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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대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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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김휴먼
추천 : 4
조회수 : 2335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2/01/04 17:47:38
영국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I. 자연 환경 
II. 역사 
III. 정치 
IV. 경제 
V. 문화와 생활상 



I. 자연 환경 


1. 잉글랜드, 그레이트브리튼, 영국 연방 


영국의 정식   명칭은 `그레이트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이다. 통상 영국
으로 지칭되는 잉글랜드(England)는 그레이트브리튼(U.K. 또는 Britain이라
는 약어를 사용)의 일부 지역이며, 실제로 영국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
일스, 그리고 북아일랜드의 4개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영국 연방(코먼웰스:Commonwealth of Nations)은 영국을 중심으로 
과거 영국의 식민지 지배에서 독립한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인도, 케냐,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나이지리아, 가나  등으로 구성된 협력체를  말한다. 
영국 연방(코먼웰스)은 국제법상 강제성을  지닌 연합은 아니며,  경제적인 
이유 등을 포함한 우호 협력과 실리를 기초로 하는 자발적인  연합의 특징
을 지니고 있다. 이들 국가들은 정치 체제상 차이점이 있으나, 영어를 공용
어로 사용하고, 의회 제도 등 영국식 사회  제도 및 관습을 공유하고 있으
며, 국가의 원수는 아니더라도 연방의 수장이라는  의미로 영국 여왕을 대
하고 있는 점은 같다. 


2. 면적, 기후 


영국은 섬의 약 3분의 2를 차지하는 남쪽의 잉글랜드와 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북쪽의 스코틀랜드, 그리고  서쪽의 웨일스로 이루어져 있으
며, 얼스터라고도 불리는 북아일랜드는 아일랜드 섬의 북부에 위치해 있다. 
총면적은 24만 2500km2로서 한반도의 약 1.1배에 해당하며, 지역별로 면적
을 살펴보면   잉글랜드가 가장  넓어서  전 국토의   약 2분의  1쯤(13만 
440km2)되며 그 다음은  스코틀랜드(7만 8770km2),  웨일스(2만 760km2), 
북아일랜드(1만 4120km2)의 순서이다. 

영국의 기후는 일반적으로 여름에 선선하고 겨울에 따뜻한  해양성 기후를 
보이고 있으나 하루에도 몇 번씩 변덕스러운 날씨를 보여 예측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지역적으로 보면 영국의 북서부에서는 선선한 여름과 온화
한 겨울, 북동부에서는 선선한 여름과 추운 겨울, 남서부에서는  더운 여름
과 온화한 겨울, 남동부에서는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을 맞이하게 된다. 비
가 가장 많은 곳은  스코틀랜드 서해안으로 2000~4700mm에 이르고,  가장 
적은 곳은 잉글랜드 동부로 600~700mm가 내린다. 


 

II. 역사 


1. 고대 


중석기 시대 말까지 영국은  유럽 대륙과 이어져 있었고,  템즈 강은 라인 
강의 지류였다. B.C. 1만 1000년께 빙하기가 끝나면서 최초의 수렵인이 유
럽으로부터 건너오게 되었고, B.C. 6000~B.C. 5000년께 영국이  대륙으로부
터 분리되었다. 유럽의 서쪽이나 서북쪽 해안 지대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이 
B.C. 4000년 무렵 농업을 들여 왔고, 그 후 B.C. 2000년대 초  네덜란드 지
방과 라인 강 중류 지방에서  건너온 비커족의 문화가 나타나는데  아마도 
이들이 인도 유럽어를 들여 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은 상업이 크게 
발달했고, 중개 무역도 발달하였는데 이들의 번성한 문화는 호화스런 무덤
이나 스톤헨지(stonehenge)로 알려진 거석군의  신전을 보면 잘 알  수 있
다. 

B.C. 6세기~B.C. 4세기 사이에 켈트족이  잉글랜드와 아일랜드로 쳐들어왔
고, B.C. 2세기에 켈트족 고유의 문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B.C. 55~B.C. 54년에 로마의 케사르가 침략하여 템즈 강 일부 지역을 정복
하였고, 약 90년 후 로마는 본격적으로 영국의 침략에 착수했다. 43년 클라
우디우스 황제는 중남부 지역을 정복하여 로마의 속주로 삼았고, 도미티아
누스 황제는 북부 지역인 스코틀랜드와  서부 지역마저 정복하였다. 2세기 
초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북방 원주민의 침략을 막기 위해 하드리아누스 성
벽을 쌓았는데, 로마의 지배는 주로 성벽 이남에 국한되었다.  로마의 정복
으로 로마 문명이 영국에 전파되어, 도시가 세워지고, 농업의  생산 활동을 
자극하였다. 런던 지역에서는  도시가 형성되어  현재의 구런던 지역(금융 
중심가인 시티 지역)이 로마군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일부 유물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러나 유럽 대륙에서의 게르만 민족  대이동으로 로마 제국 자체의  붕괴 
위기에 따라 로마군이 철수하게 되고, 영국은  로마의 지배와 보호에서 벗
어나게 되었다. 


2. 앵글로색슨 시대 


앵글족, 색슨족, 주트족 등의 종족으로 이루어진 게르만족은 로마군이 떠난 
공백을 이용하여 5세기 중엽 대륙에서  영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처
음에 게르만족은 스코틀랜드의 픽트족과 아일랜드의 스코트족을 막아 달라
는 요청에 의해 영국에 이주해 왔으나, 이후 영국 남·동부 지방에서 반란
을 일으켜, 해안 지대와 강 유역에 정착하였고, 550년께에는 켈트족을 서쪽
의 콘월과 웨일스 지방까지 쫓아내고, 영국 대부분 지역을 점령하였다. 

6세기 말 영국의 북부와 동부를 앵글인이, 템즈 강 이남을  색슨인이, 켄트 
주를 주트인이 차지하고 웨식스, 노섬브리어, 머시아 등 7개의 왕국을 건설
하였다. 이후 9세기 초에 7왕국은 웨식스 왕국의 에그버트 왕에 의해 통일
되어 잉글랜드 왕국이  성립되었다(잉글랜드란 앵글인의 땅이라는  뜻에서 
나왔다). 



앵글로색슨족이 지배하던 시기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기독교로 개종
한 사실이다. 577년 그레고리 교황은  영국의 선교를 위해 아우구스티누스
를 파견하였고, 8세기 이후 영국 전  지역은 로마 카톨릭 교회에 귀속되었
고, 왕들은 로마 교회의 제도와 조직 등을 받아들였다. 

8세기 말부터 노르만(바이킹)의 데인족이 침입하여, 9세기 중엽  웨식스 지
배하의 동부 지역을 장악했고 이후 노섬브리어와 머시아의  대부분 지역을 
점령하였다. 871년 데인족은 웨식스를 공격했으나 오히려 웨식스의 앨프레
드(871~899)가 데인족을 웨식스 영토에서 몰아내고, 데인족이 점령했던  영
토를 되찾았다. 

그러나 10세기 말부터 데인족의 침입은 다시 시작되었고, 11세기에는 결국 
웨식스 왕 에셀레드 2세가 노르망디로  추방되며, 데인족의 스벤 1세(덴마
크의 왕)가 영국의 왕이 된다. 스벤 1세의 아들 카누트(크누드 1세)는 1016
년 영국 전 지역을 통치했고, 1018년  덴마크의 왕까지 겸했으며 1030년에
는 노르웨이마저 정복함으로써, 앵글로 스칸디나비아 연합 제국(북해 제국)
을 성립시켰다. 그러나 서로 이질적인 국민들과  바다로 격리된 제국을 한 
사람이 통치하기란 역부족이었기에, 카누트가 세상을  떠나자 연합 제국도 
분리되었다. 


