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어떤 디지털 전문 기자가 메신저로 말했다. “요즘 월정액 내고 150곡 다운로드 받는데 음악 고르는데 시간도 아깝고 귀찮아요. 누군가 좋은 곡이라도 추천해주고 들려주면 좋겠네요. 어떤 사람이 선호하는 음악을 자동으로 추천해 주는거죠.” 그래서 내가 말했다.
“그게 FM 라디오인데요.”
기술이 발달하면 사용자 자율도가 늘어나는데 이 자율도라는 것은 창조적이지만 그만큼 귀찮음도 수반된다. 그래서 불교의 대표적 인물 한용운 선생님은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만 나는 복종을 좋아합니다"라고 말했는지도 모른다.
IPTV는 혁신적이지만 자신이 원하는 프로그램을 찾다 보면 그냥 케이블 TV를 보는게 더 편리하다는 생각이 든다. 스마트폰은 여러 가지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할 수 있지만 전화기에 너무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는 없다. 집에서 ‘쿡’ 하라고 누군가 얘기하지만 사실 집에선 그냥 쉬고 싶다.
제품에 대한 너무 많은 옵션과 너무 다양한 자율도는 사용자를 오히려 혼란스럽게 한다. 마치 생전 처음 베스킨라빈스의 31가지 아이스크림을 골라야 하는 시골 어르신 같은 느낌이랄까.
사실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하는 기술들은 그 기술의 혁신성도 중요하지만 그 기술이 얼마나 사용자를 나태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지도 중요하다고 본다.
카셋트를 갈아 끼우지 않아도 되는 MP3 플레이어, 필름을 갈아 끼우고 현상을 하지 않아도 되는 디지털 카메라, 공중전화로 달려가지 않아도 되는 휴대폰, 직접 찾아가지 않아도 어느 정도 정보를 찾을 수 있는 인터넷.
그런데 이런 ‘나태성에 대한 선호’는 한국인이 유달리 강하다. 개인적인 분석을 하자면 한국에서 일정한 IT 기술이 빨리 꽃피운 것은 그만큼 한국인이 피로하기 때문이다.
엄청난 양의 학습과 야간 자율학습으로 지친 학생, 술이나 과제에 지친 대학생, 그리고 야근과 회식에 지친 직장인은 자신을 조금 더 편하게 만들고 시간을 줄여줄 IT 기술에 열광했고 빨리 적응했다. 하지만 그 반대급부로써 제품의 확장된 활용성은 해외보다는 확실히 떨어진다.
구글보다는 보기 좋게 편집한 네이버나 다음을 선호한다. 자율도가 높은 스마트폰보다는 기본 위젯이 다양한 풀터치폰을 선호한다. 자동차도 돈을 좀 더 들이더라도 수동보다는 오토를 더 선호한다. 한국인은 하이파이 오디오를 거의 구입하지 않는다. 시간을 내서 음악을 들을만큼 녹녹한 인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북 시장도 아직은 요원하다. 2년간 도서 구입비가 킨들이나 누트의 구입비보다 훨씬 적기 때문이다. DVD 겸용이었던 플레이스테이션2를 제외한 가정용 게임기가 그다지 히트하지 못하는 이유도 가정 중심의 생활습관이 적기 때문이 아닐까?
또 하나의 다른 요소도 있다.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한 한국인들은 자투리 시간의 간극을 그나마 효율적으로 메울 제품을 선호한다. 지하철이나 대중교통 이용 시에 사용할 수 있는 PMP나 MP3 플레이어, 휴대용 게임기, DMB 같은 것이다.
어쨌든 이런 이유로 인해 한국에서 성공할 기술의 실체는 좀 더 명확해진다. 제품 자체에 시간을 할애해서 다양하고 폭넓게 이용할 수 있는 제품은 작은 성공밖에는 가지지 못할 것이다. 한국인들이 원하는 것은 별로 노력하지 않아도 밖에서도 간편하게 이용할 수 있고 기존 제품에 비해 시간을 아껴주는 제품일 것이다.
이런 국내 시장 상황이 안타까운 기업이 있다면 먼저 자신들 직장의 근무시간부터 체크해보자. 그리고 과감하게 5시에 퇴근시켜보자. 31가지 옵션을 고를 수 있는 당신 회사의 제품은 조금씩 히트하기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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