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절개 당일에 글썼던 일본 거주 산모입니다.
예정일을 열흘 넘기고 태어난 아기 덕분에 한국나이로 마흔에 출산을 하게 되었던…
초음파 추정으로 4키로가 넘을 것 같다며 의사 선생님이 제왕절개를 권하셨던…
그래서 3주 전에 제왕절개 수술을 받았던…
수술은 아주 잘 끝났고, 몸도 많이 회복되었고, 먹으면 자고 일어나면 먹고를 반복하는 아기와 한국에서 손녀딸 보러오신 친정엄마 덕에 시간이 있어서수술 후기를 씁니다.
수술 과정을 되돌아보면, 예정일 초과+태아 크기 때문에 갑작스럽긴 해도 일정을 정해서 실시하게 된 제왕절개라 모든 것은 물 흘러가듯 흘러갔고, 저는 그 물길 위에서 생각도 의지도 없이 물 가는 대로 떠다니는 낙엽같은 존재였습니다.
1. 수술 20시간 전, 금식 시작
2. 수술 10시간 전, 물도 못마시기 시작
3. 수술 30분 전, 수술실 입장. 척추마취 시작
마취샘 설명에 의하면, “척추마취는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얇은 바늘이 들어감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공포심 때문에 더 아프게 느낀다”고 했는데, 정말 그런 듯.
4. 수술 시작.
하이리스크 산모라 임산부검진부터 종합병원에 다녔는데, 수술을 받게되니 종합병원 다니길 잘했다 싶었습니다.
마취 담당의사, 수술 담당 의사, 수술 부담당 의사, 많은 간호사들과 견학온 학생들(-_-)까지 일사분란하게 촥촥촥 움직이는 게 누워있으면서도 완전 믿음직스럽습니다.
5. 수술대를 비추는 조명에 내 배가 살짝 반사되는 것을 발견.
정확히는 안보여도 아주 대략적으로 상황은 예상가능. 아랫배를 자르고, 벌리고, 자궁을 다시 자르는 과정은 일사천리입니다.
6. 담당의사샘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림. “헉… 아기가 너무 커!!”
의사샘이 자궁을 조금 더 절개합니다.
7. 담당의사샘의 당황한 목소리가 또 들림. “헉… 그래도 못나와! 머리가 너무 커!!”
뒤이어 간호사샘들의 “헤에~~?” 소리가 울려퍼집니다.
옆에서 보고있던 부담당의사샘이 “할 수 없지, 좀 더 자르는 수 밖에”라고 말합니다.
의사샘이 또다시 자궁을 추가로 절개합니다.
8. 담당의사샘의 “이영차!!”하는 기합소리와 함께 아기가 세상밖으로 나옴.
자궁에서 나오자마자 아주 우렁찬 목소리로 울고, 테이블 같은 곳으로 옮기자마자 떵오줌을 싸기 시작합니다.
9. 아기를 본 첫 느낌, “크다!!!”
신생아하면 떠오르는 빨갛고 작은 아기가 아니라 뭐랄까… 우람하고 묵직하고 근엄한?
저걸 뱃속에 넣고 다닌 나 자신이 참 대견하게 느껴집니다.
간호사샘들의 분주한 손놀림덕에 멀끔해진 아기에게 “괜찮아~~ 수고했어”라고 말했습니다.
10. 수술 마무리하는 시간 동안 전신마취, 순식간에 골아떨어짐.
11. 수술 마무리 끝난 후, 전신마취에서 깨자마자 아기 체중 확인. 4.47kg.
그 말을 듣자마자 코스트코에서 큰 박스로 구입해둔 신생아용 기저귀가 5kg까지라는 게 떠오릅니다.
그걸 간호사샘에게 하소연한 것은 왜때문이었을까요...-_-;; 부끄럽다...
12. 수술 개시 2시간 후, 병실 입실
함께 들어온 남편이 아기가 엄청 크다고 사진을 보여줍니다. 나도 봤어...
13. 입실후 즉시, 누워있는 상태에서 수유시작.
얼굴에는 산소호흡기, 왼쪽팔에는 링겔, 가슴에는 심전도기, 양 다리에는 부종을 덜어주기 위한 에어마사지기, 오른쪽팔에는 혈압기 등등, 제 온 몸에는 각종 줄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는 상태입니다.
놀랍게도 그 때부터 2~3시간 간격으로 간호사샘들이 아기를 데려와서 제 젖을 물리기 시작합니다.