3. 노르만족의 정복(1066~1154) 


1035년 카누트가 죽자 에셀레드의  아들 에드워드가 1042년  노르망디에서 
돌아와 왕위를 이어받아 앵글로색슨 왕가가  부활하였다. 그러나 에드워드
에 이어 해럴드 2세가 왕위에 오르자 노르망디  공국(911년 프랑스의 샤를 
3세가 노르만족의 침입에 대한 회유책으로 센느 강 하류  지역을 노르만족
에게 준 후 많은 노르만족이 이주하여  형성된 독립국. 윌리엄 1세가 영국
을 정복한 후 영국에 속했으나  1259년 프랑스 루이 9세 때부터  프랑스에 
편입됨)의 윌리엄은 에드워드가 이전에 자신에게  왕위 상속을 약속하였고 
해럴드 2세 역시 자신에게 신하가 될  것을 맹세하였기 때문에, 왕위 계승
을 주장하며 침입해 왔다. 윌리엄은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를 죽이고 
왕위에 올라 노르만 왕조를 시작하였다(노르만족의 정복). 

윌리엄 1세는 그후 반란을  진압하고, 몰수한 땅을  기사에게 나누어 주는 
노르만식 봉건 제도로 통치하였고, 중세 영국의  특징인 집권적 봉건 국가
의 기초를 다졌다. 자문회는 왕의 의견을 청취하고 승인할 뿐, 법률과 재판
은 왕이 직접 관장하였으며, 경제 체제도 마찬가지로 왕  중심이었고, 이것
은 윌리엄 1세의 아들 윌리엄 2세와 헨리 1세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헨리 1세 사후 조카 스티븐과 딸 마틸다 사이에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
분이 일어났는데, 1154년 마틸다와 프랑스 앙주가의 조프레(Geoffrey)의 아
들 헨리 2세(1154~1189)가 왕위에 오르고 앙주 왕조가 시작되었다. 헨리  2
세는 프랑스 루이 7세와 싸워  브르타뉴 등 프랑스 서부 지역을  장악하였
고, 아일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를  정복하여 영국의 국력을  신장시켰다. 
또 재정을 정비하고 순회 재판소를 확충하며 배심 제도를 도입, 교회 재판
권를 박탈하는 등 왕권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이후의 리처드 1세는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여 재위 기간중  단지 6
개월만 영국에 머물게 되었고, 리차드의 뒤를 이은 존 왕은 교황 이노센트
에게 대주교 선임 문제로 파문당하고 프랑스 내의 영국 영토를  거의 상실
하는 등 실정을 거듭했기 때문에, 귀족들은 1215년 존 왕에게 49개조로 된 
마그나 카르타(대헌장)을 서명하게 하고 왕권을 제한하였다. 

마그나 카르타는 봉건 제후의 권력  확보를 목적으로 한 것이지만  동시에 
시민의 재산을 보호하는 조항도 포함되어 있어 영국  자유주의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마그나 카르타 이후  13세기에 영국에서는 봉건적 통치로부터 
의회적 통치로 변모하면서 공동체라는 개념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헨리 3
세(1216~1272) 역시 실정으로 귀족들의 반감을 샀고, 귀족들은 시민 대표를 
포함한 회의를 열어 영국 의회의 기원을 열었다. 1295년에 소집된 모범 의
회는 오늘날 의회의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으며,  에드워드 3세(1327~1377) 
때 주와 도시의 대표가 왕에게 청원서를 내고 이를 귀족과  성직자가 심의
하는 관행이 생겨 상하 양원제의 기초가 만들어졌다. 


4. 100년 전쟁, 장미 전쟁 


1337년부터 영국은 프랑스와 100년 전쟁을  벌이게 된다. 1328년 프랑스의 
카페 왕조가 끝나고, 발루아가(家)의 필립 6세가 왕위에 즉위하였을 때, 영
국의 에드워드 3세는 카페 왕조와의 인척 관계임을 내세워 왕위 계승을 주
장하며 프랑스에 침입하였다. 그러나 전쟁의  실질적인 배경은 에드워드 2
세가 스코틀랜드와 대립했을 때 프랑스가  스코틀랜드를 지원했기 때문에, 
또 프랑스의 플랑드르 지방의 양모 시장을 둘러싼 양국의 이해  관계가 대
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 초기에는 영국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 한때 
프랑스령의 대부분을 점령하였으나 헨리 6세 때 오를레앙 전투에서 패배한 
후 대부분의 대륙령을 상실하고 끝났다. 

100년 전쟁이 끝나고 2년 후에  영국에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귀족들 
간에 전쟁이 일어났다. 에드워드 3세의 손자 랭커스터와 요크를 각각 지지
하는 귀족들 간에 30년 내전이 시작된  것이다. 요크가(家)의 문장(紋章)은 
백장미, 랭커스터가(家)의 문장은 빨간 장미였기 때문에 장미  전쟁이라 불
리는데, 요크가의 승리로 에드워드 4세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에드
워드 4세는 단명하고 그의 아들 에드워드 5세의 나이가 어린  것을 이용하
여 리차드가 에드워드 5세를 가두고 왕위에  오르나, 그 역시 튜더가의 헨
리에게 패하고 영국에는 튜더 왕조가 시작되었다. 


5.절대 왕정 


100년 전쟁과 장미 전쟁으로 귀족 세력이 쇠퇴하였다. 왕위에 오른 헨리 7
세는 귀족이 가신단을 거느리는 권리와 재판권을 박탈하였고  상인을 규제
하고 왕실 제정을 튼튼히 하는 등 절대주의 왕권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이어 헨리 8세는 이혼문제로 로마 교황과 갈등을 일으켜 1534년 로마 교황
과 결별을 선언하고 직접 교회의 수장이 되는 영국 국교회(성공회)를 설립
하였다. 그는 복종하지 않은 수도원을 해산시키고 토지를 몰수하였다. 

그러나 헨리 8세의 아들 에드워드 6세에 이어 메리(1553~1558)가 여왕으로 
즉위하자, 메리 여왕은 철저한 카톨릭 신봉자로서 교황과 화해하고 카톨릭
으로 돌아가 수장령을 폐지하고 영국 국교회의 많은 신도들을 화형시켰다. 
오늘날 칵테일의 일종인 블러디메리(Bloody Mary)는  여기서 이름이 유래
되었다. 

메리 여왕 이후 엘리자베스 1세는 두 종파의 갈등에서 오는 폐해를 극복하
기 위해 새로이 영국 국교회를 확립하였다.  가신단을 해체하고 빈민 대책
으로 구민법을 제정하는 등 국내 정책도  충실히 행했으며, 스페인의 무적 
함대를 격파하고 식민 사업을 추진했으며 중상주의 정책을 펼쳐 절대 왕정
을 확고히 했다. 


6. 스튜어트 왕조와 영국의 내란(1603~1660)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후손없이 죽자 인척인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스
튜어트가 제임스 1세로 영국 왕위에 올라  양국 왕실이 통합되었다(이때부
터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를 합쳐서 그레이트브리튼으로  부르게 되
었다). 

제임스 1세는 카톨릭과 엘리자베스 시대부터 성장해 온 칼뱅파 청교도들을 
탄압하며 왕은 법 위에 선다는  왕권 신수설을 주장하여 의회와  대립하였
다. 1628년 조세나 공채는 의회의  찬성이 있어야 하고, 법에 의하지  않고 
함부로 시민을 체포하지 못하며  각종의 자유권을 보장하는  내용의 `권리 
청원'을 의회가 통과시키자  제임스 1세는 의회를  해산시켰다. 결국 왕과 
의회의 대립은 의회파와 왕당파 사이의 내전으로 발전하였다. 당시 부유했
던 남부와 동부는 의회를 지지했고, 빈곤했던  북부와 서부는 왕당파을 지
지하였다. 대부분의 세입이 런던에서 징수되었고, 외국에서  군대가 들어오
는 것을 막을 수 있었기에, 의회가 남부와 동부의 지지를 받게 된 것은 전
략상 큰 이점이었다. 결국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군은 찰스를 패배
시키고 권력을 장악하여 공화 정부가 들어섰다(청교도 혁명). 그러나  크롬
웰의 엄격한 종교 정책과 군사 독재로  국민의 불만은 커졌으며, 크롬웰이 
죽자 의회는 네덜란드로 망명한 찰스 2세를 맞이하여 왕정을 복귀시켰다. 


