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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세르비아
게시물ID : history_2363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역둔토
추천 : 2
조회수 : 1151회
댓글수 : 10개
등록시간 : 2015/10/08 22:12:05
 
한일간의 사례처럼 이웃국가사이에 다사다난 한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 두 나라는 다사다난이라는 말도 부족할 정도죠..
 
오스만제국이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하여 그들의 통치에 틈이 생겼을 1880년대에는 세르비아-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불가리아 인의  종교적,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고 남슬라브 단일의 혈통이라는 믿음을 강조하며
유고슬라비아 통일운동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이 일어나던 시기에도 세르비아-불가리아인 사이는 마케도니아 영토를 두고 경쟁적이었고...
가톨릭이 주류인 크로아티아 정당들은 정교회를 밎는 세르비아인을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는 분위기도
팽배했습니다. 그럼에도 1900년대에 세르비아의 반오스트리아-반터키 정책에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불가리아
인들은 세르비아에 희망을 걸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이중제국이 붕괴된 1918년 이후에 성립된 유고슬라비아에서 종교적,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닳게 됩니다. 1920년대 초반에는 세르비아-크로아티아 정체성을 창조하려고도 했지만고 크로아티아인의 주도 아래 왕국을 연방화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두 슬라브 형제는 너무 오랜기간 떨어져 살아왔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기에는 아마 시간이
너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대세르비아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유고슬라비아 중앙정부에 크로아티아가 적응하기 바라는 것은 무리였을겁니다.
더욱이 1920년대 후반에 크로아티아 지도자 스테판 라디치가 암살된 후에는 구색뿐이던 의회가 폐지되고
군주독재가 실시되는 유고슬라비아에서 슬라브민족의 단결은 요원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Ndh_1941.png
 
이런 갈등이 2차대전에서는 유고슬라비아에서 떨어져나온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가톨릭교도들과
파시스트단체인 우스탸샤에 의해 60만명에서 70만명 정도 학살당하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이 학살은 가톨릭 대주교가 연관되있기도 했고 강제개종, 사제들의 가담등 종교적인 동기가 상당히 작용했습니다.
 
티토가 이끌던 공산유고를 거치면서 이 기억이 희석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던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억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 법이지요. 유고내전, 특히 보스니아 내전시기 세르비아 지도자들이
민족학살을 선동하며 이때를 언급했거든요.
 
"크로아티아인이 또 우리를 죽이러 올거다."
 
진정한 피해자는  보스니아 무슬림들일 것 같습니다.  그때나 이때나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보스니아_헤르체고비나의_행정구역_지도.png
데이턴협정으로 분할된 보스니아
보스니아 내전의 결과 크로아티아와 무슬림계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세르비아계의 스로프스카로
나뉘어졌습니다. 간간히 이 지역을 아예 분할하고자 하는 세르비아계의 움직임이 뉴스에서 보입니다.
세르비아계는 크로아티아-무슬림에게 숫적으로 모자란 연방체제를 해체하고 세르비아와 통합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미국과 EU가 보장한 데이턴협정에 의해 보장된 분할에 대한 도전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여기에 크로아티아도 세르비아와 스로프스카의 야합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고요. 그렇다고
세르비아가 미국, EU, 크로아티아를 상대로 결전을 벌이기에는 후원자인 러시아는 너무 멀리있고,
몬테네그로마저 세르비아와의 연합을 버려 내륙국으로 전락한 지금은 러시아의 대규모 지원을 기대하기도
어려운 실정입니다.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관계는 나아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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