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광주시민여려분
게시물ID : sisa_23032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위장전입
추천 : 0/8
조회수 : 597회
댓글수 : 58개
등록시간 : 2012/09/25 22:52:08

- 1979.10.26(박통 저격사건)이후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지위가 됨으로써 격렬한 정치투쟁이 시작됨.

- 야당인 신민당의 김대중과 김영삼 사이에 당권경쟁이 치열해짐.

- 경제사정이 악화됨에 따라 정치 불안 격심해짐.

- 학생들의 계엄철폐를 요구와 거리투쟁 시작.

- 폭력시위를 일으킨 탄광노조에 의해 경찰관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

- 1980년4월16일, 김대중은 계엄포고령을 무시하고 서울에 운집한 학생들 앞에서 투쟁을 고무시키는 연설을 함.

- 5월15일, 서울의 학생시위로 또 한사람의 경찰관이 살해됨.

- 5월16일, 이화여대에서 학생 조직 대표들이 5월22일 기점의 전국규모의 시위 지지 결의.

- 5월17일, 최규하대통령은 계엄을 강화할 것을 명령, 대학에 휴교조치, 정치활동이 금지. 주요도시에 계엄군이 배치됨.

- 계엄군 배치계획에 따라, 광주에는 7공수 여단의 33 및 35대대가 북쪽(금마)에서 광주시내로 이동.

- 전국의 시위는 끝이 났지만, 광주에서는 폭동(riot)이 일어남.

- 5월18일, 전남대 앞에서 수백명의 학생의 투석으로 군과의 격돌을 야기시킴.

- 소요 첫날,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을 죽이러 왔다''40명이 죽었다''김대중씨가 처형됐다'

'군인들에게 밥을 굶기고 마약을 투여했다'는 등의 해괴한 뜬소문을 믿고 사람들이 시위에 동참했다.

- 5월19일, 쇠파이프로 무장한 시위자들은 경찰서와 방송국2개를 습격하고 재산을 파괴함.

- 5월20일, 폭도들(rioters)이 시청과 방송국에 불을 지름.

- 버스와 택시를 강제 징발하여 도로 위를 달림.

- 도청건물 앞에서 이들 차량중 하나가 경찰 저지선으로 돌진하여 4명의 경찰관을 숨지게 함.

- 5월21일, 폭도들이 예비군 무기고를 공격, 소총과 실탄 기타 무기들을 탈취함.

- 오전 9시경 자동차 공장이 습격을 받음. 장갑차를 포함한 수백 대의 차량이 탈취됨.

- 인접지역의 군경시설이 습격을 받아 수백정의 총기들이 탈취됨.

- 화약제조 업자들로부터 다량의 TNT도 탈취함.

- 폭도들이 건물 옥상에 기관총을 설치 해놓고 군인들을 향해 사격을 했다.

- 광주교도소를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이 장갑차와 소방차에 분승한 중무장한 폭도들로부터 공격을 받음.

- 5월21일, 오후 6시 군인들의 후퇴로 광주시는 완전히 반란군중(rebel)에 수중에 들어감.

- 5월22일, 광주지역 의사, 변호사, 언론인, 종교지도자들이 중재를 위한 사태수습시민위원회를 구성했다.

- 탈취된 무기는 소총 5,008정, 엽총395정, 실탄288,680발, 수류탄526발, 다이너마이트 3,000상자로 집계됨.

- 5월26일, 계엄군의 광주 시내 재진출 시도는 격렬하고 조직적인 시민군의 저항으로 실패함.

- 계엄군은 탈환작전을 개시하기 전에, 인명과 재산에 대한 피해 극소화를 위해

공중정찰과 정보 제보자들을 활용하는 등 반란 시민들의 본거지와 거점들을 하나하나 정확히 확인했다.

- 5월 27일, 새벽 1시 행동을 개시했다. 소부대단위로 병력으로 외과적 정밀 조준으로 목표에 타격을 가했다.

작전은 수 시간 이내에 완료되었고, 사살된 사람은 17명에 불과했다.

- 5월22일, 최규하대통령과 국무총리가 광주에 와서 질서회복을 호소.

- 광주시 전역에 무기반환을 호소를 하는 전단이 살포, 헬리콥터와 비행기 차량의 확성기로 호소문을 전파함.

- 계엄당국은 광주시민위원회에 협력했으며 시민위원회를 중간에 두고 폭도 대표들과 5회에 걸쳐 협상 시도.

- 신뢰회복을 위해 연행했던 시위자들을 여러 차례 풀어놓기도 했으나,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다.

- 5월27일, 시민위원회는 계엄사와 합동으로 철저한 시체 확인과 검시 작업에 들어갔다.

(민간의사, 군의관, 성직자, 변호사, 광주시민을 합하여 49인이 조사와 확인 작업에 참여)

- 시민위원회 위원장은 본 헤리티지 재단과 면접한 자리에서 사망자 시체 확인을 직접 했으며,

191명의 숫자는 정확한 것 이였다고 강조 함.

- 쌍방의 중무장한 무력 집단 간의 격돌이 초래한 필연적 결과였다.

- 광주교도소에서 죽은 50여명은 중무장한 폭도들이 광주교도소를 수차 강습, 공방전에서 사살된 것.

- 정부는 모든 사망자 가족에게 16,000달러 상당을 각각 지불하고, 모든 부상자들에게 치료비를 보상함.

- 기타 시민들에게도 비상식량과 연료비조로 200만 달러 상당이 지원됨.

- 파괴된 가옥과 영업소에 대해서는 수리와 복구를 위한 지원 예산이 집행됐다.

- 구속된 시민들은 2,522명, 이중 404명이 군법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사면조치로 모두 풀려났다.



- 광주사태는 한국정부가 죄 없는 전라도 도민을 학살할 의도와 목적아래 사전에 모의해서 만들어낸 사건이 아니며,미국이 개입된 사건도 아니다. 이 반란사태(insurrection)의 규모가 방대함을 생각한다면 사망자 수는 상대적으로 현저히 낮은 것이며, 이 사실은 한국정부가 인명피해를 극소화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했기 때문인 것으로 인정된다.

Daryl M. Plunk Policy Analyst

10 Ibid. 11 @_hin Dong-A Magazine, Seoul, Korea, July 1985.




85년도에 세계적인 우익 싱크탱크 헤리티지 재단이 한국에 조사단을 파견해 낱낱이 조사한 보고서.

당시까지만 해도(현재도) 518에 대해 수많은 카더라와 잘못된 사실관계가 판치는 상황에 비해 아주 잘 조사한 보고서.


훗날 검찰이 공개한 518 재수사 기록와도 거의 일치.



애초에 일방적으로 권력이 무고한 광주시민을 조지려는 의도가 있었고 수많은 인명피해가 그로 인해 생겼다는 식의 잘못된 사실을 잘 집어냄.


폭동이든 민주화 운동이든 쌍방의 무력충돌은 필연적 결과였다는 것.

저 사실만 해도 의미하는 바가 큼.

 

감정보다는 팩트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