7. 왕정 복고 시대 


찰스 2세(1660~1685)는 마그나 카르타와 권리  청원의 존중을 조건으로 받
아들였다. 그러나 즉위한 후 사실상 이러한  선언은 무시되었고 찰스 자신
은 카톨릭 교도로, 비국교도는 공직을 가질  수 없다는 심사율을 제정하는 
등 국교주의의 재건에 힘쓰는 의회와 다시 마찰을 빚었다. 찰스의 뒤를 이
은 제임스 2세 역시 카톨릭주의와  절대주의로 복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의회가 네덜란드의 메리와 오렌지 공 윌리엄(윌리엄 3세)을 여왕과 왕으로 
불러들이자 제임스는 프랑스로 망명하게  된다(명예 혁명). 1689년  의회는 
왕권을 제한하는 일련의 법안을 통과시켰는데 이것이 마그나 카르타, 권리 
청원과 함께 영국 헌법의 근간을 이루는 권리 장전이다. 

이후 윌리엄 3세는 영국 내정은 의회에 맡기고 당시 확대되는 프랑스 루이 
14세의 유럽 지배를 막는 데 전념하였다. 


8. 18세기와 19세기 


윌리엄 3세와 그 뒤를 이은 앤 여왕의 치세 동안 영국은 스페인 계승 전쟁
을 통해 지브롤터, 미노르카, 노바스코샤,  뉴펀들랜드 등을 차지하며 주요 
해상국으로 부상하였고 식민지 체제를 확대해 나갔다. 

1714년 앤 여왕 이후 의회는  독일의 하노버 왕조의 조지 1세에게  왕위를 
부여했다. 하노버 왕조의 왕위 계승 이후 평화가 지속되었으며,  이를 바탕
으로 산업 혁명이라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프랑스와의 식민지 쟁탈을 위한 7년 전쟁 후 영국은 북미와 인도를 지배하
게 되었다. 영국은 전쟁에서  소요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식민지에서의 
수입을 늘리려 하였고, 이것은 미국에서의 불만을  야기시켰다. 인지세법이 
1년 만에 폐지되고 수입세의 부과가 시작되었지만, 독립 전쟁으로 결국 미
국의 독립을 승인하게 되었다. 

18세기 후반 산업화가 경제적 지배권을 가져다 주었다면  프랑스 나폴레옹
과의 전쟁은 정치적 우위를 가져다 주었다.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을 패배시
킨 후 영국은 유럽과 세계 여러 지역에서 지배권을 행사하게 되었고, 영국
은 입법 활동, 전쟁 그리고 개인의 기업  활동을 통해서 식민지를 더욱 확
장시켜 나갔다. 1820년에  영국이 지배한  영토의 인구는 전  세계 인구의 
26%인 2억 명에 달했다. 

19세기 초반 수송 수단으로 철도와 기관차의 도입은 중공업 분야에서 커다
란 수요를 유발시켰고, 농업 분야에서도 새로운  시장의 확보와 비료의 값
싼 수송을 가능케 함으로써 커다란 이익을 가져왔다. 

한편 1801년에는 그레이트브리튼과 아일랜드의 통합으로 연합 왕국이 탄생
하였다. 그 후 아일랜드 공화군(IRA)으로 알려진  게릴라군이 결성되어 아
일랜드 독립 전쟁을 시작하였으며 1919년 더블린에서 아일랜드  독립 의회
를 구성하였다. 이에 따라 1919~1921년 동안 영국과 아일랜드 간에 전쟁이 
계속되었고 1921년 휴전 조약이 체결되어 아일랜드 북부의  얼스터 지방의 
6개 주는 영국에 잔류하고 남부 아일랜드의 26개 주는 독립하게 되었다. 

19세기 전반기에 차티스트  운동(노동자층을 주체로 전개된  민중 운동)과 
반곡물법 운동이 일어났다. 차티스트들은 의회의 개혁과 선거법 개정을 주
장했으며, 반곡물법 동맹은 수입  곡물에 대한 관세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운동은 여러 가지 중요한 입법 조치를 가져오게 했다. 1832년에 
선거권을 확대하는 제1차 선거법 개정이  이루어졌고, 1833년에는 제국 내 
전 지역에서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선거법 개정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지만 
국민 전체의 의사를 반영하기보다는 중산층이 정부에 참여할  기회를 부여
하는 데 그쳤다. 

1837~1901년까지 통치한 빅토리아의 시대는 비교적 평온을 유지했는데, 각 
가정이 사회의 핵심 조직으로 인식되었으며  개인의 창조력이 강조되었다. 
품격, 의지, 성실, 근면 그리고 검약 등 이른바 `빅토리아주의'가 윤리적 덕
목으로 대표되었다. 

1867년에 제2차 선거법이 제정되었다. 이  개정안을 제안한 사람은 자유당
의 지도자 글래드스톤이었고  통과시킨 사람은  보수당의 디즈레일리였다. 
이 두 사람은 휘그파가 자유당으로 그리고 토리파가 보수당으로 변하는 과
정을 이끌어 낸 인물들이다. 글래드스톤의 자유당은 1869년에 아일랜드 국
교회를 폐지하였고, 아일랜드  토지법, 교육법(1870),  그리고 노동  조합법
(1871)을 통과시켰다. 보수당의 디즈레일리 역시 사회 입법을 추진하여  공
중 보건법(1875)을 제정하고 주당 노동 시간을 56시간으로 줄이는 데 이바
지했다. 글래드스톤과 디즈레일리는 모두 대영 제국의 팽창에 힘썼다. 1890
년대의 제국주의는 원료와 상품 시장을  찾는 기업가들의 경제적 이해  관
계, 제국주의적 모험에 들뜬 군중의 열광  그리고 왕실의 영광과도 관련이 
있었다. 이 시기에 아프리카, 아시아, 태평양 등지에서 식민지 정복은 계속
되었다. 

19세기 말에 이르면서  빅토리아식 사회 구조가  흔들리기 시작했는데, 그 
가운데서도 경제적 상황 변화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국내의 경제적 어
려움은 주로 국제 금융면에서의 영국  경제력에 의해서 극복될 수  있었으
나, 노동자들의 불만은 커져  갔고 조직화되었다. 1900년에 런던에서  열린 
노동자 대표 회의에서는 노동 조합 운동가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의회에 노
동자 출신의 의원을 보내기 위한 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이것은 20세기 노
동당의 시작이었으며, 노동당은 마침내 자유당  대신 제2당의 자리를 차지
하게 되었다. 


9. 1차 세계 대전 


영국과 독일이 전쟁을 벌이게 되리라고 예상했던  사람은 많지 않았다. 영
국과 독일은 민족과 언어의  기원이 같고, 두 나라의  왕조는 가까운 인척 
관계였다. 1901년에 영국에서는 에드워드 7세가 즉위하였으며, 독일의 빌헬
름 2세는 그와 인척으로 1888년 이래  황제로 재위하고 있었다. 19세기 말 
영국은 아시아에서 러시아와, 아프리카에서는 프랑스와  식민지 경쟁을 벌
이고 있었으나 독일과 대립하는 일은 없었다. 

20세기로 들어서자 정세는 일변하였다. 펠리페 2세, 루이 14세, 나폴레옹처
럼 강력한 군주가 유럽의 패권을 놓고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었다. 1905년
에 체결한 영국·프랑스·러시아의 화친 협정은 어뢰정의 개발과 대함대의 
건조을 추진하는 독일의 티르피츠 제독에 대한 자위 수단이었다. 

1914년에 세르비아인의 오스트리아 황태자의 암살에 이어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독일이 벨기에를 침범하자 영국은 1914년  8월 4일에 선전 포고
를 하였다. 

전쟁 초 영국 함대는 원정 부대의 수송을 확보하였지만 독일  잠수함의 등
장으로 영국의 선박 중 약 5000척의 선박이 격침되었고, 또 러시아 혁명으
로 러시아가 이탈하자 영국은 궁지에 몰렸다. 미국이 참전한 후 전세가 바
뀌기 시작했는데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군의 반격 이후 연합군이 승
리하였다. 

1차 세계 대전은 광범위하고 심각한 혼란을 유럽에 미쳤다. 오랫동안 지속
된 국가 체제가  사라지고 새로운 국가들이  독립하였으며, 러시아가 공산 
국가로 탈바꿈하였다. 또 미국과 자치령 등의  지위가 향상된 반면 영국의 
지위는 저하하여 대영 제국 붕괴의 시작을 알렸다. 영국 내에서는 보통 선
거를 실시하게 되었고 휘그당  시기를 포함해서 3세기 동안이나  존속되어 
온 자유당이 소멸되었으며 전후 심각한 불황으로 노동당이 약진하였다. 경
제 불황은 전시에 발행한 막대한 국채로 국가 예산이 팽창하였고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한 해외 시장의 개척 부진 등이  그 원인이었고, 여러 가지 화
폐 정책을 실시하였으나 실효가 없었다. 

