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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얘기
게시물ID : readers_2324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물옆에바람
추천 : 2
조회수 : 568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5/12/19 22:48:07


얘기 들었어?”

 

?”

 

민 주임이 윤 차장 세컨드라는 거.”

 

물론 알고 있다.

 

아니? 그건 무슨 말이야?”

 

사람 참이따 저녁에 시간 있지?”

 

.”

 

그래, 그럼 한 잔 하자고. 안주 좋은 거 있으니까.”

 

내 어깨를 두드린 그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얼굴 전체로 번지지 못한 조소가 입술 언저리에 매달렸다. 이럴 땐 얼른 커피를 마시는 게 좋다. 일에 집중되어 동료와의 잡담에는 뭔가 어설픈 구석이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렇게 보여 지는 게 내가 원하는 바다.

 

더불어 '소식에 느린 둔한 녀석'과 같은 평을 얻는 것도 좋은 일이다. 둔감하단 말을 듣는 사람에게 약삭빠른과 같은 수식어가 따라다니지 않으니까. 그렇게 좀 멍청하지만 믿을 수 있는 녀석이 되는 것이다. 이 또한 내가 원하는 바다.

 

언제나 상대로 하여금 말하게 해야 한다. 아니, 신이 나서 떠들게 해야 한다. 말을 하는 동안 그 얼굴들을 쳐다보고 있으면 매우 흥미롭다. 마치 스스로가 뭐라도 된 마냥 떠들어대기 때문이다. 여기에 네가 하는 말이 내게는 좀 어렵다는 반응을 보여주면 더욱 좋다. 그러면 이제 다들 거룩한 학자나 교수로 변모하여 수다를 지나 강연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 강연이 사사로운 잡담을 벗어나지 못하는 수준임은 두 말할 나위 없지만, 설명을 끝낸 그들의 얼굴은 항상 만족감으로 가득했다.

 

나는 적을 만들지 않고 살았다. 타인의 경각심을 자극해 험난한 경쟁에 드는 짓도 피해왔다. 무난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음과 동시에 탐욕스럽지 않은 사람이 된 것이다. 6년차 대리지만 이제 곧 과장이 되는 것. 그 후보에 내가 오를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촉새 같은 김 대리가 그리 알려줬다. 한가지 흠결을 꼽자면 연애에 대한 소극적 자세이겠지만, 이것도 그저 외견에 불과할 뿐. 결혼을 위한 준비 또한 은근히 진행 중이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할 결혼발표에 필요한 덕목이라면, 너희들의 축의금이 내게 필요하다는 속물적 근성을 포장할 다소 멋쩍은 웃음이리라.

 

퇴근 후 김 대리와 함께 지하철을 탔다. 동료와의 간단한 술자리는 회사 근처에서 이뤄지는 게 보통이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와 갖는 술자리는 언제나 회사 주변인 을지로를 벗어났다. 한번은 왜 이렇게 동 떨어진 곳으로 가는지 물었다. 그는,

 

회사 내 루머를 떠들 땐 말이야, 보안유지가 생명이지.”

 

이년 전 충남지사에서 올라온 그는 작고 띵띵한 체격에 피부도 다소 검은 편으로 어딘가 촌스럽다는 인상을 줬다. 이런 이미지로 남은 게 지방출신에 대한 나의 편견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그의 외모 때문이었는지는 지금도 불분명하지만 뭔가 세련되지 못하다는 점에서 판단의 갈등은 적었던 것 같다. 더불어 그와 지낸 시간이 쌓여갈수록 근거 없는 판단에 대한 소소한 갈등조차 점차 희석되었다. 

 

김 대리는 짧은 미니스커트나 핫팬츠, 민소매 차림을 입은 여자들이 지나갈 때는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그녀들이 정지해 있을 때는 위 아래로 훑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런 점에서 촌스런 김 대리는 유효한 판단이 됐다. 그나마 거리에서 이런 행위는 동행한 내가 창피할 수준은 아닌지라 적당히 용납할 수 있었지만, 지하철에서의 그 일은 좀 곤란하여 아직도 가끔 떠오르곤 한다.

