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엽편] 아메리카노
게시물ID : readers_2306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페레트리
추천 : 5
조회수 : 35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12/07 01:23:17
옵션
  • 창작글
  • 외부펌금지
그녀가 처음 카페에 온 것은 겨울비가 오는 날이었다. 매끈한 긴 생머리, 진한 눈 화장, 검은색 원피스, 그리고 전혀 속이 비치지 않는 검은색 스타킹과 하이힐까지. 먼저 내린 눈이 쌓여 세상은 온통 하얗게 덮여 있었지만 그녀만큼은 온몸으로 그 탈색을 거부하고 있었다. 마치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향수의 냄새도 검은색일 것만 같았다. 비치지 않는 검은색 스타킹은 그녀의 마음을 꽁꽁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항상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는데, 그녀의 피도 아메리카노처럼 검은색일거란 상상을 하고 나면 왠지 무서우면서도 호기심이 일었다. 그 후에도 그녀는 언제나 같은 시간, 같은 복장, 같은 메뉴였다. 밝은 색상의 인테리어를 한 카페마저 온통 까맣게 물들일 것 같았다.

사실 처음엔 그녀의 모든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단지 그녀에게는 옷이 원피스 한 벌일지도 모른다는, 혹은 옷장 안에 같은 옷이 수십 벌 있을 거라는 웃기지도 않는 상상을 했을 따름이다. 한가한 낮에 찾아오는 손님은 그녀뿐이었다. 오히려 그것이 그녀를 신경 쓰지 않게 만들곤 했다. 계산을 하고 커피를 내주기만 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가녀린 손목으로 천천히 검은색 장지갑을 꺼내 커피 값을 치른 다음엔, 죽은 사람처럼 구석 창가자리에 가서 슬픈 눈으로 거리를 내려다보는 것이 그녀가 하는 행동의 전부였다. 그런데 나는 언제부터인가 그녀를 신경 쓰고, 멀리서 지켜보고,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

봄이 가는 것을 아쉬워하듯 비가 오고 있었다. 이따금씩 찾아온 손님들이 남긴 이력(履歷)을 닦아내다가 문득 깨달았다. 나는 빗소리 외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이 적막한 장소에서 그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체 왜지? 그저 카페에 오는 손님일 뿐인데 왜 그 향수 냄새, 그 원피스 입은 고양이를 기다리는 걸까? 혹시 마법 같은 것에 홀린 건 아닐까 하는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 그녀가 조금 늦는 이유는 카페가 너무 조용해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잔잔한 재즈를 틀어놓았다. 그 리듬을 틈타 그녀가 오면 자연스레 말이라도 조금 붙여볼 심산이었다. 그러나 오늘, 변덕스럽게도 그녀는 오지 않았다. 나는 실수로 드립을 위해 끓인 물을 내 손에 쏟았다.

그녀는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장마철이 되어서야 카페에 다시 찾아왔다. 검은 장우산을 툭툭 털어내는 그녀를 보는 순간, 울컥 하고 식도로 통하는 기다란 통로에서 무언가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장마철 카페의 손님은 그녀 혼자였고, 눈 화장과 검은색 원피스도 여전했다. 그녀는 시간의 흐름이 무색할 정도로 똑같았다. 장지갑을 꺼내고,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값을 치렀다. 이름 모를 향수 냄새가 진하게 났다. 딱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머리를 짧게 쳤다는 것 밖에는 없었다. 나는 늘 하던 대로 커피를 만들었다. 끓인 물을 쏟지 않게 조심하면서. 오늘 들어온 커피콩은 로스팅이 유독 잘 되어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앉던 구석 창가자리에 얌전한 고양이처럼 앉아있었다. 습한 카페 안에선 재즈의 피아노 선율이 흘렀다. 곧 커피가 완성되었고 진동 벨을 울렸다. 그녀는 천천히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곤 고양이답지 않게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를 내며 카운터로 다가왔다. 압도적이었다. 어느새 재즈 따위는 내 귀에 들리지 않고 있었다. 이미 그녀가 카페에 들어오는 순간 모든 것이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커피를 내어주는 그때 그녀가 물었다.

“절 기다렸나요?”
“아뇨. 단지 궁금했습니다.”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

문학회에서 썼던 짧은 엽편입니다.
주제가 정해지고 나면 이렇게 짧게 쓰는데, 아무래도 개인 취향(?)이 많이 들어가게 되더군요... ㅋㅋㅋㅋㅋ

특히나 이 글은 그냥 취향고백이고 의미나 주제가 별로 없는 그런 느낌입니다...
단편소설의 첫 부분 같다는 이야기도 들었었고요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