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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1> 김홍도, <씨름>,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도2> 김홍도, <서당>,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가령 <씨름>의 경우 왼쪽 아래 동그라미 쳐진 부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손의 위치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묘사상의 오류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인데 이런 오류는 풍속도첩 전반에서 심심찮게 보이는 실수 중 하나입니다. 또한 유명한 풍속화 중 하나인 <서당>에서도 왼쪽 상단 동그라미 쳐진 부분의 인물 묘사가 어색함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어깨뽕을 넣은듯 부자연스럽게 붙어있는 팔의 모양새는 비단 서당에만 한정된 오류는 아닙니다. 사실 문제의 핵심은 이런 오류가 비단 위 두 작품의 문제가 아닌 <타작>이나 <담배썰기>와 같은 작품에서도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류에 관해서 학자들은 풍속도첩이 오랜 시기 동안 제작되었다는 점으로 설명하려 했습니다. 다시 말해 현장에서 즉석으로 스케치 한 것이 아닌 초기 구상 정도만 잡아놓고 이후에 시일을 들여 천천히 작품을 완성해 갔다는 것입니다. 또 작품 제작시기에 있어서도 조악한 필치를 통해 초기 화풍이라 보는 의견이 있는 반면 주제만 부각시키는 과감한 생략을 근거로 40대, 혹은 만년의 완숙한 화풍이라 주장하는 의견도 존재합니다. 이토록 갑론을박이 많았던 만큼 애초에 이 작품이 김홍도의 것이 아니라는 주장 또한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김홍도가 일반적으로 묘사에 있어서 실수가 별로 없었다는 점은 작품이 다른 사람의 것이라는 주장에 더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이 김홍도의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의 것일까요? 이 문제를 제기한 많은 학자들은 공통적으로 이 화첩이 다수의 사람에 의해서 그려진 작품이라고 추정합니다. 우선 몇몇 작품에서 덧대어 그린 흔적이 있고 종지의 재질 또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흔히 편집의 흔적으로 제기되는 이런 증거들은 이 작품에 대한 신뢰성에 대한 의심을 증폭시켰습니다. 심지어 이런 주장은 미술사적인 맥락에서도 꽤나 타당한데 진경시대 이후 화원화가들은 김득신, 김홍도의 풍속화를 교본으로 삼아 그림 공부를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풍속화첩은 김홍도의 일부 작품을 모작했거나 기존의 그림에 후대 사람들이 그림을 추가한 일종의 교과서와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위의 주장은 얼핏 보기에 반박할 수 없는 주장으로 보입니다. 우선 그림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형태 문제를 걸고 넘어졌고 그것을 뒷받침할 묘사상의 오류까지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오류는 단지 몇몇 작품에서 한정해 지적한 것이 아닌 화첩 전체에 걸쳐서 오류를 지적하고 이에 대한 묘사상의 실수를 증거로 언급했습니다. 실제로 제가 참고한 몇몇 논문에는 반대 논증이 상당히 정교해서 반박하기 어렵다고 쓰기까지 했습니다. 그만큼 형태 문제에 대한 반박은 쉽지 않은 문제였습니다. 또한 미술사를 둘러싼 논쟁의 향방을 보았을 때 시대정신도 어느정도는 여기에 웃어주는 듯 보입니다. 그간 민족의 전통이라 해서 객관적인 분석이 어려웠던 몇몇 작품들이 세계사적 차원에서 혹은 과학적 방법론의 차원에서 비교되었고 그 결과 기존의 해석들이 뒤집힌 사례들이 종종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재까지 논쟁의 향방을 보았을 때 풍속화첩은 김홍도의 그림인 것으로 가닥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물론 논란이 완전히 종식된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낸 결론은 "모든 작품"이 후대에 그려진 작품은 아니다라는 것이지 아직도 몇몇 작품들은 그 논란의 열기가 식기는 커녕 더 확산되고 있습니다. 풍속화첩을 김홍도의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들도 이점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들은 기계적인 작품 비교는 분석에 치명적인 오류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에는 작품을 하는 작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깔려 있습니다. 