 

홍대로 향하던 지하철이다. 165 정도 됨직한 키. 파란 원피스는 허벅지 언저리에서 끊어지고, 그 아래로 뻗은 매끈한 두 다리가 하얀 운동화로 들어갔다. 옅은 분홍 양말이 발목에 머물러 대학생의 활달함이 느껴지는 옷차림. 나의 시선도 스무 살 됨직한 그녀에게 잠시 머무른 걸 인정한다.

 

김 대리의 눈 또한 아가씨에게 집중됨을 알았을 때, 설마 하는 작은 우려뿐이었지만, 몇 정거장이 지나도록 허벅지에서 눈을 떼지 않는 그를 보면서 점차 불안감이 커지기 시작했다. 결국 불쾌한 기색으로 김 대리를 응시하는 그녀를 발견하면서 내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고 그제야 김 대리 또한 살짝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거두었다.

 

당시에는 지금 정도의 친밀함이 없었기에 그의 옆구리나 팔을 잡는 행위로 저지하지 못했다. 이 촌뜨기를 미리 저지하지 못했다는 후회가 자책으로 남을 법 했으나, 당시 김 대리가 맥주를 마시며 뱉어낸 말로 인해 그런 결과는 발생하지 않게 됐다. 

 

아니, 봐달라고 입는 거 아냐? 왜 저렇게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을 하는지 몰라. 남자가 없었으면 과연 지들이 저런 옷을 입을까? 여자들끼리만 모아 놔도 저런 옷을 입겠냐고!”

 

술기운으로 붉어진 그의 얼굴에서 쏟아졌던 말. 나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끄러움에 젖어 자책하기 보다는 수치심을 덮도록 분노를 선택한 그에게 찬동을 보낸 것이다. 그러자 내 안에서는 사사로운 투쟁이 일어났다. 술자리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 적당히 김 대리의 기분을 맞춰준 것이 원인이었다.

 

의외로 불안을 조성했던 내전(內戰)은 쉽게 마무리됐다. 외적인 동조가 간단했던 만큼이나 내적인 거부 또한 명료한 게 아니었나 싶다. 이제 마음은 김 대리에 대한 경멸감으로 가득해서, 어쩌면 당시 그를 바라보는 내 시선이 잠시나마 곱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다소 험악하게 보였을 수도 있다. 충고 한마디를 전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우선은 화장실로 향했다. 정돈된 언어를 사용해 오해를 막고 불필요한 논쟁을 예방하자. 동시에 그와는 다른 세련된 나의 모습을 보이고자 했다.

 

화장실 세면대에서 손을 씻는데 얼굴이 하나 등장했다. 색깔이 불긋불긋하여 알콜이 제법 침범했다. 이대로는 왠지 나의 사려와 명료함이 그에게 곧이곧대로 전달되기 어려우리라. 누가 봐도 술 취한 놈 둘이 떠벌리는 잡담에 다름 아닐 것. 하지만 여전히 부글거리는 이 경멸감을 외면하자니 그 또한 원하는 바가 아니다. 어찌할까 하는 순간 묘하게도 내 안에 평화가 찾아왔다.

 

김 대리는 더러운 까마귀가 되었고 나는 고고한 학이 되었다. 까마귀와 싸우는 것은 학으로서 꺼릴 일이다. 돼지에게 글자를 가르친다고 해봐야 현자가 될 수 없고, 글을 전하는 과정 자체가 어불성설. 오히려 까마귀를 그대로 두어야 학인 내가 더욱 돋보이지 않겠는가. 흰색 옆에는 검은색이 있어야 좋다. 혹시 발생할지 모를 타인과의 전투를 미연에 방지한 것에 안심하며 그 날을 보냈다.