그러나 1931~1935년 재무상 쳄벌레인의 공헌으로 경제 회복이 이루어졌다. 
파운드화의 금본위제를 폐지하여 영국의  물가는 금본위 국가의  물가보다 
하락되어 수출 무역에 유리하게 되었고, 과감한  수출 정책과 새로운 세금
의 부과로 예산의 균형을 회복하였다. 


10. 2차 세계 대전 


영국에게 2차 세계 대전은 1차 세계 대전보다 더욱 피해가 큰 전쟁이었다. 
1920년 이후 항공 기술이 발달하여 영국은 섬나라라는 이점을 상실하고 말
았다. 

전쟁이 시작되자 폴란드는 1개월 만에 완전히 유린되었고 프랑스는 마지노 
선에 의존하는   상황이었다. 독일군은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유린하면서 
1940년 5월에 북부 국경 지대를 넘었다.  프랑스가 군사 조직의 붕괴로 휴
전을 체결하게 되자 영국은 절박한 본토  침공에 직면하게 되었다. 노르웨
이, 벨기에,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그리고 프랑스의 드골  장군과 지원국
들의 망명 정부가 영국에 모였다. 영국의 과학자들은 군사력을 강화시키는 
장비 즉 레이다 등을 발명하였다. 처칠 수상은  전쟁에 임하고 있는 전 국
민의 사기를 앙양시키는 데 성공했다. 

히틀러가 아프리카와 동부 유럽의 승리를 활용하지 않고 1941년  6월에 러
시아를 공격하자 영국은 이 날부터 승리의 길을 걷게 되었다. 참전을 보류
하고 있던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영국에 대해 막대한 물자를 원조하기 
시작했고 참전하게 되었다. 

1944년 6월 6일에 노르망디 상륙 작전으로 초기 서부 전선에서  패하여 퇴
각한 연합군이 독일로 진격하기 위한 발판이  마련되었고, 영미 공군의 폭
격으로 독일 중공업 시설이 파괴되고 서부 전선이 동부 전선의 러시아군과 
연결된 후 1945년 5월 7일 독일은 항복하게 되었다. 


11. 2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은 양차 세계 대전을 겪은 후 일부 특권 계급의 여유 있는 생활보다도 
많은 국민들의 기본 생활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전후 선거
에서 노동당은 처음으로 절대다수의 의석을 차지하여 애틀리가  처칠을 물
리치고 수상이 되었으며, 노동당 정부는  잉글랜드 은행, 민간 항공,  탄광, 
철도, 철강업 등을 국유화하며 복지 국가 정책을 취하였다. 이와 같은 시기
에 영국은 제국 체제에서 철수하여 인도, 미얀마, 스리랑카 등이 독립했다. 

1951년 총선거에서 처칠을 수상으로 하는 보수당이 다시 집권하게 되어 정
부는 사회 보장 제도를 완화하고 국유화  정책을 보류하였다. 미국과의 관
계에서 완전한 자주성을 회복하도록 노력했다. 영국 제품은 우수한 품질로
써 세계 시장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1954년 영국의 자동차 
수출은 세계 1위를 차지하였다. 또한 영국은 미국과 러시아가 독점하고 있
던 원자탄과 유도탄을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1956년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자  이든(Eden)이 
이끈 보수당 정부는 운하의 재점령을 시도하였으나 비판의 소리가 높아 후
퇴하고 말았다. 1950~1960년대 초에 영국은 경제적 팽창과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영국은 1957년 유럽 공동체 가입을 거부함으로써 서독이 주도한 유
럽의 경제 성장에 동참하지 못했고 1960년대 중엽에 이르면서 영국의 발전
이 시들어 갔다. 노동 조합의 불안과  북아일랜드에서의 폭동이 영국 경제
를 더욱 악화시켰다. 

1979년 대처의 보수당이 집권하였다. 대처는 세계적 호경기 시대에 인플레
이션을 둔화시키고 경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1982년 포클랜드에서 아르
헨티나를 물리침으로써 인기가 절정에 올랐으나 주민세 부과로  국민의 반
발을 사고 유럽 통합에 대한 비타협적인 자세로 반발을 초래해  1990년 존 
메이저가 총리를 승계했다. 

그러나 1997년 5월1일 영국 총선 결과 노동당은 419석을, 여당이던 보수당
은 165석을 차지하였고 제3당인 자유 민주당은 46석을 차지하였다. 이것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가장 큰  의석 차를 낸 선거로서 반복지 국가와  시장 
만능주의 노선을 고수하던 대처리즘의 장기 집권에 대한 영국 국민의 염증
을 반영한 것이다. 20세기 들어 노동당의 단독  집권은 20년이 채 안 되지
만 토니 블래어 노동당 당수의 집권은 향후 유럽 정치에 새로운 변화를 예
고한다. 


 

III. 정치 


영국은 입헌 군주주의와 의회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국왕은 영국의 
상임 국가 수반이나 왕권은 대개 명예적인 것으로 실제 국가  권력은 의회 
다수당 의장인 총리와 다수당 당원 중에서 총리가 직접 임명한  내각에 의
해 행사된다. 

의회는 상·하원의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다. 651명의  하원 의원은 5년 임
기로 유권자들의 직접 투표에 의해 선출되며,  상원은 귀족들과 주교로 구
성되며 대법원의 역할을 겸하고 있다. 상원  의원은 임명제로서 임기가 없
는 종신직이다. 

영국은 지난 150년 이상 전통적으로 보수당과 노동당의 양당  체제로 정권 
교체가 연속적으로  이루어져, 강력하고  안정된 정치  역사를 갖고  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자유 민주당이  제3당으로서 자리를 잡아 가고  있으
며, 그 밖에 스코틀랜드 민족당,  웨일스 민족당이 있다. 북아일랜드에서는 
신교인 프로테스탄트계와 구교인 카톨릭계가 대립하고  있어, 다른 지역과 
달리 보수당, 노동당, 자유 민주당의 영향력은 미미하며, 신교계인 민주 연
합당(Democratic Unionist), 온건파인 얼스터 연합당(Ulster Unionist), 중도
파인 얼스터 민주 연합당(Ulster Popular Unionist), 그리고 구교계인  사회 
민주 노동당(Social Democratic and Labour)이 장악하고 있다. 영국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경제력 쇠퇴와 더불어 대부분의 식민지가 독립하였고 1997
년 7월 1일에 홍콩에 대한 주권 행사가 중국에 이양되어 과거 대영 제국의 
영광을 잃어 가고 있다. 그러나 UN(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 이사국, 
NATO(북대서양 조약 기구), EU(유럽 연합)  등의 회원국으로서 아직까지
도 국제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IV. 경제 


2차 세계 대전 이전에 영국 경제는 전 세계 교역량의  약 26%를 차지하는 
세계 2위의 무역국이었으나 제조업 부문의 사양화, 과거 식민지 시장의 상
실 그리고 국제 수지의 악화에 끊임없이  시달려 현재는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등에 이어 OECD(경제 협력 개발  기구) 국가 중 5위의 경제 규모
를 갖고 있다. 

20세기 후반 들어 서비스 산업이 점점 더 큰 비중을 차지하여, 서비스업이 
GDP(국내 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현재 약 64%에 이르고 있다. 최근 
15년 동안 가스 및 석유 산업이 크게 발전했으며 첨단 기술 분야  특히 전
자 및 화학 분야에서 빠른 속도로 발전하였다. 

