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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편] 홀로 쓰는 비극
게시물ID : readers_2305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페레트리
추천 : 10
조회수 : 31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12/06 17:2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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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버스 창가에 바짝 앉아 기형도의 시집을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시집과 맨살 사이에는 기모가 들어간 바지가 놓여 있었지만 그래도 너무나 차가웠다. 우울한 마음 달랠 길이 없어 시집을 여러 권 빌렸지만 도통 읽을 시간이 나질 않았다. 아니, 사실은 고백하건대 시간은 핑계였다. 그런 식의 핑계는 최악이고 죄악이다.

더 이상 서있을 자리조차 없어 보이는 버스에 사람들이 꾸역꾸역 들어차고 있었다. 매일 하는 크로매틱처럼 지겨울 대로 지겨웠다. 혹시나 아는 얼굴이 있을까하고 버스 앞 시계를 보는 척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잠깐이나마 그녀를 보고 싶었다. 이미 시집의 차가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냉기를 내가 녹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과 동화(同化) 된 것이겠지.

버스가 출발하기 직전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미처 오르지 못한 그녀의 당혹스러움이었다. 오늘따라 햇빛이 강렬했다. 햇빛이 그녀를 감싸며 비추는 건지, 아니면 그녀가 태어날 때부터 본래 가진 빛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내 상상력이 만들어낸 빛이었는지는 모르게 되었다.

그래요. 이런 콩나물시루에 당신이 타서 온몸을 찡그릴 바에는 차라리 다음 버스를 타세요. 그래야 나하고 마주치지 않아서 당신 마음이 편할 테고, 앉아서 간다면 다리까지도 편할 테니까요. 그녀를 보고 싶었고 보았음에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나와 시집의 냉기도 녹지 않았다. 그런데도 미어캣처럼 먼 곳을 바라보는 이런 짓을 벌써 몇 년째 하고 있었다.

지하철에서 고개를 덜컹거리다가도 그녀가 타고 내리는 역에서만큼은 정신이 번쩍 하고 들었다. 아는 얼굴, 아니 그녀가 혹시나 탈까 하고 어디 역인지 보는 척을 줄곧 했다. 그녀가 타지 않으면 그거대로, 또 -그런 적은 딱 한 번 있었지만- 탄다면 그거대로 불안과 초조함의 연속이었다. 답답했다.

어김없이 나는 나 홀로 그녀를 먼저 보냈다. 저녁을 먹는다는 핑계였다. 내가 밥을 먹는 건지 내 마음을 먹는 건지 모른 채 식사를 마치고 나면 곧장 이어지는 담뱃불과 연기. 버스카드 만큼이나 지겨웠다. 대뜸 친구 놈이 말했다. 야, 너 요새 왜 그리 축 쳐져있어? 나는 모르겠다는 답변으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모르겠다는 말은 참 간편하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담배가 자기 몸을 다 태워갈 때 쯤, 나는 무슨 용기가 났는지 두 발자국 들어갔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있는 건 알지? 녀석은 관심 없다는 투로, 당연히 알지. 그거 때문이야? 하곤 담뱃불을 튕겼다. 나는 또다시 잘 모르겠다는 답변을 했다. 녀석의 반응은 당연했다. 뭐야 그게? 좋아한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녀석은 기형도의 주변 사람들처럼 날카롭진 못하구나.

내가 걔 혼자 좋아한지 되게 오래 됐잖아? 근데 이제는 걔 자체를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내가 만들어낸 이미지의 걔를 좋아하는 건지 헷갈려. 근데 딱 한 번쯤은 그런 말 하고 싶기는 해. ‘제가 당신을 좋아합니다.’ 가 아니라 ‘사실은 제가 당신을 좋아 했습니다.’ 라고. 그렇게라도 해야 시간이 지난 후에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는 뭐 그런 거. 아. 모르겠어. 모르겠다는 말이 버릇이 될 것 같았다.

가만히 듣던 녀석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잘 될 거야, 친하게 지내봐. 아직 시간 있잖아?
녀석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뻔한 얘기를 늘어놓았다.
김 박사가 따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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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오랜만에 책게에 글을 올리네요
이 글은 학교 문학회에서 썼던 글이고요. 소설을 가장한 수필.. 그러니까 제 경험입니다
이름을 바꿔야 된다고 해서 들어가기는 했는데 애초에 이름이 없는 글이어서 뭔가 어색해진 느낌이네요 ㅋㅋㅋ

이름이 들어가는 3인칭인 대신에, 나를 희철로 그녀를 지영으로 생각하고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름을 넣으니까 시점이 섞여버리네요

마지막의 '김박사' 는 (책게 여러분들은 아실 것 같지만) 설명을 덧붙이자면 소설가 이기호의 '김박사는 누구인가' 라는 단편의 '김박사' 입니다
전문가라는 지위를 갖고 있지만 누구나 뻔히 할 수 있는 조언을 늘어놓는 김박사라는 캐릭터가 생각났거든요

여태 썼던 짧은 습작들을 올릴까 말까 종종 고민했는데... 이번 이벤트를 시작으로 조금씩 다듬어서 가끔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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