 

언제나 그렇듯 신촌은 바글바글하다. 지하철에서 내릴 때도 그랬지만 역()으로 나와도 마찬가지. 저마다 사람인 걸 티내는지 시끄럽기 그지없다. 한마디 한마디가 서로에게 수단인데 놀랍게도 타인에겐 소음이 된다. 소리가 모여 소음이 되는 광경이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인파 사이를 지나가는 건 여전히 수고스럽다.

 

김 대리는 뭐가 그리 좋은지 벌어진 얼굴로 두리번거리며 사람 구경을 했다. 아무래도 여자 구경이란 말이 보다 옳으리라. 어쨌거나 그는 이런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는 듯 했다. 혹시 김 대리의 장점이 이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는 마치 언제든 자신의 얼굴 피부를 두껍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것 같았다. 소시민들끼리 지키는 예의라고 할 만한 범주에서 벗어나는 순간, 보통 누구 얼굴은 붉어지거나 다른 이의 얼굴은 굳어진다. 그것이 우리의 모습이고 보통이며 정상이라 하겠지만, 김 대리가 그런 순간에 어색한 표정을 짓는 건 좀처럼 없는 일이다. 간혹 있어도 순간적으로 멈칫할 뿐이며, 언제나 그가 원하는 목적에 잘 도달하곤 했던 것이다. 그 목적이 매우 세속적인 -여자, 루머, 연봉과 같은- 것에만 머무르는 게 안타까운 지점이겠지만, 잠시나마 그런 뻔뻔함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아뿔싸! 이내 고개를 저어 털어버렸다.

 

대개 술집이란 게 그렇다. 처음에는 분위기나 색다른 안주로 몇 번씩 가기야 한다만 나중에는 그냥 가는 곳을 가게 된다. 늘 새로운 장소를 찾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고 더구나 그 술집이 꼭 마음에 들지도 의문이니, 귀찮음을 핑계로 익숙한 곳만 가는 것이다. 우리가 동네마다 몇 몇 술집을 지정하게 된 건 자연스런 귀결이었고, 오늘도 그런 가게 중 한 곳에 들린 참이다. 안주를 기다리며 맥주로 목을 축일 때, 김 대리가 물었다.

 

요즘 좀 어때?”

 

, 괜찮지. 윤 차장 덕으로 일이 좀 많아진 거 말고는.”

 

아니, 회사 말고. 만나는 여자 없어?”

 

순간 멈칫하며 갈등했으나, 나는 곧 시선을 내려 맥주를 찾았다. 발각되는 거야 별 일 아니지만 최소한 이 소식이 김 대리를 통해 퍼지는 건 피하고 싶었다. 반이 못되게 남은 맥주를 입에 쏟아부었다. 나는 과장되게 아아하는 탄성을 질러 소리 뒤로 망설임을 감췄다.

 

그거야 뭐늘 같은 거지. 알면서 뭘 물어?”

 

어허, 남자에겐 여자가 필요한 거야. 성실하게 일해서 총각시기 길어지는 거 누가 좋아해? 부모도 싫어하고, 세상도 싫어하고, 심지어 회사도 싫어해.”

 

슬슬 생각해보려니까 남 고만 재촉하고 너나 먼저 가라.”

 

아니, 내가 장가도 먼저 가서 이렇다 저렇다 떠든 다음에나 갈라고?”

 

, 그럴라고. 어디 김 대리님만큼 잘 알려주는 사람이 있어야지.”

 

주문했던 치킨이 나오자 대화에 쉼표가 생성됐다. 자주 오지는 않지만 그래도 제법 들리던 곳인데 알바의 얼굴이 생소하다. 그리고도 좀 특이했다. 짧게 자른 머리에 약간 네모진 턱 선이 소년 같은 인상을 뿜어내면서도 몸에 바싹 달라붙은 티셔츠는 가슴이 볼록하게 솟아나와 튀어나온 만큼의 크기로 유혹을 표출했다. 음식을 놓고 가는 그녀. 뒷모습을 바라보던 김 대리가 닭다리를 집으며 말했다.

 

저런 애들은 시급 더 줘야지. 가슴이 좀 더 파였으면 내가 팁이라도 줬을 거야.”

