운 천민이라고 세금을 안 내던 말깔족들도 양인으로 만들어 세금을 내게 하라고 했다. 그랬더니 자기들은 원래 더러운 입에 더러운 소리만 하는 더러운 천민으로 남겠다고 하며 세금을 안 내겠다고 뗑깡을 부렸다. 결국 발해와 신라가 통일을 하지 못하고 발해가 거란에게 멸망하여 만주를 우리 역사의 무대에서 잃어버리게 된 역사의 원흉은 바로 말깔족이었다. 역사는 되돌릴 수 없는 것. 그러나 되풀이되는 실수는 막을 수 있다. 지금도 말깔족 비슷한 족속이 있는데 어떻게 해야 남북이 통일하고, 민족이 잘 살 수 있을지 알 수 있다. http://www.seopris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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