1990년대 초반에 실업률이 10%를 상회하고 국내 총생산이  내리막길을 걷
는 등 경제 침체를 겪었지만 정부가 경기 회복을 촉진하고  적극적인 경기 
부양책을 시행한 결과 1992년 말부터는 경기가 회복 국면으로 들어가 경제 
성장률이 플러스 성장으로 반전되었다. 1994년에는 부동산 경기와 산업 생
산, 수출도 견실한 회복세를  보였고 실업률도 감소하였다. 또한  최근에는 
세계 경기 회복과 제조업의 수출이 계속 호조를 보이고 있어  무역 수지도 
대체로 개선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영국의 주요 제조업 분야는 철강 및 
비철 금속류, 도자기, 화학  제품 및 합성 섬유,  약제품, 기계 엔지니어링, 
컴퓨터, 통신 시설, 자동차, 항공 우주 산업 등이 있다. 

영국의 총무역액의 절반 이상을 서유럽 국가가 차지할 정도로 대부분 선진
국들과 무역이 이루어져 왔으나 현재는 우리 나라, 태국,  말레이시아와 같
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 국가를 대상으로 하는 수출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
는 추세이다. 영국의 10대 무역 품목으로, 수출 품목은 자동차,  원유, 사무 
자동 기기, 전기 기기, 잡제품, 발전 설비, 운송 장비, 산업 기계, 유기 화학 
제품이며 수입 품목은 자동차,  사무 자동 기기, 전기  기기, 잡제품, 원유, 
일반 산업 기계, 의류, 섬유 직물, 발전 설비 등이 있다. 

한편 영국은 증권, 선박, 금융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다. 런던 시티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은행이 많이 몰려 있는 곳으로 세계 최대 증권 시장의 하나
이며, 세계에서 가장 큰 보험 산업을  갖추어 전 세계 국제 보험의 20%를 
맡고 있다. 세계 금융 시장에서 이 곳의 위치를 살펴보면 1일 외환 거래량
이 3030억 달러로 세계에서 가장 많으며, 국내 기업과 해외 기업을 포함한 
상장 기업 수도 런던이 2456개로서 제일 많다. 


 

V. 문화와 생활상 


영국인은 대체로 과거를 존중하며  보수적인 면모를 보인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영국인은 역사에 대한 적응력도 강한  편이다. 이것은 “변화 없이 
영구적인 것은 없다(There is nothing permanent except change)”라고 말
하는 속담에 잘 나타나 있다. 세계 최초로 제트기를 날리고, 어느 나라보다 
앞서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달성했으며 펑크와 미니 스커트를 처음 등
장시킨 것도 영국인이었다. 또한 영국인은 어려운  일에 부딪쳤을 때 침착
하게 대응하는 냉정함이 있다고  한다. 영국인의 냉정함과  감정의 억제를 
비유한 것으로서, 라틴 민족은 뛰고  난 뒤 생각하고, 독일인은 뛰기  전에 
생각하고, 영국인은 뛸 생각도  않고 천천히 걸어가면서 생각한다고  한다. 
또 영국인과 유럽 대륙인의 기질을 비교한 유머로서 독일인은 맥주 거품처
럼 끓어오르는 정열을 갖고 있으며, 프랑스인은 포도주처럼 달콤한 감성을 
갖고 있고, 영국인은 위스키처럼 투명한 지성을 갖고 있다고 한다. 


1. 인구와 민족 


영국의 인구는 약 5842만 명(1994년 기준)이며 지역별로 보면 총인구의 약 
83%가 잉글랜드에 거주하고 있고 그 다음은 스코틀랜드(9%), 웨일스(5%), 
북아일랜드(2.7%) 순서이다. 가장 많은 인구가 집중되어 있는 곳은 수도인 
런던으로 약 700만 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그 다음으로 버밍엄,  리즈, 스코
틀랜드의 대도시인 글래스고,  브래드포드, 에딘버러,  맨체스터, 브리스톨, 
코번트리, 웨일스의 수도인 카디프 그리고  북아일랜드의 수도인 벨파스트 
등이 있다. 

영국의 인종은 앵글로색슨족이 대부분이지만 오래 전부터 많은 아일랜드인
이 상주하고 있다. 특히 19세기 후반부터  2차 세계 대전 말까지 유태인을 
비롯한 여러 민족들이 유럽 대륙에서 피난해 왔으며 1950~1960년대에는 남
아시아 및 카리브 해로부터 이민이 실시되었다. 또한 1970년대에는 인도·
파키스탄의 이민이 대대적으로 실시되어 영국인을 제외한 외국인으로 가장 
많은 수(약 100만 명)를 차지하고 있다. 그 밖의 주요 소수 민족으로는  중
국인, 그리스인, 터키인, 키프로스인, 이탈리아인, 스페인인 등이 있다. 


2. 종교 


영국에서 모든 사람들은 국가나 다른 집단들로부터 침해나 간섭을 받지 않
을 종교의 자유를 지니고 있다. 종교적인  기구나 단체들은 재산을 소유할 
수 있으며 학교를 운영하고 그들의 신앙을 적극적으로 장려할 수 있다. 

영국에서는 두 갈래의 교회가 법적으로 공식적인 교회들로 인정받고 있다. 
하나는 영국의 영국 국교회이고 다른 하나는 스코틀랜드의 장로 교회를 말
한다. 그 밖에 웨일스 교회, 스코틀랜드 성공회, 아일랜드 교회가  있다. 또 
공식적인 교회는 아니지만 메서디스트교(감리교), 뱁티스트교(침례교), 통합 
개혁교 등도 있다. 이들 가운데 메서디스트교가  영향력이 크며 다른 개신
교들로는 성령 강림교뿐만 아니라 유니테리언파(유일교파)도 있다 

주일이 되면 영국 국교회에 참석하는  교인들은 대략 110만 명 정도가  된
다. 대부분의 영국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영국 국교회에  속한다고 믿지만, 
주일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경우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비록 영국에서는 기독교가 우세한 편이지만  이슬람교, 힌두교, 유태교, 시
크교와 같은 다른 종교도 공존하고 있다.  이 가운데 이슬람교는 기독교외 
종교 중 가장 많은 신도를 확보하고 있다. 


3. 언어 


영어는 지역적인 다양성으로 인해 억양(악센트)과  표현이 조금씩 다른 것
이 사실이지만 영국의 공식 언어라고 말할 수  있다. 현대 영어는 본래 앵
글로 색슨족의 방언으로부터 유래되었으나 다른 언어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영어는 영국 이외에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아일랜드, 남아프리카, 
버뮤다 및 기타 몇몇 지역에서 제1언어로 사용되고 있는 언어로서 그 사용 
인구는 세계에서 중국어 다음으로 많다. 

웨일스 국민의 약 19%는 켈트어에  기원을 둔 웨일스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웨일스의 시골 북서부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정부와 웨일
스 시민 단체 모두 웨일스어의 사용을 부활시키기 위해 노력해 온 결과 현
재는 학교 또는 공식적인 모임이나 방송에서 사용되는 등 영어와  거의 동
등한 지위를 누리고 있다. 

게일어 또한 켈트어에 기원을 둔 것으로 스코틀랜드에서 약 7만 명의 주민
들이 사용하고 있다. 또한 스코틀랜드 중앙의 저지(低地)에서 살고 있는 주
민들은 고대 영어의 한 분파인 노섬브리아어로부터 유래된 스코틀랜드어를 
수세기 동안 사용해 왔다. 


4. 예술 


영국인의 경험주의적·현실주의적 성격은 예술에도 반영되어 있어, 추상적
인 분야인 음악에서는 거장을 많이 배출하지 못하였지만  문학과 연극에서
는 불멸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의 한 비평가는 “영국보다 나은 시
는 없다”고 말했는데, 영국 시에 있어서 주제는 인간이 아니면 자연 세계
이다. 19세기 초엽 낭만파  시인인 바이런, 셸리,  키츠 그리고 빅토리아조 
시대의 테니슨과 브라우닝, 20세기의 예이츠 등은  이름만 들어도 가슴 벅
차 오르는 문호들이다. 

미술 부문에서는 영국에서  특히 수채화, 초상화  그리고 풍경화에 걸작이 
많으며, 영화 부문에서는 히치코크가 세계 영화계를 놀라게 했다. 영국에는 
현재 1800여 개의 극장이 있으며 한 주에 약 190만 명이  관람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현재 런던은 드라마, 음악, 오페라 및 댄스의 세계적인 중심 도시의 하나이
며 영국의 다른 도시 역시 높은 예술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영국에는 300
여 개의 극단이 있으며 그  가운데 약 100개가 런던에  위치해 있다. 또한 
런던은 연극 이외에도 오페라로 유명한데 주요한 오페라단으로는  로열 오
페라, 코벤트 가든 및 잉글리시  국립 오페라단을 꼽을 수 있다.  스코틀랜
드, 웨일스 및 북아일랜드는 각각 자체의 오페라단을 가지고 있다. 