 

천박하다 느꼈지만, 딱히 적절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화제를 돌리는 것으로 그와 동화되는 걸 피하는 수밖에.

 

김 대리, 근데 오늘의 안주는 뭐야?”

 

민 주임이아 글쎄, 요것이 윤 차장이랑 몰래 뒤로 붙어먹는다네. 얌전한 얼굴을 해가지고 요조숙녀인양 이리저리 빼더니만내 그럴 줄 알았지. 웬만하면 다 알걸?”

 

졸지에 웬만한 사람이 아니게 된 나는 잠시 고민을 했다. 무슨 질문부터 해야 이 상스러운 인간이 신나게 떠들어댈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민 주임이? 나는 괜찮게 봤는데일처리도 차분하게 잘하고.”

 

그렇지. 게다가 몸매도 좋고. 내가 2년 전에 오자마자 처음 눈독 들인 게 민 주임이야. 키는 좀 작지만 가슴도 크고, 인상 깔끔하고. 여러모로 결혼하기 적격이란 생각이 들었거든.”

 

열심히도 봤네.”

 

그래야지, 결혼 생각하는데. 암턴간에 그래 가지고 은근슬쩍 몇 번 데이트 신청 같은 걸 했지. 근데 그때마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면서 거절하더라고. 그러더니 나중에는 정색을 하면서 그러는 거야. 내가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고. 나는 그때 순수하게 받아들였지, 그 말을. 그런데 알고 보니 윤 차장이랑 떡 치고 있었던 것 아니야? 이런 미친년이 어디서 구라질이야!”

 

뭘 또 그런 걸로 욕까지 해.”

 

앞에서는 스타일 찾으면서 뒤로 그 짓거리를 해댄 건 뭐야? 윤 차장이 잘생기길 해, 매너가 좋아? 그냥 지위랑 돈 이잖아. 처음부터 거기에 들러붙을 거면서 스타일은 무슨속물 같은 년!”

 

인간관계를 그저 돈으로 환산한 이 녀석이 한심스러웠다. 하지만 목구멍 언저리에 올라온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는 건, 그와 같아지는 길이기에 최대한 점잖은 음성으로 순진하게 물었다.

 

그렇다고 민 주임이 김 대리님은 돈이 없어서 싫어요라고 얘기할 수도 없는 거 아냐?”

 

그건하면서 머뭇거리던 그가 사납게 치킨을 뜯었다. 우물거리는 입으로 잠깐만 이거 좀 먹고라며 시간도 벌었다. 맥주로 입가심을 마친 김 대리는,

 

얘기를 적당히 돌려서 하면 좋잖아. 안정감을 원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그런데 걔는 마치 난 돈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야라는 어투였다구. 자신의 창녀심보를 감추려는 그 어투! 그게 화가 나는 거야. 난 정말 진심으로 대했단 말이지.”

 

멀쩡한 회사원을 순식간에 창녀로 만든 김 대리는 진정으로 화가 난 듯 맥주를 들이켰다. 그리고는 손을 흔들어 알바를 부르고 두 잔을 추가 주문했다. 은근한 눈으로 종업원의 뒤태를 바라보던 그는 차라리 쟤가 민지연 보다 나을 거라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다행히 가게 안의 소음이 어느 정도 되는지라 들릴까하는 염려는 약했다. 하지만 계산에 없던 걱정을 하게 된 나는 화가 솟구쳤고, 그 와중에 본래 목적을 잠시 망각해 후회할 짓을 했다. 진심이라고 해 봐야 육체에 눈독 들인 것일 뿐 아니냐는 비아냥을 날린 것이다. 그러나 김 대리는 먼젓번과 다르게 어물쩍거리지 않았다.

 

그거야 당연한 거지. 섹스는 기본이야, 수컷의 본능. 하기 싫은 여자랑 왜 결혼 해? 하고 싶은 여자와 하고, 그 다음에 오래 갈 수 있는 관계인지 생각해야지!”

