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사회, 특히 영국의 근대화(近代化)를 보면 근대-자본주의와 식민지적 근대-자본주의의 차이가 명확히 드러난다. 자본주의 발전과 그 궤를 같이 한 근대화가 태동할 무렵 젠트리 계층은 청교도 혁명과 명예혁명을 주도한다. 그 결과 젠트리 계층은 경제력뿐만이 아니라 정치적 권력 또한 획책하게 된다. 정치적 권력을 쥐게 된 젠트리 계층은 자본가 계급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정치권력이 자국 자본가를 위한 정책을 펼쳤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곡물법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는 근대-자본주의 발전의 전범(典範)이다. 국가는 자국 자본을 위해 정책을 펼치고 그 속에서 자본가들이 성장하는 것이다. 영국뿐만이 아니라 미국 등 자본주의 선진국들 대부분이 초기 자본주의 단계에서 보호무역 정책을 취했다. 자국 자본가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요컨대 근대-자본주의 발전에 있어 자본가 계급(資本主義)뿐만이 아니라 이들을 정책적으로 지원한 근대 민주정부의 탄생(近代主義) 또한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허나 이를 간과한 채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이 ‘근대화’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그저 일제가 조선에 자본주의 시스템을 이식했다는 사실에만 천착(穿鑿)한다. 천착까지도 사실 괜찮다. 진짜 문제는 그들이 자본주의 시스템 이식을 ‘근대화’와 혼동한다는 것이다. 안타까울 따름이다. 근대화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주권 국가를 기반으로한 근대화는 자국 국민들에 이익이 돌아가는, 진짜 자본주의의 발전을 수반한다. 허나 식민지적 근대화는 효율적인 수탈을 위한 자본주의 발전만을 남길 뿐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수많은 공장이 세워졌다하지만 정작 해방 후 조선인 기술자들이 없어 가동을 멈춘 곳이 있을 정도니 누구를 위한 자본주의였는지 쉬이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영국의 예는 유럽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이상적 근대화의 예다. 허나 조선 사회에서도 존재했던 상인 계층과 조정 사이의 결탁을 살펴보면 우리도 모종의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을 거라 확신할 수 있다. 그것이 꼭 서구 사회의 개념인 ‘근대화’가 아니라 할지라도 말이다. 이러한 근대화의 양면성에도 불구하고 최근 한국 사회에서는 식민사관(植民史觀)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그 중심에는 이영훈, 안병직 등이 주축이 된 뉴라이트가 있다. 이들의 주장은 프란시스 후쿠야마 등의 ‘역사의 종언’ 바람을 타고 등장한 ‘자본주의 만능론’, 김영삼 정부부터 시작된 세계화의 바람을 타고 등장한 ‘탈(脫) 민족주의’의 힘을 입어 주목받게 된다. 사실 이들의 주장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초등수신」의 주장과 비슷할 정도니 말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주장을 ‘일제강점기의 근대화를 무시하는 사학계 내부의 양심적 주장’ 정도로 인식하는 사람까지 있는 지경이다. 이들의 주장이 일반인들에게 설득력을 얻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일제강점기에서 박정희 독재정권에까지 이어지는 ‘근대화 강박증’ 논의로 이어진다.
우리의 문화를 스스로 발전시키는 와중에 등장한 일제는 우리가 스스로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갔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자주적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을 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하고, 동시에 근대화에 대한 알 수 없는 갈증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마치 어렸을 적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피해의식을 가진 성인이 애정결핍 증세를 보이는 것과 유사하다.
물론 우리 스스로 근대화를 이룩했을 거라는 자본주의 맹아론은 여러 한계를 지니고 있다. 허나 비단 서구식 근대화가 아니더라도 우리도 나름의 발전 수순을 밟는 와중이었으며, 오히려 서구의 그것보다 우리에게 더 맞는 발전 수순이었을 수 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서구의 근대화 개념 자체가 일종의 허상이기 때문이다. ‘자유’와 ‘평등’으로 무장한 근대주의는 정말 기층민들에게 이를 선사했는가? 서두에서 언급한 젠트리 계층의 시민혁명 이후에도 노동자와 여성들은 투표권조차 갖지 못했다. 우리는 근대화의 허상에서 빠져나와 식민지상을 다시 한 번 정립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