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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차대전기 사이의 발칸국가들 3 불가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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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역둔토
추천 : 6
조회수 : 838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15/10/04 22:5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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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istory&no=20246&s_no=20246&kind=search&search_table_name=history&page=1&keyfield=name&keyword=%EC%97%AD%EB%91%94%ED%86%A0
1. 루마니아편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istory&no=20545&s_no=20545&kind=search&search_table_name=history&page=1&keyfield=name&keyword=%EC%97%AD%EB%91%94%ED%86%A0
2. 알바니아편
 
책정리하다가 간만에 써서 올립니다. 저글의 역둔토가 탈퇴로 뜨는건 올해 5월에 오유 탈퇴절차가
궁금해서 진행해보다보니 어느새 진짜 탈퇴가 되어서 ㅜㅠㅠ
 
939px-Naval_Ensign_of_Bulgaria_(1878-1944)_svg.png
Flag_of_Bulgaria_svg.png

 
 
1.간략한 불가리아 독립사
 
불가리아가 터키에 굴복한 이래로 수도인 이스탄불과의 접근성 때문에 많은 무슬림들이
불가리아 지역에 거주하게 되었으며 중앙군이 쉽게 다다를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불가리아인의 반란은
매우 쉽게 진압되었고 지리적 한계로 서-중부유럽의 국가들과의 직접적 접촉을 가지는 것이 어려웠다.
 
이런 터키의 정치적 지배 이외에도 불가리아는 터키에게 협력하고 있던 그리스인들과도 경쟁해야 했다.
그리스인들은 터키의 술탄의 칙령아래에서 발칸반도 내에서 정교회, 관리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발칸반도 민족들의 민족성 수호의 1등공신인, 불가리아 정교회의 통일과 보호를 위해 투쟁해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19세기 초반에는 불가리아인들의 저항은 산간지역에서의 약간의 게릴라 정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는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는 불가리아 하층민들의 증오를 받는 것은 터키 지배자 보다는 고리대금업,
지주, 세리로 일하는 상류 "동포"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류층은 그들의 권력기반이 터키에게 달려 있었기
때문에 혁명적인 방법에는 반대하는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불가리아인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농민들은 이런 정치적 격변에 대해 무관심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에 불가리아 북서부에서 치플리크제도가 확산됨에 따라 예외적으로 보수적인 농민들 사이에서 반터키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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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플리크제도★☆★☆
오스만 제국 쇠퇴의 가장 큰 내적 변화는 티마르, 즉 봉토 소유제(Timar, fief)가 더욱더 부담이 가중되는
사적 토지 소유제(치플리크, Chifliks)로 바뀐 것이다. 종전의 티마르를 소유한 봉신들, 즉 스파히들은
엄격한 정부의 통제를 받았으나, 중앙 정부의 권력이 약해지자 새 치플리크들은 토지를 자유로운
세습적 재산으로 만들면서 정교도 농민(raya)들을 마음대로 착취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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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정부는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치플리크 토지를 농민에게 분배한다는 칙령을 1851년 1월에 발표했지만
지주층의 반발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농촌에서의 불만과 소요가 이어졌고 이것이 불가리아 독립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여기에 교사, 작가, 수공업자, 상인들이 참여함으로써 불가리아 독립운동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Hercegovci_u_zasedi.gif
1834년부터 1841년 사이에 농민반란이 격화되었고 1850년대에 이르러서는 빈번히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루마니아, 그리스, 세르비아 등 발칸 민족들의 이기적인 태도와 열강들의 방관 속에서 봉기는
실패로 돌아갔다.1866, 1867, 1876년에 불가리아인은 재차 봉기하였으나 터키의 강경한 진압으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1876년 4월, 이른바 4월 봉기에서 터키군이 의한 불가리아인의 학살이 일어나자 약화된 터키에 개입할 명분을 노리고 있던 열강(특히 러시아)의 어그로를 끌었다.
 
 
800px-Konstantin_Makovsky_-_The_Bulgarian_martyresses.jpg
 
4월 봉기를 그린 그림
 
April_Uprising.png


1877년 5월, 러시아군과 루마니아군이 불가리아로 진격하여 러시아-터키 전쟁이 발발하였고 
불가리아 의용군과 함께 터키군을 격파하였다.터키가 굴복함에따라 1878년 3월 3일 산스테파노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러시아의 독립보장하에 불가리아가 탄생하는 듯 싶었다.
 
Bulgaria-SanStefano_-(1878)-byTodorBozhinov.png
 
산스테파노 조약에 의한 불가리아 영토는 발칸의 중앙부를 장악하여 불가리아 제 3제국이라 일컬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으나발칸반도에서의 러시아의 영향력이 증대되는 것을 원하지 않던 열강의 개입에 의하여
산스테파노 조약이 부정되고 베를린 조약이 체결되었다.
 