 

난감하다. 그의 말은 분명 잘못된 것이고, 그의 저속한 욕구는 교정되어야 할 것인데 딱히 받아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저 너의 말도 나름 일리가 있다는 의례적인 반응을 보이다가 화제를 전환하여 이 어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건 그렇고 말이야, 윤 차장과 민 주임은 진짜 그런 거야? 아니면 그냥 어디서 들은 거야?”

 

이에 김 대리는 지난주 사무실에서 둘이 손을 잡고 있는 걸 직접 보았으며, 소문을 들은 것은 그보다 전이라고 했다. 급기야 이틀 전에는 윤 차장의 손이 민 주임의 허리께에 있었으면서도 그녀는 불편한 기색 없이 그 상황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보통 자기 눈으로 직접 봤다는 것만큼 중요한 증거가 없다. 그래서 그들이 대개 증인으로 채택되곤 한다. 그러나 증인이 신뢰하기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말을 곧이 고대로 받아들이는 건 우려할 상황이 된다. 김 대리는 아무래도 후자에 가까운 사람인지라 그가 본 상황 또한 실제 이상으로 부풀려지거나 윤색됐을 수 있다. 이것이 그의 얘길 들으며 정리된 생각이었다. 더불어 내가 아는 민 주임. 그녀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김 대리의 입을 통해 나온 말을 그저 단순한 소리로 만들도록 유도했다.

 

이제 서른을 갓 넘긴 지연이를 알고 지낸 건 대략 삼 년 정도 됐다. 인천 지사에서 근무하던 그녀는 원래 살던 곳이 서울이라 했다. 이곳으로 발령되었던 초기, 그녀는 자신이 없던 일 년 반 사이에 서울이 너무 많이 변한 것 같다며 엄살을 부렸다. 그것이 나름 농담이자 아직 낯선 본사 사람들과 친해지려는 노력의 일환임은 후에 알았다. 시간이 좀 더 흘러 그녀의 이름이 사무실 모두에게 익숙해졌을 때, 한 직원이 물었다.

 

겨우 인천인데에그냥 서울에서 출퇴근 하시지 그랬어요?”

 

아침 지하철은 너무 붐비구자연스러운 독립 기회이기도 해서 그냥 인천으로 이사했어요.”

 

그러면 지금은 서울에서 자취하세요?”

 

지금이야 부모님과 같이 살지만가끔은 그때가 떠오르기도 하네요.”

 

아쉬운 듯 답하는 그녀의 옆모습은 하얀 피부에 코가 오뚝하여 지적이지만 차갑게도 보였다. 평소에 봤을 때는 분명 커다란 눈이 둥글고 코끝도 유려하게 곡선을 그려 부드러운 인상이었는데, 그 날의 그 얼굴은 내가 알던 그녀가 아닌 또 다른 그녀로서 나타난 것이다.

 

아마도 이때부터 나는 그녀를 선명하게 각인시켜 머리와 가슴에 나눠 담으려는 노력을 했으리라. 낮에는 일을 통해 만났고, 혹여 사사로운 감정이 불편한 상황을 만들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도 냈다. 그리고 머리가 쉬는 밤이 되면 그녀를 내 꿈으로 초대해 연인으로 즐겼다.

 

지연이와 가깝게 되길 희망하던 바람은 엉뚱하게도 회식자리 어느 날에 벌어진 유치한 게임 -스물 근처 당시에도 왠지 머쓱하여 마지못해 따라 하던 그런 것- 덕분에 성사 됐다. 벌칙으로 무리하게 술을 마시게 된 그녀. 들이켰던 잔 수만큼이나 정신이 빠진 모양새. 보살피며 집으로 데려다주는 것으로 싹을 틔운 인연. 다음날 그녀가 고마움을 표하며 시작된 관계. 서로의 응답 횟수를 세는 게 무의미해질 무렵, 나는 그녀와 연인이 되었다.