한편 영국에는 약 2500개의 박물관과 화랑이 있으며 대영 박물관에는 세계
적으로 유명한 예술, 고고학 및 역사적 소장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대부분
의 국립 박물관은 런던에 위치해 있는데 대영 박물관 외에 빅토리아·앨버
트 박물관, 과학 박물관, 국립 미술관, 테이트 미술관을 들 수 있다. 


5. 축제 


영국의 여러 지방에서 행해지는 그 지역 고유의 전통 축제는  생활의 중요
한 부분이다. 많은 도시와 마을의 풍습 속에는 독특한 전통이 있는데, 다채
로운 행렬과 퍼레이드 또는 카니발이 포함되어 있다. 

영국 중부의 노팅엄에서는 매년  10월, 1000년의 역사를  가진 행사로 3일 
동안 벌어지는 거위 시장이 열린다. 원래는 거위를 팔기 위해 생긴 시장이
었지만 지금은 모든 주민들이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행사가 되었다. 

여름이 되면 웨일스는 시,  드라마, 스포츠, 공예와  전통적인 연회를 함께 
결합시킨 에술 축제와 박람회 등으로 축제  분위기에 휩싸이게 된다. 또한 
매년 개최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웨일스의 민속 예술 축제인 로열 국립아
이스테드포드는 민속 노래와 춤, 그리고 공예가들의  작품 전시가 함께 진
행되는 다채로운 민속 축제이다. 

스코틀랜드에서는 방문객들이 도자기와 전통 가구,  보석과 자수에 이르는 
여러 가지 공예품들을 만들어 내는 공예가들의 모습과  백파이프 취주대와 
드럼 연주대들이 참가해 벌이는 군악대 행진을 직접 볼 수 있다. 국제적으
로 알려진 에든버러 축제가 대표적이며 서민들의 축제에서  유래된 프린지 
축제는 스코틀랜드가 자랑하는 또 하나의 축제이다. 

북아일랜드에서 11월에 열리는 벨파스트 축제는  대표적인 예술 축제로서, 
이 축제는 영국에서 가장 성대한 축제  중의 하나로 손꼽히며, 연극, 무용, 
드라마, 노래에 이르기까지 모든 예술 장르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6. 생활 수준 


1994년에 발표된 EU 보고서에 따르면 영국은  생활에 대한 기대, 교육 수
준, 기본적인 상품 구매력을 결합한 인간  개발 지수에 있어서 173개국 중 
10위를 차지했다. 개인 연금에 의존하는 사람도  많지만 근로 소득이 가계 
소득의 주요한 원천이 되고 있다. 

1970년대 이후에 부(富)의 분배에 있어서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현재 영국 
국민들 가운데 10%의 부유층 재산은  전체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1993
년에 영국에서 개인 재산 중 가장  비중이 큰 것은 주거를 위한  재산으로 
전체에서 30%에 이른다. 

1994~1995년에 주당 평균 가계 지출액은 약 284파운드(£)였다. 음식과  주
택 비용이 16~18%를 차지했으며 교통비와 여가비로 15~16%를 사용했다. 

7. 음식 


영국인들은 로스트 비프(쇠고기 구이), 요크셔 푸딩(고기즙을 쳐서 굽는 푸
딩), 생선과 포테이토 후라이  등 몇몇 전통적인  음식들을 아직까지 즐겨 
먹지만 지난 수십 년 동안 국민들의 식문화에는 많은 변동이 있었다. 이것
은 대부분 건강과 편리성에 대한 고려에서  기인한 것이다. 설탕, 계란, 감
자의 소비가 대체적으로 감소했으며 고기의 소비도 감소하였다. 쌀과 파스
타(마카로니 등을 만들기 위한 반죽 또는 그  요리)의 소비 증가는 감자의 
소비 감소에 영향을 받았다. 

또한 지방을 증가시키는 버터, 라드(돼지 비계를 녹여 정제한 반고체의 기
름)의 사용은 크게 감소한 반면 지방을 감소시켜 주는 야채와 샐러드 기름
의 소비는 크게 증가하였다. 생선 소비도 통조림통에 들어 있는 생선과 조
개류의 소비가 증가했다. 영국의 레스토랑에서는 일반적으로 세계 여러 나
라의 음식들이 제공되지만 특히 중국,  인도, 이탈리아, 그리스의 레스토랑
들이 국민들에게 인기가 많은 편이다. 


8. 여가 활동 


많은 영국 국민들은 여가 활동의 대부분을 친지와 친구를 방문하면서 보내
는데, 이것을 통해  그들이 매우 가정적이며  사교적인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텔레비전을 보는 것은 가장 일반적인 오락 형태이며 라디오나 레코드
도 즐겨 듣는다. 하루 평균 전체 인구의 약 70%가 지역 또는 국영 라디오
를 듣는다. 컴팩트  디스크의 구입은  매우 빠른 증가세를  보이고 있는데 
1992년에 오디오 카세트의 판매를 앞질렀다. 컴팩트 디스크 플레이어를 가
진 가구의 수도 15%(1989년)에서 39%(1993년)로 증가하였다. 

독서, 정원 가꾸기, 집안 보수, 또는 외식이나 영화 관람을 하는 것도 여가
를 즐기는 흔한 방법에  속한다. 한편 평일에는 15세  이상 국민들 가운데 
약 60%가 조간 신문을 구독하며, 일요 신문을 읽는 사람들은 70%에 이른
다. 


9. 스포츠 


영국 국민들은 스포츠에 대한 관심도가 높은  편이다. 가장 대중적인 것으
로는 산책이나 하이킹, 수영, 요가와 사이클 등이 포함된다. 여성의 참여도 
최근 몇 년 동안 크게 증가해 전통적으로 남자들의 소유  종목이라 여겨졌
던 축구, 럭비, 복싱과 같은 종목들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한편 영국의 귀족 사회는 스포츠에도 반영되어 있는데 가령 승마를 즐기는 
것은 귀족과 상류 계급의 전형적인 스포츠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여우 사
냥을 비롯한 수렵과 폴로(4인 1조로 말을 타고 하는 구기 종목)도 상류 계
급의 스포츠에 속한다. 반면 개 경주나 술집에서 하는 다트 놀이는 스포츠
라기보다는 게임으로 주로 근로 계층이 즐기며  또 내기를 좋아하여 경마, 
카드 놀이, 축구 경기에서 돈을 거는 습관은 널리 퍼져 있다. 


10. 여성 


영국의 인구 구성은 남자  100명 당 여자 104명의  비율로 구성되어 있다. 
매년 남아가 여아보다 약 3% 더 출생되지만 남자들의 높은 사망률 때문에 
여자 인구가 남자 인구를  앞서고 있다. 이러한 불균형  때문에 노인들 중 
할머니들을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20세기에 들어 여성들의 경제 활동과 가정에서의 생활 모습은 변모되어 왔
다. 이러한 변화는 부분적으로 남녀 차별이 없는 정치적인 또는 법적인 권
리 보장으로부터 뒷받침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중요한 특징 가
운데 하나가 직장에서 결혼한 여성의 숫자가  크게 증가했다는 점이다. 이
것은 파트 타임과 같은 탄력성 있는 일자리의 증가, 탁아소나 보모를 통한 
육아 보호 시설의 확충 등이 제공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영국에서 노동력의 5분의 2 이상을 여성들이 차지하고 있으며 약  80만 명
이 사업을 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또한  의원 중 여성의 숫자도 60명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11. 교육 


영국의 아이들은 만 5~16세까지는 의무적으로 학교를 다니게 된다. 영국의 
학교는 공립 학교(Maintained School)와 사립 학교(Independent  School)로 
분류할 수 있는데 이 중 외국인 학생들에게 개방되어 있는 것은 사립 학교
들이다. 

거의 대다수인 92.7%의 영국 학생들이 수업료가 없는 공립 학교에 다니고 
있고 7.3%의 학생들만이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는 사립 학교에 다니고 있
다. 외국인 학생들은 이들 사립 학교에 입학할 수 있다. 

