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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대단하다
게시물ID : readers_2367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1211001
추천 : 1
조회수 : 29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01/20 09:5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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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대단하다. 나는 오늘 처음으로 그녀의 눈물을 보았다. 붉게 충열된 눈과 무언가에 막힌 듯한 목소리, 상기된 얼굴. 평소와 같았지만 나는 그녀가 눈물을 흘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일이 아니면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녀의 눈물은 나에겐 적잖은 충격이었고, 그녀를 눈물흘리게 만든 죽음이 나의 가슴에 내려 앉았다. 


나는 그를 모른다. 얼굴을 본 적도 없고, 이야기를 나눠 본 적도 없으며, 그 역시 나를 모른다. 단지 나는 그의 이름만을 알 뿐이고 그는 나의 존재 자체를 몰랐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는 나를 알 수가 없다. 그런 그의 죽음은 사실 나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해야 옳았다. 순간 순간 죽음으로 나아가는 수많은 이들 속에 그저 내가 이름을 알고 있는 누군가가 추가된 것 뿐이었다. 그렇기에 난 그의 죽음을 들은 직후에도 웃으며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형식적인 안타까움을 내비칠 뿐이었다. 그랬다. 그의 죽음에 대한 나의 조의와 안타까움과 약간의 질책은 모두 형식적인 무언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그녀의 눈물을 보았고, 그의 죽음은 이상하리만치 깊숙히 나의 몸 속으로 들어왔다. 


  "나 이거 하나만 해줘.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야. 그냥 인터넷뱅킹 어플 하나만 다운 받으면 되는 일이야. 이 은행 통장이 없어? 에이 그냥 하나 만들어. 그냥 10원만 넣어놔도 아무런 문제 없어. 해 줄거지? 별로 어려운 것도 없잖아. 나도 웬만해선 이러고 싶지 않지. 아휴 주말에도 쉬지도 못하고 이거 부탁하러 다녀야 된다니까. 완전 외판원이야 외판원. 그냥 인터넷 뱅킹 신청하고 어플만 다운 받으면 돼. 로그인하면서 이 직번만 입력하면 된다니까. 정말 어려운 거 하나도 없어. 나도 정말 남편만 아니면 이런 거 안 하지."


K는 인터넷뱅킹 등록 방법이 적힌 손바닥만한 크기의 전단을 주며 내게 말했다. K와 나는 그저 스치며 얼굴을 본 사이에 불과했고, 오늘 처음으로 대화를 나누는 사이였다. 사실 K가 나에게 이런 부탁을 하지 않았다면 K와 나의 대화는 미래로 미루어졌을 일이었다. 내가 거래하지 않는 은행이었고, 거래를 원하지 않는 은행이었기에 사실 나는 거절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얌전히 전단을 받아 들고 억지섞인 웃음을 지으며 알겠노라고, 월요일에 은행이 문을 열면 가서 통장을 만들겠다고 대답했다. 그런 내게 K는 계속해서 별 것 아닌 쉬운일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K는 그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었음에도 그를 주제로 형식적인 대화조차 꺼내지 않았다. 


참으로 이상한 날이지 않은가. 이름 밖에 몰랐던, 소식을 듣지 않으면 떠올릴 일 조차 없는 누군가의 죽음을 듣고, 마주치지 않으면 서로의 존재조차 잊고 지냈을 이가 나에게 부탁을 한다. 


시간이 점차 흐를수록 가슴이 천천히 내려 앉았다. 심장이 단단히 굳어지는 것 처럼 답답해졌고 아래로 아래로 천천히 내려 앉고 있음이 느껴졌다. 답답해졌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답답함이 나를 괴롭혔다. 


그녀는 왜 그의 죽음에 우리 앞에서까지 눈물을 보였을까. 왜 늘 철저히 자신을 숨기던 그녀가 충격받은 얼굴을 감추려들지 않았을까. 그와 그녀가 각별한 사이였다면 왜 그녀는 그가 죽음으로 내몰리는 순간까지 그의 사정을 알지 못했을까. 그가 살아있었다면, 평생동안 그녀가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일이 있었을까. 내가 그를 떠올리는 일은 있었을까. 죽음은 참으로 대단하다. 






출처 일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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