 

우리는 사내 연애가 만드는 번거로움을 피하고자 공개 연애를 하지 않았다. 매일 보는 사이지만 언제나 절제해야 하는 이 만남은, 연인의 충동을 긴장으로 둘러쌓으며 균형감을 요구했다. 물론 단 둘이 있을 때는 서로간의 얘기를 늘어놓기도 했는데, 지연이는 종종 타지마할을 언급하곤 했다. 황제가 자신의 부인을 위해 건축한 궁전은 예술적 가치도 높지만, 연인을 위한 사랑이 궁전의 위세보다 크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처음에 타지마할을 봤을 때는, 그냥 여느 관광객이랑 같았어요. 유명하다는 거 그거 볼려구 온 거였는데, 낮에 잠깐 보구 가려다가 그만 일이 잘못되는 바람에 며칠 더 머무르게 된 거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하루 종일 구경하게 됐는데이 타지마할이 아침에는 핑크빛을 띄고그 다음에는 하얘지다가 저녁에는 완전 우윳빛이 되고, 밤이 깊어 달빛을 받으면 금색이에요. 그 다양한 변화와 빛깔에 매료된 순간부터 너무 멋지구 부러웠어요. 연인을 향한 섬세한 배려가 이렇게 큰 건축물과 함께 나타나는 걸 보고

 

쉬어가듯 말하는 지연의 얼굴을 보다가 잠시 나는 이상한 지경에 빠져들었다. 그녀가 존대를 사용할 때는 배려를 느꼈고, 은근히 말을 놓을 때는 친근함이 귀에 닿았다. 당장 인도를 다녀와서 그녀가 본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떠올리며 얘기하고 싶은 맘이 일었다. 하지만 어느새 늦어진 시간이 다음날 출근을 상기시키며 나를 상념에서 건져냈다 이제 그만 가야겠다 말하고 계산대로 걸어갔다. 카운터 점원에게 건네던 카드가 그녀의 손에 제지당했다.당황한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봤는데,

 

저녁도 사주시구 얘기도 많이 들어주셨는데 커피 값은 제가 내고 싶어요. 사람들은 주로 저한테 말을 하지, 제 얘길 들어주지 않거든요. 정말 좋았어요.”

 

순간 내 사고는 일시 정지되었고 가슴에서 뭔가 뭉클대며 솟구쳤지만, 끝내 그 덩어리는 언어로 번역되어 입 밖을 나오지 못했다. 그저 말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을 뿐이다.

 

헤어진 후 집으로 들어가는 길엔 발이 무척이나 가벼워 중력이 절반 정도 작용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물리법칙에서 벗어난 내가 자유를 만끽하느라 그랬는지 입술 대부분이 벌어져 문 앞까지 걸어갔던 기억이다. 침대에 누워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조금 억울했다. 아직까지 돈 만 원에 날 팔은 적은 없는데, 그녀의 지갑에서 나온 플라스틱 조각은 이를 가능케 했다. 내 마음이 헤퍼서 그리 된 것이기 보다 그녀의 인간적 품격이 지닌 매력 때문이라 여기며 잠에 들었다.

 

사귄지 일 년이 지났을 때, 앞으로 긴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다는 의향을 비쳤다. 그녀는 조금 이른 것 같다며 부드럽게 거절했다. 안타까움이 없었다면 거짓이다. 하지만 고백 이후 발생했던 그녀를 향한 아쉬움은, 이후에도 만남을 지속하며 점차 그녀의 신중함을 인정하는 것으로 변모해 나를 옭아맸다. 이런 그녀를 향한 김 대리의 욕질은 객관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거절당한 패배감에 사로잡힌 한 남자의 천박한 복수로 해석됐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밝혀 김 대리의 오해를 풀어주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한줄기에 불과했지만 분명 있었다. 그러나 김 대리의 품성을 떠올리자 마음은 사그라들었다. 홀로 결론에 도달할 쯤, 그가 말했다.

 

그리고 더욱 더 놀라운 사실이 있지.”

 

나는 심드렁히 응답하고. 

