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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단편 - 상자
게시물ID : mystery_232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맥콜같은인간
추천 : 4
조회수 : 637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06/16 06:51:34
 
 
 
나는 이를 마주하고 있다.
이는 그러지 않아도 허여멀건해서 유령같아 보인다.
동물 털 속에 서식하는 이로 착각했다면 그거야말로 큰 착각.
이는 외계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허여멀건 해서는 나와 대치하고 있을리가 없다.
 
이는 두시간 전에 내 앞에 나타났다.
시내에 걸어다니던 사람들을 모두 정지시키고는, 나만을 남겨둔 채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다.
나는 두렵다. 길거리에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아봐야 했다. 길가에 떨어진 정체모를 쇳조각
하나를 보고는, 무기로써의 효용성에 대해 잠시 고민하다가 그만뒀다.
 
내 쇳조각 공격이 이에게 먹힌다면 나는 대통령 표창을 받을 수도 있겠다.
세계의 영웅이 되어 타임지에 실리고, 그 특혜로 5급 공무원이 될 수도 있겠다.
흠. 아니면 일조원 쯤 달라고 해도 괜찮겠다. 명예와 돈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나는 돈을...
아니 씨발 이게 문제가 아니잖아.
 
 
 
이는 아주 조금씩이지만 나에게로 다가오고 있다.
그것을 알아차린 것은 삼십분 째에 들어서였다.
분명히 콜라캔뚜껑은 이의 발 앞에 있었는데, 지금은 이가 반쯤 그것을 밟고 있기 때문이다.
하루나절 정도 되면, 이가 내 코앞까지 다가올텐데 그때가서는 어쩌지?
 
지구 최초의 외계인과 키스를 한 인류가 되어야 하나?
키스만으로 이가 내 십이지장에 외계인의 아이를 임신시키면 난 항문으로 아이를 낳아야 하나?
요도에서 나오면 그것도 끔찍할 것 같다.
 
어쨌든 이가 내 코앞까지 와서 날 범해버리기 전에, 나는 어떠한 대비책이든 강구해야 한다.
이는 내가 사고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아주 느리지만 움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의 허여멀건한 형체에서 나를 바라보는 눈알이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왜 하필 나냐고!
 
 
 
 
"안녕"
 
"어...안녕... 어? 뭐?"
 
뭐야. 단순한 인사잖아. 안도하는 순간 나에게 또 다른 공포가 엄습한다.
이가 왜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외계인인 걸까?
의문이 공포로 승화된다면, 그것은 미지와의 조우를 가장 원초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마침내 공황으로 정신을 이끈다.
나는 용캐도 대답을 했고, 이는 눈알을 아래로 깔아내렸다.
 
"너네, 이거 줄거야."
 
 
이는 천천히 내 앞으로 투명한 상자를 내밀었다.
나는 그 상자가 무엇인지 알고싶지도 않고 알아서도 안된다는 생각으로 고개를 필사적으로 절레절레
흔들었다.
 
 
"부담가지지 마. 사양하지 마."
 
 
이의 존재자체가 부담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무서워서 말도 안 나오는데다가
'니 존재가 부담' 이라고 함부로 주둥이를 놀렸다가는 주둥이 위아래를 잡혀 확 까뒤집히는
고문을 당하지 않을까 싶어 나는 입을 다물고 여전히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고 있다.
 
 
"우린 실험한다. 너희가 만약에 이것을 잘. 다룰 줄 안다면. 좋은 일이 생겨."
 
 
언뜻봐도 판도라의 상자인데 이자식아.
 
 
 
이는 처음에는 부담스럽게 그 다음에는 공포스럽게 상자를 내 코앞까지 밀어넣었다.
차라리 보수를 대변하는 모 신문 정기구독권을 준다면 마침내 그것은 내 일용할 삼겹살 구이용
기름막이로 사용할 수 있을테니 감사히 받겠지만 이건 이야기가 다르다.
 
그도 그럴 것이 으레 전래동화에서 보면 미지의 무언가로부터 상자를 건네받은 친구들은
그다지 결말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도 있다. 허여멀건 한 생명체가 눈알만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입은 어디인지 모르는데 한국말도 잘 하는 것이 무슨 물질로 구성되었는지도 모르는
것을 넘겨줬을 때 '당케!' 하며 지구의 언어로 기쁘게 응할 사람이 60억 인구중 몇이나 되겠나.
 
나는 한사코 상자를 넘겨받기 원하질 않았다.
 
 
"어서 받아"
 
 
 
이는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눈이 충혈되기 시작한다.
나는 무서웠다. 저놈이 내 장기로 줄넘기를 하기 전에 얼른 상자를 낚아챘다.
상자는 매우 차가웠지만 나는 그것을 끌어안았다.
공포스러운 눈으로 이를 쳐다봤다. 이는 언제그랬냐는 듯 다시 온화하고 허여멀거한 빛을 뿜으며
말을 이었다.
 
 
 
"지구인의 유전자 정보는 생각보다 부족했다. 우리는, 너희의 *딸깍 딸깍* 우리는, 너희의
수많은 정보 중 소리를 낼 수 있는 기관과 시야를 확보하는 기관의 정보를 수집했고, 그것을 토대로
지구의 실정에 맞게 우리의 몸을 바꿨다. 임시방편이지만 우리는 지구인과 흡사한 모습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것이 너희에게 익숙하게 비춰진다고 확신하고 있다."
 
