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에서는 항상 그 당시 핵심 화두를 중심으로 전선을 긋고 선거에 임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과거 대선을 정리해보면, (이승만~박정희, 전두환 독재시절의 선거는 부정선거이거나 체육관 선거이므로 제외하고,)
직선제를 쟁취했던 87년 대선 : 반독재, 군부정권의 종식 vs 군부정권의 연장 (결과 : 노태우 당선)
3당합당이 있었던 92년 대선 : 민주정권의 추구 vs 기득권세력의 연장 (결과 : 김영삼 당선 - 문민정부)
IMF 사태 직후의 97년 대선 : 최초의 정권교체+심판론 vs 기득권세력의 연장 (결과 : 김대중 당선 - 최초의 정권교체)
----- 3김시대의 종료 : 민주화라는 화두가 대선정국에서 주요 아젠다로 등장하지 못하게 됨 -----
월드컵 이후 맞이한 02년 대선 : 노무현 바람 -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만들 수 있는가 (결과 : 노무현 당선 - 민주정권의 재집권)
아파트 폭등기를 맞은 07년 대선 : 부동산을 띄워줄 수 있는 게 누구인가? (결과 : 이명박 당선)
3김시대의 종료 이후에 있었던 두 차례의 대선을 보면, 이제 '정치적 민주화'라는 화두가 더 이상 주요 이슈로 나타나지 못함을 알 수 있습니다.
07년 대선의 전선은 조금 황당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지난 총선의 전선 역시 한 축은 부동산이었습니다. 이명박과 한나라당이 더 이상 부동산 가격을 띄워주지 못한다는 것이 밝혀진 상황에서 치뤄진 총선이었는데, 아직 부동산 폭등이 일어나지 않고 있던 지역에선 한나라당에 대한 지지가 높았고, 이미 폭등이 끝나고 하락기에 접어든 곳에선 야권 단일후보에 대한 지지가 높은, 특이한 경향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대선 역시 아파트 선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조금 가지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반신자유주의 vs 신자유주의의 전선이 그어질 수 있을까 하는 고민만 하고 있었죠.
그런데, 박근혜씨가 새누리당의 후보로 확정되면서부터 이번 대선의 전선이 아무도 의도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그어지게 됩니다.
바로, 전근대 vs 근현대 라는 전선입니다.
이것은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라는 세 후보의 상징성 때문입니다.
박근혜 후보는 전근대의 총체적 상징입니다. 기본적으로 박근혜 후보는 박정희의 딸이라는 것만으로 정계에 진출하고, 기득권 세력의 강력한 축이 된 인물입니다. 박근혜 후보를 둘러싼 인물들을 비롯해 모든 것이 전근대적인 것들 뿐입니다. 이런 점은, 박근혜 후보가 아무리 피나는 노력을 기울이더라도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국민들에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문재인 후보는 '근대성'의 상징입니다. 문재인 후보는 자수성가한 인물이며, 인권변호사이고 어떤 인맥에도 얽히지 않고 정계에 입문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으로부터 '내가 아는 최고의 원칙주의자'라는 표현을 들었을 정도로 원칙에 엄격합니다. 이런 점에서 문재인 후보는 한국 정치사에 없었던 인물로, 근대성을 총체적으로 상징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인물입니다.
안철수 후보는 현대성의 상징입니다. 의사이면서 독학으로 컴퓨터를 공부하고 연구해서 안철수 연구소를 만들고 V3라는 최첨단의 상징을 만들어낸 인물입니다. 따라서 안철수 후보 역시 한국 정치사에서 없었던 인물이며, 현대성을 상징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 세 후보의 상징성 때문에 이번 대선의 전선은 자동적으로, 자연스럽게, 전근대 vs 근현대의 전선이 되어버렸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문재인 후보로 단일화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모든 요소를 떠나서, 한국사회에는 아직 전근대적인 요소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이 이해가 안 된다면 '범죄의 전성시대'라는 영화를 상기해보시면 이해가 빠릅니다. 온갖 인맥을 통한 부정과 비리가 바로 전근대의 대표적인 모습인데, 우리 사회에 너무나도 만연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전근대를 몰아내기 위해서는 '근대적 개인'이 나타나서 전근대와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회의 구성원들이 '투표'라는 행위를 통해 '근대적 개인'으로 변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새누리당이 문재인 후보나 안철수 후보의 결점을 찾으려는 노력은 바로 이 상징성에 대한 공격입니다. 가령 안철수 후보의 '다운계약서'는 전근대적인 모습 아니냐라는 주장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대선의 전선 구도를 <전근대 vs 근현대>로 놓아두면 필패할 것이기 때문에, 두 후보의 근대성과 현대성에 흠집을 내고 전선 구도를 <전 대통령의 딸 vs 새로운 것 같아 보이지만 별반 다르지 않은 인물들> 의 구도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죠. 아마도 앞으로도 두 후보의 상징성을 공격하려는 새누리당의 시도는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박근혜 후보가 '사과'라든지, 의외의 인물 등용 등 뜬금없는 모습을 보이는 것 역시 자신의 '전근대적인 이미지'를 불식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입니다. 어디까지나 전근대 vs 근현대 라는 전선 구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입니다.
그러나 전술했듯이, 박근혜 후보의 전근대성은 너무나 탁월합니다. 그리고 문재인, 안철수 후보의 근현대성 역시 너무나 탁월합니다.
PS
1.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의, FTA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입장을 아직 모르겠습니다. 어떤 대안을 내놓을 것인지 궁금하네요.
2. 여전히 '아파트선거'의 가능성은 있습니다. 위 전술한 전선을 일거에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걸림돌입니다. 하우스 푸어, 렌트 푸어, 기타 푸어를 포함하는 유권자는 수백만표를 (어쩌면 천만표 이상을) 갖고 있으며, 거기에 얽힌 금액은 천조가 넘습니다. 두 후보의 부동산 대책이 무엇이냐도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3. 진보당 계열에서 후보자가 나오지 못할 것 같은 상황은 매우 안타깝습니다. 유시민, 심상정, 노회찬 등 대선후보감을 세 명이나 보유하고 있는 진보당이 저렇게 헤매고 있는 모습은 너무 안타깝네요. 하루 빨리 상황을 극복하고 후보자를 내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민주당 + 진보당 + 안철수 의 야권단일화를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박근혜 vs 유시민(심상정, 노회찬) vs 문재인 vs 안철수>의 대선후보토론회를 보고 싶은 마음도 간절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