 

뭐가 또?”

 

이건 정말 나만 아는 일인데, 윤 차장이 요새 불안불안한 거 알아?”

 

확신으로 시작하여 거만으로 마무리 되는 어조. 그에게 나는,

 

윤 차장이 뭐가 불안해. 회사에서 인정받고, 능력도 확실한데.”

 

이렇게 전혀 모르겠다는 반응을 완전한 부정으로 표현해 답했다.

 

하여간 답답해요, 답답해. 그건 일이나 그런 거고왜 이렇게 상상력이 없어?”

 

또 다시 허튼 소리가 나올 조짐이다. 반갑지 않은 외모에 성욕만 남은 존재가 나를 가르치려 하고 있다. 그러나 괜찮다. 언제든지 들어준다. 천박한 존재가 품격 있는 존재의 가치를 더욱 공고히 하려는 순간을 놓칠 수 없다. 그는 그렇게 필요하다.

 

대체 뭔데 그래? 나 머리 나쁜 거 알잖아. 쉽게 좀 얘기 해봐.”

 

이제는 얼굴 가득 화색을 띈 김 대리. 나는 이 미소가 마음에 들었다. 그에 대한 나의 판단이 틀리지 않음을 알려주는 지표와 같은 이 웃음. 여기서 다시 한 번, 바로 그의 존재에서 나는 증명되고 확신을 얻는다. 대체 김 대리와 나는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 어떻게 보면 별 차이 없는 인간일지도 모르지만, 그 작은 차이가 그와 나를 확연이 구분 짓는다고 생각하니 왠지 기분이 좋았다. 이 테이블 저편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1미터? 2미터? 얼마 안 될 이 좁은 간격의 틈을 그의 목소리가 메꾸기 시작했다.

 

내가 윤 차장 얘기를 들었어요. 그러니까 직접 통화하는 걸 들은 거지. 와이프랑 재산분할이 어쩌고 하더라고. 그러니까 뭐야? 이혼 소송 중이라는 거지. 더해서 생각해봐. 윤 차장은 애들이 없잖아? 그러니까 또 뭐야? 이건 이제 손쉬운 이혼이 된다는 거지. 그 와중에 젊고 싱싱한 여자와 손도 잡고 몸을 부대낀다? 이건 이미 결정 난 거라는 거야. 너무 쉬운 거지. 하여간 멀쩡하게 보이는 것들이 뒤로 하는 짓거리가 꼭 이래요.”

 

이야기를 하는 내내 김 대리는 내 눈을 응시했다. 나 또한 그에 맞서 그의 눈을 보다가 어느 순간 귀가 뜨거워졌다.  그의 말은 그저 소리가 아니라 확실한 수단의 역할을 했다. 귓전을 때려댔다. 요즘 퇴근 후, 지연이와 통화시간이 전에 없이 짧았던 것. 나를 믿는다며 이런저런 일들을 떠넘기고 먼저 퇴근했던 윤 차장. 모습과 모습들이 교차 편집되어 떠올랐다. 아니다, 너무 멀리 갔다. 그저 사무실에 일이 많아진 것뿐이다. 스트레스로 과민해진 것이다. 아직 그의 말을 온전히 신뢰할 수 없었던 나는,

 

그 걸 어디서 들었는데?”

 

, 옥상에 담배 피러 갔다가 들었지. 근래에 윤 차장이랑 민 주임이 교류가 잦아진 건 사무실에 눈치 있는 놈들이라면 대충 알겠지만이혼 소송 중이라는 명백한 증거! ? 이 증거를 알고 떠드는 놈은 나 밖에 없을 걸?”

 

얘기를 끝내며 낄낄대는 소리가 나를 향한 것은 아니다. 분명히 별 것도 아닌 자가 대단한 것도 아닌 걸 발견하고 스스로 만족한 데서 오는 웃음소리다. 그런데 왠지 몹시 듣기 거북했다. 괜히 물어봤단 생각이 든다.