1024px-Bulgaria_San_Stefano_Berlin_1878_TB.png
베를린 조약에 의하야 불가리아는 마케도니아와 남부 불가리아를 포기하고 터키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자치공국으로 격하되었다.  독립 직후부터 산스테파노 조약으로 얻을 수 있었던 마케도니아 지방에 대한
불가리아의 강렬한 열망은 그리스, 세르비아 같은 이웃국가들과의 갈등을 불러 일으 킬 수 밖에 없었다. 
1885년 9월 위 지도의 동루멜리아가 터키에 반란을 일으켜 불가리아 공국과의 합병을 선언하였고 1908년
불가리아왕국이 선포되었다. 이 와중에 러시아의 간섭으로 부터 벗어나려는 불가리아를 견제하려던
러시아에 부추김을 받은 세르비아가 불가리아를 도발하였으나, 불가리아가 세르비아를 제압함으로써
불가리아의 루멜리아 병합이 기정사실화 되었다. 그러나 독립직후부터 반러시아 자주정책, 친 서유럽 정책을
밀어 붙이던 알렉산더 대공이 친러파의 쿠데타에 의해 퇴위하자 불가리아인들은 영국, 벨기에, 포르투갈의
왕을 배출한 작센-코브르크-고타 가문의 페르니난드 1세를 옹립하였다.
425px-Ferdinand_of_Bulgaria_2.jpg불가리아의 페르니난드 1세,
                                                                                     루마니아에도 동명의 왕이 있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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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는 1차대전에서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터키와 함께 동맹국으로 참전했고 패전국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Map_of_Bulgaria_after_Treaty_of_Neuilly-sur-Seinе-en_svg.png
 
뇌이조약으로 남부 트라키아를 그리스에게 새로 성립된 세르비아 주도의 유고슬라비아 왕국에게 국경영토를 할양하였습니다.
또한 과중한 배상금이 할당되었습니다.
 
 
2. 양대전 사이의 불가리아
 
 
1차 세게대전 참전은 불가리아에게 경제적으로 많은 피해를 주었다. 이런 피해는 국민의 불만을 고조시켰으며
러시아의 10월 혁명은 불가리아의 노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불가리아 사회당은 각종 선전물을
출판하여 혁명사상을 퍼트렸다. 그리하여 1918년 봄, 병사 소비에트가 이끄는 반란이 일어났다. 병사, 장교,
사회주의자, 농민당 급진파 등이 참가하였고 사회당의 선동 아래 전선에서 탈영병이 속출하였다.
또한 노동자들이 반전 운동에 가담하였고 농촌과 도시에서 전쟁으로 말미암은 생필품 가격상승과 부족현상에
항의하는 시위가 잇달았다.
 
이런 상황속에서 1918년 6월, 민주적 급진파가 주도한 신 정부가 수립되었다. 새로운 정부가 친협상국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믿은 불가리아 민중은 1914년 이래로 지속된 전쟁이 끝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신 정부가 전쟁을 지속한다는 결정을 발표하자 전선에서 군인들의 봉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혼란 속에서 영국군, 그리스군, 세르비아군 등 협상국이 불가리아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밀려 들어오자
더욱 가열되었다. 9월에 지하 병사 소비에트가 결성되어 최고사령부를 점거하여 장교단을 체포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이런 반란의 물결이 수도 소피아에 입수되자 신 정부는 협상국에 휴전을 요청하였다. 반란군은 농민당의
스탐불리스키를 내세워 9월 27일 불가리아 공화국을 선포하였으나 사회당이 농민당과 연합하는 것을
거절함으로써 공화국 건설은 실패하였다. 신 정부는 이런 반란 소식이 들린 이틀후인 9월 29일 협상국에
무조건 항복하였다. 협상국은 급진적인 공화국이 건설될 시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이 불가리아까지 미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불가리아에 군주제가 유지될 것을 원하였다. 전쟁의 책임을 지고 페르니난드가
퇴위하고 보리스 3세가 왕위에 올랐다.
 
borisbulg.jpg불가리아의 보리스 3세
 
 패전후의 극심한 혼란 속에서 1919년 8월에 실시된 총선거에서 농민당과 공산당이 승리하였고
농민당 주도하의 내각이 구성되었다.이 새로운 내각은 협상국과 유리한 조약을 체결하는 것을 선두과제로
삼았으나 1919년 9월 불가리아의 참석 없이 협상국이 강요한 뇌이조약에 조인하게 되었다.  특히 배상금은
후진적인 불가리아의 산업구조상 결코 갚을 수 없는 액수 였기 때문에 불가리아인은 협상국측 서방국가에
대해 강렬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농민당 정권의 가장 큰 적은 군주와 부르주아지 정당 보다는
공산당이었다. 공산당은 1919년 12월에 철도, 수송 노동자 파업을 지도하여 농민당 정부에 도전하였고
이러한 농민당-공산당 대립은 양차대전 사이의 전 기간에 걸쳐 나타났으며, 이러한 갈등은 두 개혁정당의
약화를 초래하였다.
 
