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군대에서 느낀 얘기니 밀게에 쓰겠습니다.]
세상물정 모르던 내가 들어간 군대.
힘든걸 모르고 살았던 내게, 이전에 살았던 모든것을 부정하는 군대는 너무나도 힘들었다.
체력의 끝을 보여주는 유격과 야간행군은 마지막 반환점에서 군장을 맨 상태로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졸면서 걷다가 개울물에 빠진
동기놈을 보면서 쓰러지면 엠뷸을 탈수있을까 요행을 부림도 잠시, 엠뷸을 타면 행군을 다시한다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막사의 천장에는 이 글귀가 써있었다.
"너의 등에 짊어진 군장의 무게는 아버지의 삶의 무게에 비하면 깃털과도 같다."
항상 이 글귀를 볼때마다 마음 한켠을 송곳으로 찌르는것 같았다.
군대오기 이틀전. 마지막을 배웅해준다는 친구들의 폭탄주에 정신을 잃고 4명에게 집으로 업혀온 나는 이내 술의힘으로 부모의 마음에
거대한 못을 박았다.
왜 였을까. 4년전 현대차에서 정리해고 당하신 아버지의 초라한 등뒤의 모습이었을까. 구직이 안돼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시던 작아진 모습이었을까.
그래. 그 일인것 같다.
대학교 입학전에 아버지가 근무하시는 공장에서 2주정도 일한적이 있다. 도금을 하시는 아버지의 근무처. 기름에 찌들어 시궁창의 생쥐모습으로 조그만 간이 의자에서 휴식을 취하시고, 시궁창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남루한 공장을 종달새처럼 뛰어다니시던 그 모습이었을까.
항상 생각해 왔다. 왜 우리 아버지는 누군가의 아버지처럼 하얗고 깨끗한 와이셔츠를 입고 좋은 직장에 다니지 못하는 걸까.
그때의 난 알지 못했다.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가난하지만 가난이란걸 느끼지 못하게 애쓴 부모님의 노력을 볼 수 없었으니까.
그렇게 난 술주정을 했다. 아버지가 싫다고. 왜 우리 아버지는 그렇게 더러운 공장에서 일하셔야 하냐고. 왜 그렇게 사셔야만 했냐고.
배게가 축축이 젖을만큼 펑펑 울면서 얘기했다. 어머니도 철부지 아들놈 등짝을 때리며 우셨고, 나중에 들었지만 잠자리에 누우신 어머니도
소리없이 우시는 아버지를 보셨다고 했다. 그 다음날 아침의 밥상모양은 북극의 냉기가 이럴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철부지 아들놈에게 꿀물을 타주시며 '어제 아빠가 일찍 잠들어서 들어오는걸 못봤는데, 앞으로는 늦게 귀가하지 마라.'
그대의 거짓말은 눈에 너무나도 띄었다. 퉁퉁 부어오른 눈가는 그대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내게 말해주었다.
그렇게 난 2011년 01월 24일, 폭설이 내린 다음날 논산으로 가는 무궁화호는 적막했다.
논산앞의 세상 제일 맛없을 낙지 불고기볶음을 먹으면서도 한마디 없었다.
장병과 부모와의 마지막. 사회와 마지막을 고하는 자리인... 군악대가 군가를 연주하고 입대장병이 연병장에 들어서는 그 순간.
눈물을 흘리며 "잘 다녀오라"고 말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뇌리에 박혀있다.
그렇게 철부지 아들놈은 훈련소를 나왔고, 전남장성의 기계화 학교를 나오고, 8보병사단의 전차대대에 전입했고
이등병 시절을 보낸다.
갈굼을 당하고, 조인트를 차이고, 뺨을 맞는 그런 부조리가 남았던 부대였다. 조인트차인 무릎을 부여잡고 울고 싶었던적도 있었다.
물 상병때였나. 부대가 철원에 있어서 그런지 낙뢰가 부대에 떨어진적이 있었다. 그걸 고치지 못해 암흑에 쌓인 새벽2시 근무. 자대 복귀하던때, 지금은 화력발전소가 생겨 더이상 볼수 없었을것만 같았던 은하수를 다시 보았다. 과학교과서에나 볼법했던 아름다운 자수 같았던 밤하늘을 보며 아빠생각이 났다. 그때도 지금 시간쯤이었나.
그렇게 전역했고, 아버지께 종종 전화드리면 사랑합니다란 말을 빼놓지 않는다.
군대가 남긴 그것. 아마 아버지와 언제가는 아버지가 될 아들에게 일깨움을 주는 그런 기회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