 
 
만약 너같은 것이 사람이랍시고 내 부하직원으로 들어온다면 인사과에 찾아가 말하겠지.
'나는 많은 걸 바란 것이 아니라 단지 사람같이 생긴 걸 원했을 뿐이에요' 라고.
항상 그렇지만 나는 이것을 생각으로 그쳤다.
 
 
 
"우리가 건네준 그 상자 안에는 인류가 가지고 있는 가장 많은 감정을 담고 있다. 그 상자를 열면,
그 감정이 너희 행성 전체로 퍼져 너희는 멸망하거나 아니면 번영할 것이다. 너희 행성에는
바이러스가 있다지. 바이러스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바이러스라고 꼭 나쁜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염성 강한 물질 중에는 엔돌핀이라던지 하는 희망적인 것들도 있으니까.
하지만 파멸이라니? 그러면 이 안에 들어있는게 복불복이라는거잖아. 그러고보니 우리엄마나,
외할머니는 날 많이 미워하던데 만약에 여기 들어있하는게 미움이라면 지금 당장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핵미사일을 발사해도 전혀 이상할게 없다는 것 아닌가?
 
 
내 주변사람들에 대해 생각해보자.
승철이는 아마 내가 저번에 빌려준 돈을 갚지 않았다고 타박한 것 때문에 나와 연락을 안하고 있지.
정대리님은 2/4분기 업무보고때 내가 프로젝터를 제대로 돌리지 않아서 날 갈궜지.
아빠는.... 하 씨. 꺼내지도 말자. 지금도 경마장에서 말밥주다가 마권이나 줍고 있으려나.
아오! 내 주변에는 인생에 도움되는 인간이...
 
아니야. 잘 생각해야 해.
테레사 수녀도 있잖아? 마틴루터킹도 있고. 방정환 선생이라던지 그래... 세상은 아름답다고!
 
 
"상자를 까는 것은 우리가 정해준다. 상자를 여는 건 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중력에 따라 움직이게 되는 시점이다. 네가 상자를 열 지 말지 결정만 한다면 우리는 바로 실행할 것이다.
하지만 알아둬라. 네가 상자를 열지 않겠다고 하면 우리는 이곳을 그대로 둔 채 태양계를 떠난다.
지구의 수치로 반경 일키로미터가 이 상태이다. 바깥고리는 매우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으며
이곳은 지구의 관광명소가 될 것이다. 다리가 아플테지. 고통은 심해지고 마침내는 힘들어질 것이다.
허리는 아프고 머리는 띵한데 잠들 수가 없다. 너와 네 주변 인간들은 그 상태로 우주가 멸망할 때까지
지내야 한다."
 
 
그건 곧 상자를 열라는 이야기잖아.
이건 선택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그냥 협박인데, 차라리 협박이라고 하라고.
 
 
 
 
 
 
 
 
 
 
 
 
"이런것을 지구에서는 제안이라고 한다지."
 
 
 
 
 
저 씨발놈이!
 
 
 
 
 
 
 
 
 
 
 
 
 
 
 
 
 
 
 
 
 
 
 
 
 
 
 
 
 
 
그로부터 마침내 두시간이 더 지났다.
나는 이제 선택을 해야 했다. 몸이 불편한 것은 도무지 문제가 되질 않는데,
이는 상자를 건네줄 때에 그것을 받지 않으려던 내 모습을 보곤 화를 내던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기 때문이다. 이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지만 눈이 충혈되고 있다.
 
내가 빨리 결정해주길 바라는 것 같다.
뭐랄까 빨리 근무 끝내고 돌아가고싶은 4번초의 마음이 느껴진다.
하긴 쟤들도 대가리가 있는 생명체라면 당연히 귀찮음이라는게 존재할 것이다.
이정도 기술력과 마인드컨트롤 능력을 가진 외계인이라면 최소한 지구인보다는 성숙한
의식을 가졌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고, 이런 느낌으로 상당히
나의 결정을 기다리는 것을 귀찮게 여기고 있다.
 
길게 생각해보려고 해도 선택은 하나다.
나는 상자를 까야 한다. 마침내 이의 화가 폭발하여 그냥 돌아가 버린다면 80년 뒤 쯤에
그때 오바질 하지 말고 상자를 열어야 했어 라고 회한을 느끼고 싶지는 않다.
 
나는 용기를 내어 이에게 말을 했다.
 
 
"상자. 열게..."
 
 
이는 다시 온화하게 허여멀건 해져서,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리고 나에게 말했다.
 
 
"잘 생각했다. 이제 네 몸은 자유로워졌다. 네가 상자를 까면 곧 나머지 사람들도 자유로워 질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대화를 잊은 채로 살아간다. 옳은 결정이었다. 우린 간다."
 
 
 
 
갑자기 뭔가 확 하고 바람이 불어왔다.
주변은 다시 웅성웅성 평소의 시내로 돌아와 있다.
 
나는 이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평생가도 누구 하나 겪어보지 못할 그 경험이 경이롭다기 보다는,
다시는 그런 경험을 하고 싶지 않다.
이가 다시 오기전에 나는 얼른 상자를 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 사이에 간판으로 여자친구의 머리를 세차게 내리찍는 광기어린 남자의 모습과
흐릿해져가는 의식 사이로 하늘에 십자수를 놓으며 날아다니는 미사일 궤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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