농민당은 이에 1920년 의회를 해산하고 5월 재선거를 열었다. 총 229석 중 농민당이 109석, 공산당 50석을 얻어
양 정당이 다시 승리하였다. 농민당은 다시 정부를 조직하여 개혁을 실시하여 부르주아의 착취를 제한하며,
소생산자의 지위를 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전쟁 중, 군수물자 생산을 위하여 자본이 집중되었고
이것은 전후에 더욱 심화되었다. 동시에 경제 복구를 위해 서방으로부터 들여온 외채와 자본때문에 많은 기업이
외국에 종속적이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농민당의 개혁에는 분명한 한계가 존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농민당 정권의 토지개혁법이나 대부동산 몰수법등의 급진적인 개혁 조치는 다수 국민들에게 매우 큰
지지를 받았다. 30ha이상의 모든 사유지는 국가에 몰수되어 다시 농민에게 재분배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급진적 개혁과는 별개로 지속적으로 갈등을 겪던 공산당의 활동을 억압하고 노동자 운동을 탄압하는
이중적인 면모를 보였다.
 
이런 개혁조치로 농민당이 국민으로부터 큰 환영을 받게 되자 야당은 선거로는 정권을 탈취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고 군부와 IMRO 조직이 이에 가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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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RO : 마케도니아 혁명조직, 불가리아계 마케도니아인들이 조직한 조직으로 반유고슬라비아를 주장하며 불가리아와의 합병을
주장한 우익 민족주의 테러 단체, 마케도니아를 둘러싼 유고와 불가리아의 갈등을 부추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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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정당들이 민족자유당으로 합당하고 인민당과 급진 자유당이 민족 급진당으로 합당하여 부르주아  
정당인 민주당과 결탁하여 쿠테타를 지지하였다. 또, 군부의 반동장교들이 군부내 조직을 만들어 비밀스러운
파시스트 극우 조직을 되었다.
 
농민당이 이렇게 고립되고 있는 와중, 농민당이 유일하게 기댈 수 있던 공산당과 사회당은 치명적인 오판을
함으로써 쿠테타를 실질적으로 돕고 말았다. 이 두 정당은 농민당 전복 이후 혼란기에 이득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하에 농민당의 고립을 외면하였고 부르주아지와 구 지주층을 중심으로한 쿠데타가
1923년 6월 9일 일어났다. 보리스왕의 승인 아래 군부와 파시스트 조직이 봉기했고 대부분의 농민당 각료들이
체포되었다. 이 쿠테타에 반발하는 무장 봉기가 곳곳에서 일어났으나 진압되었다.
농민당의 지도자이자 정권의 수상이었던 스탐불리스키는 저항군과 같이 싸우다가 테러리스트에게 살해당했다.
Al_stamboliiski.jpg스탐불리스키, 불가리아의 농민당 지도자
 
 
쿠데타 성공 이후 집권한 챤코프 정부는 곧바로 공산당과 노동 조합을 공격하였다. 부르주아와 지주층의 안
정적인 집권을 위해서 이들을 제거하였다. 농민당 역시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농민당이 도입한 각종 사회적
제도가 폐지되었다. 8시간 노동제는 폐지되었고 임금 인하가 실시되었다. 대지주들은 몰수되었던 토지를
되찾았다. 이런 반동적인 정책으로 챤코프 정부에 반하는 노동자, 농민 투쟁이 지속되었다.
 
쿠데타 이후 이웃 국가들과의 관계 또한 악화되었다. 평화와 공존을 추구하던 농민당 정권에 비하여
챤코프 정권은 IMRO와 연대하고 있었고 국수주의-민족주의적 파시스트들과 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으로 잃었던 영토를 회복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지니게 되었다. 이는 그리스,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와의 갈등을 낳게 되었다.
 
약 2만명의 불가리아인이 살해당하고 노동자, 농민의 봉기가 진압되었다. 진압된 이후 챤코프 정부는
언론,출판,집회의 자유를 폐지하고 노동시위, 파업을 불법화했으며 노동임금과 농산물 가격을 제한했다.
이런 와중에 1929년 불가리아를 덮친 대공황의 여파로 외자가 빠져나가고 곡가가 대폭 하락하자 농민들의
소요와 불안은 점차 가중되었다.
 
