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백과사전 .
조선 전기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와 왕위에 등극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을 좌절시키고, 그들을 살해하는데 가담하였다.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북방의 수비를 견고하게 하는데 공을 세웠다. 관직이 삭탈되어 압구정에서 노년을 보내다 사망하였다.
본관 청주(淸州). 자 자준(子濬). 호 압구정(狎鷗亭)·사우당(四友堂). 시호 충성(忠成). 장순왕후(章順王后:睿宗妃)·공혜왕후(恭惠王后:成宗妃)의 아버지이다. 그의 조부는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명나라에 가서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를 받고 돌아온 한상질(韓尙質)이며 부친은 한기(韓起)이다. 젊어서 여러번 과거에 응시했지만 번번히 낙방하자 나이 40세가 다되어 1452년(문종 2) 음보(蔭補)로 경덕궁직(敬德宮直)을 얻었다. 친구인 교리(校理) 권람(權擥)의 주선으로 수양대군의 무리에 가담하여 무사 홍달손(洪達孫), 양정 등 30여 명을 추천하였고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수양대군을 도왔다. 군기녹사(軍器錄事)가 되고,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으로 사복시소윤(司僕寺少尹)에 올랐다.
1454년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고,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승진, 그해 좌익공신(佐翼功臣) 1등으로 우승지(右承旨)가 되었다. 이듬해 사육신의 단종(端宗) 복위운동을 좌절시키고, 그들의 주살(誅殺)에 적극 가담하여 좌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올랐다.
1457년 이조판서가 되고,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으며, 이어 병조판서를 거쳐, 1459년 황해·평안·함길·강원 4도의 체찰사를 역임하였다. 한명회는 활쏘기에도 능했고 문치보다는 병권에 재능을 보였다. 오지였던 북방으로 파견을 나가는 일에도 망설임이 없었고 북방을 견고하게 하는데 남다른 공적을 쌓았다. 이 일로 한명회에 대한 세조의 신임이 더욱 두터워졌고 1461년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진봉되었다. 이듬해 우의정이 되고, 1463년 좌의정을 거쳐 1466년 영의정이 되어 병으로 한때 물러났다.
1467년(세조14년)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 반역했다고 하여 체포되었으나 혐의가 없어 풀려났고, 다음해 세조가 죽고 이 해 남이(南怡)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1등에 올랐고, 1469년(예종 1) 영의정에 복직하였다. 불편한 관계였던 예종이 갑자기 죽고 막내사위인 성종이 즉위하자 어린 왕을 대신하여 정무를 맡아보는 원상(院相)이 되어 서정(庶政)을 결재하였다. 이때도 병권에는 관심이 높아 병조판서를 겸하였고 그의 세도는 절정에 이르렀다.
1471년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이 되고, 그 해 춘추관영사(春秋館嶺事)에 이르렀다. 평소 몸이 쇠약했던 공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한명회의 권세도 추락하기 시작하였다. 성종 5년에 영의정과 병조판서에서 해임되었고 자신의 정자인 압구정에서 명나라 사신을 사사로이 접대한 일로 탄핵되어 모든 관직에서 삭탈되었다. 세조의 묘정에 배향되고,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윤비(尹妃) 사사(賜死) 사건에 관련되었다 하여 무덤을 파헤치고 시체는 토막내어졌으며 목을 잘라 한양 네거리에 걸렸다. 후에 중종반정이 일어나 신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