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재벌규제’ 요구 왜? 경쟁 대기업 ‘발묶기’
[경향신문 2006-09-06 08:06]
미국의 ‘재벌규제’ 명문화 요구는 한국시장 침투를 위한 사전포석으로 해석된다. 미국 산업계와 의회가 미 협상대표단에 이의 관철을 강력히 요구했다는 점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한국 정부의 재벌관련 정책에 대한 불신이 깔려있다. 구두 약속만으로는 한국에서 국내 재벌과 외국 투자기업간 차별이나 불공정행위가 없을 것으로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미국이 이 카드를 들고 나온데 대해 우리 정부관계자와 전문가들의 해석은 분분하다. 일각에서는 미측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어가기 위해 내놓은 상징적 수준의 요구라는 해석이 있는가 하면 미국의 협상목표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협상에 참여중인 통상교섭본부 관계자는 “한국에선 FTA협상이 체결돼도 공정경쟁이 불가능해 투자가 쉽지 않다는 미국 기업들의 우려를 받아들여 미국이 상징적인 제안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공정거래법 적용대상은 재벌과 중소기업 모두 예외가 아니라는 건 미국도 잘 알고 있다”며 “정말 재벌규제를 원했다면 보다 강력한 대책을 들고 나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병천 강원대 교수는 “지금까지 경쟁분과에서 미국의 요구는 주로 공기업 민영화 부문에 집중돼왔는데 ‘재벌규제’ 카드를 들고 나왔다면 상황은 상당히 복잡해진다”고 우려감을 나타냈다.
실제로 양국이 그간 경쟁분과 논의를 통해 ‘양국이 독점·공기업을 설립 및 유지할 수 있다’는데 동의한 것으로 알려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재벌규제’ 카드가 불거졌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미국이 한국 시장 진출에 따른 과실을 따먹기 위한 선결조건으로 독점 공기업 대신 재벌과의 경쟁에서 주도권을 선점하는 쪽으로 방향을 튼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세계적 유통기업인 월마트나 까르푸가 한국형 할인매장 이마트의 벽을 넘지 못하고 국내시장에서 철수한 ‘뼈아픈’ 경험도 미국은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겉으로는 우리나라 재벌의 경쟁제한적 행위에 대한 미국의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지만 속내는 대한민국 시장을 장악하려는 노골적 의도가 숨어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동안 국내 시장의 재벌 규제 논의가 불공정경쟁 행위 근절보다 주로 기업지배구조 개선 등 의결권 행사 제한쪽에 초점이 맞춰져 재벌에 대해 엄격한 공정거래법 집행이 이뤄지지 못한데 대한 미국의 대응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이해영 한신대 교수는 “엄연히 공정거래법 적용대상에 재벌을 비롯, 모든 기업이 포함되는데 한국적 거래관행을 문제 삼아 재벌조항만 따로 명시하자는 주장은 법리적으로도 성립될 수 없다고 본다”고 지적했다.
〈시애틀/권재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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