1931년 선거에서 민족엽합이 승리하였고 민족엽합정권은 노동자 농민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쿠데타 이후의 정책 일부를 수정하려 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달라진 것은 거의 없었고 무능력하고
부패한 내각의 수수방관에 힘입어 기아, 고물가, 질병이 불가리아를 강타했다.
불가리아 전체가 고통속에서 신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금융가, 기업가, 지추, 관료들은 여전히
막대한 이득을 보고 있었다
 
이런 혼란속에서 일부 군인들과 파시스트 조직들은 두번째 쿠데타를 계획하였다. 1934년 5월 19일,
쿠데타가 일어나 국왕을 압박하여 조르제프 정권이 성립되었다. 독재적인 새 정권은 의회를 해산하고
 다른 정당들을 해산시켰으며 언론에 검열제를 실시하였다.  지방자치권을 회수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함과
동시에 학교를 국가의 통제하에 두고 금융을 국가 주도형으로 재조직하였다. 그러나 조르제프 정권의 기반이
매우 취약하였고 국왕과 왕당파 자본가, 지주는 다시금 군부와 결탁하여 주도권을 가져오게 되었다.
쿠데타 이후 조르제프 정권이 분열과 혼란을 거듭하는 동안 국왕은 실질적인 권력을 획득하는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보리스 왕은 독일과 이탈리아와의 관계를 개선시키고 불가리아에 파시스트적 군주제를 선포하였다.
보리스 왕은 정당 정치를 허용하지 않았고 강력한 군주 독재권을 2차 세계대전 까지 유지하였다.
 
 
 
 
1차대전 패배로 불가리아의 경제는 크게 쇠퇴하였다. 특히 1차산업의 비중이 큰 불가리아에게 있어
곡창지대인 남 도브루자의 상실은 곡물 생산량의 8~20%를 잃게 하였고 그리스에게 빼앗긴 동트라이카의
풍부한 담배밭과 에게해로 나아가는 항구를 상실한 것이 주효했다.
Map_of_Bulgaria_after_Treaty_of_Neuilly-sur-Seinе-en_svg.png위쪽 원이 남 도브루자, 아래쪽이 동트라키아
 
전후 전쟁시기의 통화팽창으로 인한 인플레이션과 뇌이조약으로 지불해야할 배상금의 부담은 전후 불
가리아 경제에 큰 악영향을 끼쳤다. 또한 뇌이조약으로 상실된 영토에서 밀려들어온 20여만명의 피난민은
불가리아 경제 회복을 더디게 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다. 이들 대다수는 무산층 농업 노동자로
락하였고 경제적 희생양이 되었다.
 
불가리아는 토양이 경작에 불리한 산악과 토질이 좋지 못한 땅이 60%이었고 높은 출산율로 인구가 급증하자
농촌 가구당 소유 토지가  1차 대전 직전 6ha에서 1945년 4.3ha로 점점 줄어들었다. 이런 이유로 불가리아의
농민은 도시 소득의 약 30%정도에 불과했고 부족한 수입때문에 고리채의 악순환에 빠져들었다. 농업생산이
국가 총수입의 55%를 차지했음에도 농민의 처지는 매우 열악하였다.
 
산업화는 자본의 부족, 기술의 후진성, 숙련 노동자의 부족, 자원의 미개발 등으로 매우 지체되었다.
산업체의 절반이 직물 공업 부문이었고 그 외에는 소비재 부분, 비누,성냥,담배,가죽,고무 공장 뿐이었고
중공업이나 중간재 부분은 전혀 개발되지 않았다. 불가리아가 주로 수출하는 것은 곡물, 과일, 채소, 담배 류였고 수입하는 것은 기계류, 금속 자재, 화공 생산품, 기차 등 이었다. 이런 불균형한 무역구조 속에서 불가리아의
외국 의존 경제는 심화되었다.
 
불가리아 농민은 루마니아, 알바니아 농민들처럼 자급자족적이었다. 극히 적은 량의 공산품, 소금, 소다, 설탕
정도만 구입하고  그 외 대부분의 물건은 자급자족하고 있었다. 도시화와 산업화의 물결은 농촌 대부분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여 불가리아의 농촌에는 의료시설이 거의 갖추어 있지 않았다. 무지와 미신, 빈곤이
농촌을 뒤덮고 있었고 유아 사망률은 12,3%에 달했다.
 
교육수준 역시 낮아서 1934년 통게에 의하면 남성의 20.4%, 여성의 42.*%가 문맹자였다. 양 대전 간에는 초등교육만은 무상의무제로 실시되었으나 재정의 부족으로 학교 수와 교원 수가 부족하였고 교직원의 임금이 낮아 사기가 매우 저조하였다. 이런 불가리아 농민들은 전통적인 생활 습관과 농촌 생활을 버리려고 하지 않았으나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도시에 나갈 수 밖에 없었다.
 
 
가볍게 읽어주시고 주말 잘 마무리 하시길 바랍니다.
부족한 많은 글인데,  관심있는 부분 정리하면서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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