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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담] 용산 회고록 - 육체노동(1)
게시물ID : computer_23719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미광
추천 : 3
조회수 : 388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5/04/23 16:54:12
그레이트 하고 댄져러스한 대학의 첫 학기를 마치고 방학이 되었다.
'대학에 가면 니 하고 싶은대로 해라' 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받들어서
아침엔 소주, 점심엔 맥주, 저녁엔 막걸리로 채우다 보니,
막상 학교에 나가면 교수님이
'넌 누구냐? 도강 들으러 왔냐?' 라고 하실 정도였다.
그리곤 다시 출석부에 체크된 가위표를 다시 꼼꼼히 확인해 보시곤
'니가 전설의 그 놈이냐 허허...' 라고 혀를 차시며 수북한 가위표 뒤로
체크 표시 하나를 스윽 그려 넣으셨다.

하지만 학점이나 출석과는 상관없이
등록금은 '니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방학에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조금이라도 보태 두어야 했다.



1.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나고. '학생'이라는 타이틀을 달 수 없어서
졸지에 집에서 쌀과 라면을 축내며 꼬추나 하루종일 긁어대는 반 백수 신세가 된 나에게
아는 형이 용산에서 일을 해 볼 생각이 없겠냐고 넌지시 물어 보았다.

당연히, 나는 별 생각 없이 돈을 준다면 어디든지 달려가겠습니다 헤헤- 거리며
당장에라도 사장님의 구둣발을 햝을 자신감이 충만해졌다.
'형. 그거 면접도 보는 거에요?'
'아니, 그런거 없어. 그냥 와서 일하면 돼. 별거 없지?'
'컴퓨터 관련일 맞아요?'
'어- 음... 맞아!'
그 때... '어- 음' 뒤로 보이는 점 세개에 주목을 했어야 했는데...
사실 당시에는 내가 햝게 될 사장님의 구둣발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2.
그래도 최소한 좋은 인상을 주려고, 나름 좋은 청바지와, 나름 좋은 빨간 반팔 티셔츠와, 나름 괜찮은 노란 플랫 워커를 신고 갔다.
그 나름 좋은 것들의 조합은 내가 원빈이 아닌 탓에, '미드님- 찐따 하나가 눈갱 갑니다' 소리를 들어도 무색할 게 없는 확실한 총천연색 RGB의
패션 브레이커의 모습이었다.

용산까지 가는 길은 두근두근 했다.
용산! 컴덕후의 성지!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슈퍼처럼 쌓아두고 판다는 그 곳!
중-고딩때 주변 친구들이나 아는 사람들의 컴퓨터를 조립한다고 자주 찾아간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일을 하기 위해서 갈 줄은 몰랐다. 헤헤.
이제 엄마한테 '이 백수시끼 그만 쳐놀고 나가서 일해!'
라며 덜 익은 반댓편으로 뒤집히는 일도 이젠 끝이라는 것에 나름 기분이 좋아졌다.

하루에 컴퓨터를 100대 쯤 조립하나? 예쁜 여자들이 손님으로 오겠지? 열심히 일하면 돈도 더 주겠지?
그런 기대감으로 두근두근 하면서 도착한 그곳은.
차암 아쉽게도-

'수입유통사 창고' 였다.



3.
'형 이러긔 있긔 없긔?'
'컴퓨터 관련일 맞다고 그랬잖아.'
'이건 아니잖아! 이 가녀린 나의 모습을 보라고! CRT모니터 하나도 제대로 못들거란 말야! 컴퓨터는? 예쁜 여자 손님은?'
'이 멍청이가... 뭔 개소리야!'