저는 모유에 대한 고집이나 신념따윈 없습니다. 하지만 담당 간호사샘에게는 있었나봅니다.
아기를 안기는커녕 목도 못돌리는 저의 환자복을 열어젖히고 아기입을 젖꼭지에 갖다 대고 물립니다.
14. 수술 후 반나절 지난 무렵, 방구 낌.
끼얏호!! 나 죽 먹을 수 있다!!
15. 수술 다음날 오전, 링겔, 혈압기, 소변 줄 뺌.
16. 수술 다음날 오후, 본격적으로 수유시작.
스스로 앉아있을 수 있게 되자, 간호사들이 2~3시간마다 아기를 데려와서 젖을 물리라며 아기를 제게 안기고 가버립니다.
어제 오후에 배째고 수술받았는데, 오늘 나는 아기를 안고 나오지도 않는 젖을 주려고 애쓰고 있자니 삶이란 무엇인가 싶습니다.
17. 수술 24시간 후, 처음으로 걸어서 화장실 감.
많은 후기에서 이 때 엄청 아프다고 했는데 전 의외로 참을만하다 싶습니다.
이 “의외로 참을만하다”라는 느낌이 퇴원할 때까지 모든 과정에서 반복됩니다.
수술직후부터 무통주사는 없었고, 진통제는 좌약식으로 투약했습니다.
6시간 이상 간격을 두고 맞아야 하는 약인데, 하루에 한두번만 맞아도 그럭저럭 참을만했어요.
오히려 간호사샘들이 "진통제 필요없어요?"하고 물으실 정도였습니다.
제왕절개 체질인가... 참 쓸데없는 능력이 또 하나 발견되었구나...
18. 수술 40시간 후, 모자동실 시작.
전전날 배째고 수술받았는데, 이제 아기와 한 방에서 쭉 같이 있는 생활이 시작됩니다.
아직 모유가 전혀 나오지 않는 상황이라, 결국 2~3시간마다 일단 방에서 젖을 물렸다가, 신생아실(=수유실)에 가서 분유를 먹입니다.
(*저는 아기가 워낙 커서 분유를 안먹이면 탈수/저혈당 위험이 있어서 첨부터 분유 썼습니다. 현재도 모유+분유 혼합중)
회복중인 상태라 힘들긴 했지만, 그 덕분에 집에 돌아왔을 때 빠르게 현실에 적응할 수 있었어요.
19. 수술 4일 후, 배를 봉합했던 철심을 빼고 첫 샤워.
20. 수술 9일 후, 퇴원.
제왕절개 수술과 회복과정을 총평하자면, "걱정했던 것에 비해 훨씬 수월했다"입니다.
수술과정은 경쾌했고 회복은 순조로왔으며 통증은 예상에 비해 적었거든요. 훗배앓이도 없었어요.
출산 3주가 지난 지금, 아직 원래 컨디션까지 돌아오진 못했지만 짧은 외출 정도는 무리가 없을 정도로 회복이 되었습니다.
딸 산후조리 도와주신다고 한국에서 오신 친정엄마가 “니가 너무 멀쩡하니 내가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하다”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아기 젖주기 이외의 모든 것을 엄마께 맡겼습니다. 디스 이즈 엄마 찬스...
덕분에 저는 병원에 있을 때보다 지금 더 잘먹고 잘자고 있습니다. 엄마... 가지마... ㅠ.ㅠ
저는 제왕절개로 인한 아픔이나 회복보다 모유수유와 그로 인한 변비/치질이 더 힘든 것 같아요...
모유수유가 이렇게 아플수도 있다는 걸 난 왜 몰랐을까... 왜 나에겐 일어나지 않을거라 생각했을까...
젖꼭지에 혓바늘이 돋은 것 같은 느낌... 젖꼭지를 새로 산 때수건으로 박박 밀어버린 느낌...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수유 경험도 글 쓰고 싶네요.
처음으로 본 흰 모유 한 방울의 경이로움과 잘못된 수유방식으로 인한 고통, 그 과정에서 배운 것들을 잊어버리기 전에요.
혹시 제왕절개를 앞두시고 초조함과 불안함을 느끼시는 분이 계시다면, 저처럼 가뿐하게 수술을 받은 사람도 있으니 걱정마시라고 전하고 싶습니다.
제왕절개에도 순산이 있다면 제가 그 예가 되겠죠. 순산의 기운 받아가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