 

지연이는 얘기를 잘 들어주는 스타일이다. 회사 동료나 친구들이 고민을 털어 놓거나 조언을 구하는 경우에 자신의 말을 아끼고 상대의 말에 집중하는 그런 사람이다. 재수 없게도 오해를 부를 만한 장면이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넘어갈- 하필이면 김 대리 눈에 띈 것이다. 이건 우연히 발생한 사건들을 입맛대로 짜깁기한 터무니없는 얘기에 불과하다. 이제 나는 그만 김 대리의 입을 잠그고 싶어졌다.

 

역시 자네는 대단해. 우리 김 대리님의 재능이 회사에서 썩고 있는 건 아닐까하는 아쉬움이 들어요.”

 

뭘 이정도 가지고. 하여간 정말말짱해 보이는 놈들이 문제야. 어쩔 땐 이러려고 말짱해 보이는 거에 더 치중하는 게 아닌가 싶어. 누가 알겠어? 아니 대체 누가 짐작이라도 할 거야? 이제 한번 봐바. 누구 말이 맞나!”

 

그래그래. 오늘 얘기 정말 잘 들었어. 이제 그만 일어납시다. 요즘 컨디션이 별로네.”

 

그것도 다 윤 차장 때문이지. 연애하랴 이혼하랴 얼마나 바쁘겠어. 니가 묵묵히 다 받아주니까 지 일까지 넘기는 거라고. 하여간 윤 차장이 문제야.”

 

계속해서 귀가 거슬렸지만 그를 재촉해 어서가자 했다. 자못 아쉬워하던 김 대리는 아직 볼기짝에 여흥이 남았는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영 굼뜨고. 하는 수 없이 계산대로 달려가 카드를 긁었다. 그리고도 한 잔만 더 먹었으면 좋겠다는 푸념을 들어야했다. 가게를 나온 김 대리는 늘 그러던 것처럼 오늘 일은 절대 비밀이라며 내 입을 단속했고 나 또한 그러마하며 답했다.

 

집으로 가는 지하철은 번잡했다. 바깥 공기를 느낄 수 있는 버스를 타지 않은 게 약간 후회된다. 그 후회를 잊기 위해 잡생각에 빠져 볼 요량이다. 이 많은 인간들이 여태 일하다가 지금 들어가는 것일까? 아니면 나처럼 한 잔하고 귀가 하는 건가? 그마저도 아니면 이제 놀러 나가는 것이겠지. ‘하는 실소가 입술 사이로 삐져나왔다. 작은 후회를 덮으려는 헛된 시도가 만들어낸 웃음인 모양이다.

 

어느새 발산역에 도달한 열차가 나더러 이제 그만 내리라 했다. 별수 없이 역을 나와 들어가는 길에 지난 일 년간 끊어왔던 담배를 샀다. 3000원을 줬는데 거스름돈을 받지 못했다. 물끄러미 쳐다보니 라이터 값이 500원이란다. 편의점 종업원이 가격을 올려 받을 리는 없는데 왠지 이놈이 의심스럽다. 그렇다고 다툴 수도 없으니 담배나 거칠게 챙겨 나오는 수밖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가득 마셨다. 두세 모금 빨았을 때 세상이 슬며시 흔들려 비틀거렸다. 잠깐 눈을 감았다 떴다. 머리 위로 피어오른 담배 연기가 산산이 흩어진다. 이 연기에 그녀와 나의 관계를 대입시키는 신파가 떠올랐다.

 

에이, 씨발

 

스마트폰을 꺼내어 전화목록을 눌렀다. 민지연이란 이름 옆에 방긋 웃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이 왠지 나를 놀려댄다. 입에 문 담배 끄트머리를 두어 번 씹다가 연기와 함께 뱉어냈다. 콧속의 이물질을 당겨 입으로 가져와 다시 한 번 뱉었다. 더러웠다. 김 대리와 나 사이에 교집합이 생긴 것 같다. 하지만 자꾸 감정이 생각을 밀쳐내는데 항거할 수 없었다. 나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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