한창 밖에서 네 살 터울의 형의 멱살을 잡으며 '아이고 오늘은 이걸로 목살 파티나 해야겠네' '오늘 니 곱창에 뭐 넣지 마라 내가 뽑아 먹을텡께.'
하며 옥신각신 하고 있는데, 사장님이 직접 나오셨다.
'오늘 일 하기로 한 사람인가?'
나는 꼴 사나운 모습을 보여준 것에 적잖이 당황스러워 나도 모르게 '아닙니다. 오늘 어떤 일인지 살펴보고 결정하겠습니다' 라는 회심의 팅기기를
해보지도 못하고 '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라고 외쳐 버렸다.
'그래. 처음이니까 잘 해봐. 니가 얘 오늘 하루는 잘 챙겨주고. 내일부터는 혼자 할 수 있게 해놔.'
라고 너털 웃음을 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사장의 구둣발을 햝겠다는 나의 강력한 의지는 형과 싸우면서 소멸된 상태였다.

나는 내가 원하던 대학에 가지 못하게 된 것 보다도 더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어야 했고,
그 형은 새로운 후임 노예를 구했다는 사실에 제삿상 돼지머리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때 천원을 뾰족하게 말아 콧구멍에 찔러넣고 고사를 치뤘어야 했는데.



4.
일 자체는 어려울 것이 없었다. 당연하지. 완벽하고 완벽한 육체 노동인데.
소매점이나 도매점에서 연락이 오면, 경리누나가 전표를 출력해 주고,

그럼 거기서 일하는 다섯 명의 배달 알바가 용산전자상가 전 지역에 직접 배달을 나가는 것이다.
창고에는 수백-수천 박스의 시디롬, 모니터, 그래픽카드, 케이스 등등... 별의 별게 다 있었다.
아니 그냥 이거 배달 하지 말고 조립해서 팔기나 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건 미친 짓이야 난 여기서 빠져나가야 겠어! -라고 하기엔 이미 해버린 말이 있어서 그냥 일을 하기로 했다.
나 같은 녀석이 굉장히 호구 되기 좋은 케이스다. 그냥 그 때 째버렸어야 했는데...
그래서 오늘은 형을 따라 다니면서 꿀빨고 괴롭혀야지 라고 생각했지만...
'너 용산 많이 다녔잖아'
'응 그렇지'
'그럼 일해 임마. 알아서 비슷한 곳에 있는 업체 전표 모아다 물품 챙겨서 뛰어'
'쓰벌...'
인력이 모자라서 난 바로 현장에 투입되었다.



5.
그래도 자주 용산을 왔다갔다 했던 탓에 기가 막히게도 주소와 배달 시스템을 쉽게 이해해 버렸고,
'처음이니까 잘 봐주세요 히잉 뿌잉뿌잉-' 하는 것은 들어 먹힐리가 만무했다.
점심시간에 연락하는 몇몇 업체들 때문에 아르바이트 중 몇 명은 밥도 못 먹고 출동을 해야 할 지경이었고,
몇몇 곳은 이게 사람이 다닐 거리라고 생각이 되지 않을 정도로 먼 곳도 존재했다.

하루의 고단한 일을 마치고. 오늘은 집에 가서 뭘 해야 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아니 그저,
이런 일로 날 꼬드긴 돼지형을 때려야 겠다는 내 거친 생각과,
2학기 등록금의 불안한 미래와,
그걸 지켜보는 돼지같은 형이 있을 뿐.

'형아야. 왜 나를 컨택한거야?'
'너 존나 좋은 호구 같아서'
'돼지가 동물치곤 똑똑 하다더니... 형이 그래서 똑똑하구나. 쓰벌... 근데 이거 시급은 얼마임?'
'2500원. 식대 포함'

그 날, 나는 진심으로 형을 걷어 찼다. 울면서 걷어 찼다. 물론 아무리 쎄게 차도
니가? 하는 표정으로- 가소롭다는 듯이 비웃는 저 비곗덩이를 보면서 나는 울었다.
시발!!! 니가 형이냐아아아아아아아아아!!!




- 각색이 좀 있습니다. 저는 형한테 예의를 잘 지킵니다. 하지만 그 날은 진심으로 때렸음. 존댓말 쓰다가 진심으로 반말로 바뀌었음.
- 용산이라는 '컴퓨터와 관련된' 장소라서 컴게에 글을 씀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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