영국에는 2500개 이상의 사립 학교가 있는데 지역, 시설, 학비의 정도에 따
라 매우 다양하다. 어린이들은 만 2세가 되면 유치원이나 Pre-Prep School
에 입학할  수 있다.   5세에 초등 학교(Primary  School)에  입학을 하여 
Secondary School(우리   나라의 중·고등학교  과정에  해당하며  Senior 
Independent School이나 Public  School이 이  범주에 들어감)이 시작되는 
12∼13세까지 다니게 된다. 의무 교육이 끝나는  나이는 만 16세로 자신의 
선택에 따라  Sixth Form  College(혹은  Tutorial College)나  College of 
Further Education으로 진학한다. 여기서 대학 진학에 필요한 시험을 준비
하게 된다. 18세에 Polytechnic이나 University에  입학함으로써 고등 교육
을 시작하게 된다. 영국에는 46개의 종합 대학이 있으며 이 대학들은 모두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리고   버킹엄   대학교(University   of 
Buckingham)를 제외하고는 모두 공립 대학들로서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
고 있다. 또한 국립 대학인 Polytechnic라고 하는 30개의 전문 기술 대학이 
있다. 


12. 청소년 


가정은 대부분의 영국 청소년들에게 있어 구심점이 되는 곳이다. 청소년들
은 가정에서 그들의 가족 또는 친구들과 여가 시간의 대부분을 보낸다. 학
교는 그들의 교육뿐만 아니라 동료 사이에서 그들의 개성을 계발시키는 중
요한 장소이다. 영국에 있는 모든 학생들은  그들 자신의 재능을 계발시키
기 위한 직업적인 또는 학문적인 교육을 받는다. 그러므로 스포츠, 드라마, 
음악 또는 창조적인 연구 등도 학교 교과 과정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11~25세  학생들의 자아  계발과 비공식적인  사회 교육은  청소년부
(Youth Service)로부터 받기도 한다. 청소년부는 공공 기관과 많은 자발적
인 지원 기관들 사이에  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약 
600만 명의 학생들이 현재 또는 과거에 청소년부에 참가하여  활동한 것으
로 집계되고 있다. 청소년부는 스포츠, 문화적인 또는 창조적인 연구, 지역 
봉사에 참여하는 학생들에게 용기를 심어 주거나 상담과  카운셀링을 해주
기도 한다. 


13. 휴가 


1994년 통계를 보면 성인 인구의  60%가 적어도 4박 이상의  휴가를 보냈
다. 여름 휴가로 가장 많이 가는 곳은 영국 서부인 스코틀랜드와 웨일스였
고, 그들이 휴가를 얻고자 가장 원하는 달은 8월이었다. 

해변 휴양지로  가장  인기 있는  국내  장소로는 영국  북서부의  랭커셔
(Lancashire)에 있는 블랙풀 플레져 비치(Blackpool Pleasure Beach), 영국 
해협에 면한 해변 행락 도시 브라이튼(Brighton)에 있는 피에르  궁(Palace 
Pier), 그레이트  야머스(Great  Yarmouth)에 있는   플레져 비치(Pleasure 
Beach)가 있다. 1994년에 영국인들이 뽑은 인기 있는  해외 휴양지로는 프
랑스, 스페인, 미국 순이었다. 1994년에 휴가  기간 동안 약 77%가 유럽에
서 보낸 것으로 집계되었다. 


14. 교통 


영국의 시내 버스는 1층 버스(Single Decker)와  2층 버스(Double Decker)
의 두 가지가 있다. 버스의 색깔은 지역에 따라 다른데, 런던의  버스는 주
로 빨간색, 멘체스터의 경우는 오렌지색이다. 버스를 타고자 할  때는 정류
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손을 흔들어  세울 수가 있는데 이를 Request 
Stop이라 하고, 반드시 서는 정류장은 Fair Stage라고 한다. 내릴  때는 벨
을 미리 누르거나 운전사에게 “다음  역에 내려 주세요(Next Stop  Pleas
e)”라고 여러 번 말해야 한다. 최근  들어 영국의 버스는 타는 문이 앞에 
있고 내리는 문이 중간에 있는 1층 버스로 많이 바뀌고 있다. 차비는 차에 
올라 탄 후에 직접 내면 되지만 지폐는  받지 않는다. 한편 영국에서 장거
리 버스는 코우치(Coaches)라고 불리며 영국 여행을 하는 데  가장 경제적
인 방법이다. 

런던의 지하철은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라고 불리며 약 245개의 역을 
운행하고 있다. 지하철을 이용할 때는 버스를 탈  때도 같이 사용할 수 있
는 여행용 카드(Travel Card)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요금은 우리 나
라의 경우처럼 구역제이고 최고 요금은 4£이다.  운행 시간은 오전 6시부
터 자정까지이다. 

택시는 블랙캡(Black Cab)과 미니  캡(Mini Cab)의 두 종류가  있다. 블랙 
캡은 차 뒤에 흰색 금속판이 있으며 우리 나라의 일반  택시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미니 캡은 고객에 의해 전화로 연락을 받고 손님이 원
하는 곳까지 운송해 주는 콜택시를 의미한다. 


15. 관광지 


1. 영국 


런던 

런던은 세계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도시 가운데 하나이다.  런던의 역사는 
로마 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가는데 지난 2000년 간 다양한  인종과 침략자들
을 맞이하였고 여러 곳에 그 흔적을  남겼다. 화려한 쇼핑가에서부터 다양
한 전문 점포에 이르는 다양한  상점들, 금융 중심지인 시티, 저명  건축가 
존 내쉬(John Nash)가 설계한 리젠트 공원(Regent's Park) 주위를 둘러싸
고 있는 18세기 주택 건물들과, 1066년 이래  영국 국왕과 여왕의 왕위 즉
위식이 거행되어 오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성당(Westminster Abbey)이  공
존하고 있는 런던은 세계적인 대도시 중 하나이자 영국의 수도이며 문화와 
무역의 중심지이다. 

관광 명소로는 로마 침략 이래 줄곧  런던 역사의 중심이 되어 왔던  템즈 
강변에   위치한  빅벤(Big   Ben)과  장엄한   국회  의사당(Houses   of 
Parliament), 수상 관저가 있는  다우닝 스트리트(Downing Street)  그리고 
왕관에 박혀 있는 보석들을 감상할 수 있는 런던 타워(Tower  of London) 
등이 있다. 또한 매일 열리는 각종 옥외  행사 가운데 궁전 밖에서 벌어지
는 근위병 교대식(Changing the Guard)은 런던 풍물 중의 하나이다. 

또한 세계 유수의 도시들처럼 런던은 변화와 혁신의 중심지로서 손꼽힌다. 
런던 금융가의 중심부에 소재한 로이즈 오브 런던(Lloyd's  of London) 건
물과 1990년 세워진 영국 초고층 건물인 카나리 와프  타워(Canary Wharf 
Tower)는 화려한 구조물로서 단연 자랑거리가  된다. 만약 도크랜드 경철
도(Docklands Light Railway)를 이용한다면 도크랜드의 개발 현황을  한눈
에 볼 수 있으며 최고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런던에는 수많은 박물관과 화랑이 자리잡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대영 박물
관(British Museum)은 런던에서 가장 큰  박물관으로 그 소장품의 규모가 
방대하여 모두 충분히  보려면 며칠이  걸릴 정도이다. 그  외에도 빅토리
아·알버트 박물관(Victoria & Albert Museum)과 트라팔카 해전의 영웅인 
넬슨 제독의 기념 기둥과 수많은  비둘기 떼로 유명한 트라팔카  광장에는 
국립 미술관(National Gallery)이 있다. 


남부 

작은 초가집, 웅장한 대성당, 활기찬 마을과 도시는 남부  잉글랜드에서 볼 
수 있는 풍경들이다. 명문 대학 도시로서  알려진 옥스포드는 대학의 구성 
단위를 이루는 여러 학료(college)들과 이들 건물  주변의 아름다운 정원을 
뽐내고 있다. 