그 질문은 다름아닌 "작가가 평생 자신의 이력을 쌓아오면서 한번도 실수한적이 없겠는가?"라는 점입니다. 제 아무리 명작을 쏟아내는 거장이라 하더라도 묘사상의 실수는 종종 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런 인간적인 실수를 작품의 강점으로 내세운 화가들도 존재합니다. 특히 한국의 미술을 논할 때 소위 해학이 넘치는 그림이라는 것은 작품의 주제에서 드러나는 해학성 뿐만 아니라 묘사 자체에서 오는 해학을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김홍도의 풍속화가 그런 해학성의 정점을 보여준다 했을 때 그 의미는 이중의 뜻이 내포되어 있지 묘사에만 한정해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주된 논지입니다. 또한 덧대어 그린다는 점에 대해서도 단원이 필치가 다른 여러 종류의 붓을 썼다는 사실로 반박이 가능합니다. 결정적으로 작품을 볼 때 세세한 묘사를 따지기 보다 작품의 구도나 주제의 참신성을 주목하라고 합니다. 풍속화첩은 그가 자신의 풍속도를 집대성하고자 그렸기 때문에 여러 다양한 구도가 보이고 따라서 제3자가 보기에는 전혀 다른 화풍으로 읽힐수도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렇듯 서로 다른 화풍은 풍속화첩이 진작이 아니라는 증거로 사용되는 것이 아닌 오히려 단원이 다양한 구도 사용에 능속했다는 증거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실제 김홍도가 풍속화를 구상하는데 있어서 인물의 배치를 우선 순위로 두었는데 이것은 그가 배경을 과감히 생략하고 인물만 묘사한 것을 통해서도 드러납니다.
풍속화첩이 단원의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은 작품의 진위 여부를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비교의 오류에 빠지지 말것을 주문합니다. 즉, 풍속화첩과 단원의 다른 그림은 편집 의도나 제작 과정에서 큰 차이가 있기에 단순 1:1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풍속화첩의 경우 현장에서 사생한 그림이 아닌 철저히 계산에 의거해 인물을 배치한 일종의 상상화에 가깝기 때문에 인물 배치 과정에서 다소간의 오류가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도3> 김홍도, <장터길>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 공간감을 잡기위해 김홍도는 단 하나의 선만을 사용했습니다. 동양화가 보여주는 선의 미와 풍속성이 곁들여져 대가의 면모를 한껏 보여줍니다.
김홍도를 둘러싼 일련의 논쟁들은 그림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점을 시사해 줍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그림의 평가에 있어서 묘사력이라는 것이 과연 어느정도까지 적용되느냐에 대한 것입니다. 김홍도는 풍속화첩은 실제 분석의 단계로 들어가면 여러 묘사상의 오류가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런 오류에도 불구하고 여타 다른 요소들과 역사적 가치로 김홍도의 풍속화는 대작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예는 수 없이 많지만 그것이 조선 후기 최고의 화원화가로 불리는 김홍도를 바라보는 시선이기에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물론 이런 고민과는 별개로 그림에 대해서 학자들이 벌이는 논쟁은 미술사를 공부하는 학도들에게 좋은 질문거리이자 공부거리입니다. 쏟아져 나오는 논문에 경악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이런 양질의 논쟁을 학생시절 지켜본다는 것은 큰 축복이 아닐가 싶습니다 ^^ 끝으로 글을 마치면서 이 논쟁이 소모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한국미술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이해로 나아갔으면 하는 것이 개인적인 소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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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로 온 이후 두번째로 쓴 글입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재미있게 봐주셨으면 합니다.
부처님 오신날이기에 생각나는 그림이 있어 마지막에 첨부합니다
김홍도, <염불서승도>, 조선후기, 간송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