남해 연안을   따라가면 브라이튼(Brighton),  번머스(Bournemouth),  토키
(Torquay) 등 미려한 해양 휴양 도시들이 있다. 이  지역은 도심의 혼잡을 
피해 바다로 몰려드는 도회지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다. 

또한 남부 지방은 수많은 대저택, 잘 가꾸어진 정원과 성들로 이름난 지역
인데 스코트니 성(Scotney Cattle), 햄프셔의  볼로우(Beaulieu)와 윌트셔의 
롱리트(Longleat) 같은 대저택이 유명하다. 


중부 

윌리엄 셰익스피어, 웨지우드 도기, 로얄 덜튼 차이나 그리고  캔버리 초콜
릿 등은 중부 잉글랜드가 연상시키는 명인과 명품의 이름이다. 또한 이 지
역은 명문 캠브리지 대학과  돌로 지은 그림  같은 집들이 있는  코츠월드
(Cotswold) 마을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스트라트포드 어폰 에이본은 영국의 대표적 극작가 셰익스피어의 출생지로
서 현재는 셰익스피어의 극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스
트라트포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영국에서 가장 훌륭한 중세의 성으
로 평가받고 있는 워릭 성(Warwick Castle)이 있다. 

스토크 온 트랜트(Stoke-on-Trent)에 들어서  있는 웨지우드와 로얄 덜튼 
도자기 생산장에서는 도자기제에 무늬를 그려 넣는 숙련공들의  노련한 손
길을 감상할 수 있다. 


2. 웨일스 


웨일스의 수도 카디프에는 지금도 아서 왕의  전설이 곳곳에 베어 있는데, 
아서 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던 원탁의 기사 랭설러트 경이 아서 왕의 왕비 
귀니비어와의 추문에 격노한 아서 왕을 피해 항해길에 오른 곳이  바로 이 
곳이라고 전해진다. 

고혹스런 옛 성채의 화려한 자태는 인상적인 웨일스의 모습으로 기억 속에 
다가 올 것이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곳은 카나폰 성(Caernarfon Castle)인
데 13세기에 웨일스 군을 진압하기 위해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가 세운 
곳이라고 한다. 1969년 7월에 여왕이 그녀의 아들 찰스 황태자에게 웨일스
의 왕자(Prince of Wales)라는 수작식을 거행한  곳도 바로 카나폰 성이었
다. 

또한 카나폰   성과 더불어  콘위(Conwy),  뷰마리스(Beaumaris),  하레흐
(Harlech) 성들은 모두 세계사적으로 지정된 바 있는 명소들이다. 

한편 웨일스 지방을 여행하다 보면 많은 양떼를 볼 수 있게 된다. 양의 수
가 인구 수를 앞지르는 웨일스에서는  담요, 스카프와 모자, 점퍼 등  좋은 
모직 제품을 판매하는 상점들을 자주 접할 수 있게 되는데 특히 사랑의 스
푼(love spoon)과 켈트 양식의 포르트메이리언(Portmeirion) 도자기는 좋은 
눈요기가 될 것이다. 


3. 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 하면 스카치 위스키, 백파이프, 격자 무늬 타탄, 골프의 발상지
로 연상되는 지역이며 장엄한  절경의 산, 은빛 잔물결의  현란한 호수 등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간직한 곳이다. 본토의 남북 길이가  약 450km, 최
대 넓이가 약  250km로, 북쪽과 서쪽으로는  대서양이 동쪽으로는 북해와 
접해 있는 스코틀랜드 주변에는 790개에 달하는 섬들이 있다. 

스코틀랜드의 주도 에든버러에 들어 서면 도시 중앙에 우뚝 서  있는 12세
기 고성의 당당한 자태가 도시 전체를 압도하고 있다. 중세 시대에 조약돌
로 포장한 로얄  마일(Royal Mile) 길을  따라가면 홀리루드 성(Palace  of 
Holyroodhouse)에 다다르게 되는데 이 성은 1566년 당시 스코틀랜드의 여
왕이었던 메리 여왕(Mary, Queen of Scots)이 아들 제임스 6세를 낳은 곳
일 뿐만 아니라 여왕 자신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구성하는 역사적인 사건들
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반면 스코틀랜드의 최대 도시인  글래스고우는 스타일에 민감한  도시인데 
버렐 콜렉션(Burrel Collection)과  아트 갤러리(Art  Gallery) 그리고 캘빈 
글로브 박물관(Museum in Kelvingrove)에 소장된 전시물들은 미술 애호가
들의 관심을 끌 것이다. 

그램피안 고지(the Grampin Highlands) 일대를  돌아보는 몰트 위스키 트
레일(Malt Whisky Trail)은 스코틀랜드의 고유 정서를 경험할 수 있는 좋
은 기회가 될 것이다. 북부 고지 설산의  눈이 녹은 깨끗한 물과 정성스레 
만든 보리 엿기름의 신비로운 조화가 스코틀랜드만의 독특한 맛을 낸다. 


4. 북부 아일랜드 


영국 본토에서   바다로 21km  떨어져 있는   북아일랜드는 통상  얼스터
(Ulster)라고 불리고 있다. 1922년 이후 영국의 일원이 된 북아일랜드는 앤
트림(Antrim), 아르마(Armagh), 다운(Down),  페르마나(Fermanagh), 런던
데리(Londonderry), 타이론(Tyrone)의 6개의 주로 구성되어 있다. 

북아일랜드의 수도인 벨파스트(Belfast)는 동부 해안에 위치해 있으며 해양 
무역 및 조선업 그리고 현재는 세계 최대의 의류 생산 중심지가 되었다. 

한편 영국 내에서 가장 큰 호수인 로프네(Lough Neagh) 호수는  북아일랜
드의 자랑거리이며 페르마나와 런던베리를 흐르는 여러 강에는  싱싱한 연
어들이 헤엄쳐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북아일랜드는 또한 바다 경치가 
장관을 이루는데 앤트림 북부에 있는 거인의 둑길(Giant's Causeway)은 4
만 개의 화산 기둥으로 이루어진 절경을 이루고 있다. 

또한 지역적 특성이 뚜렷한 북아일랜드의 계곡들 사이에는  작은 마을들이 
있는데 그 중 유명한 곳으로는 노르만 시대의 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캐릭
퍼서그 마을과 성당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다운 패트릭 마을을 손꼽을  수 
있다. 



앵글로 색슨 시대의 재판 

당시의 판결은 증거로서가 아니라 증인으로서  결정되었고, 불량배로 알려
져 있는 사람은 증인을 구할 수가 없었다. 증인이 없을 때는 물 판결(손발
을 묶고 연못으로 던져 수직으로 가라앉게 되면  무죄)과 불 판결(불에 달
군 쇠를 대고 나타나는 화상의 정도를 가지고 죄의  유무를 결정) 등 가혹
한 방법으로 재판이 진행되었다. 



토지 대장 둠즈데이북(Domesday Book) 

둠즈데이란 기독교의 최후의 심판일을 의미하는데, 토지 대장의 내용이 최
종적인 권위를 갖는다는 것을 뜻한다. 윌리엄 1세는 지세의 징수액이 충분
치 못하자 전국의 토지  현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였다.  조사원들이 전국을 
다니며 지주들의 이름뿐만 아니라 소, 돼지  등의 숫자까지 정확히 기록했
다. 예를 들어 림프스필드 지역의 영주 직영 농지는 쟁기가 5개, 소 5마리, 
농노 15명, 방앗간 1개, 양어장 1개, 교회당  하나, 목장 4에이커, 돼지 150
마리를 기를 수 있는 삼림, 삼림에는 매의 둥지 2개 등, 꼼꼼하게 작성되었
고 지주들은 이러한 봉건적 억압을 ‘노르만의 멍에’라 욕하며 이전의 앵
글로색슨 시대를 그리워했다. 



처녀 여왕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 시대에 영국은 섬나라에서 대영 제국으로 성장할  터전을 마련
하였고, 문화면에서도 황금 시대로 셰익스피어,  베이컨, 스펜서 등의 수많
은 작가와 학자들이 속출하였다. 여왕은 모든  사람에게 영광의 상징이 되
었으나, 결혼에 대해서 국민의 의사를  수용하지 않았다. 스페인의 펠리페,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등의 구혼과  구애를 거절하였는데 결혼에  대한 
공포감이 있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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