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초여름 저녁,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날은 어둑어둑했다. 그날도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만원버스를 탔다. 비 때문에 가득한 습기에 사람은 북적대고, 유리창은 부옇게 김이 서려 창밖이 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되도록 버스 뒷쪽으로 파고 들어간 나는 어느 대머리 양복쟁이가 앉아 있는 통로에 서게 되었다. 얼굴은 참 젊어 보이고 서글서글한 인상인데 웬일인지 윗머리가 반질반질한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릴없이 먼 거리를 서서 가야 하는 터이기에 유리창에 서린 김을 손으로 닦아 내고 어두워서 잘 안보이나마 창밖으로 지나가는 경치를 감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 앞에 앉은 대머리는 수시로 자기 머리를 쓰다듬는 것이었다. 내가 내려다 보는 낌새가 났던지 자기도 올려다 본다. 눈이 마주치자 대머리는 씨익 웃어보인다. 그 웃음이 왠지 불쾌했던 나는 모른체 하고 다시 창 밖만 바라 보았다. 잠시 후 대머리는 다시 자기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나마 남은 머리카락 갖고 스타일에 굉장히 신경쓰는 녀석이로군, 하며 내려다 보다가 또 눈이 마주쳤다. 또다시 씨익 웃어보이는 대머리. '근자에 목욕탕이고 버스고 간에 호모가 많다더라'던 소문에 불안하기도 하여 신경쓰고 싶지 않았으니 수차례 이렇게 반복이 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다시 한번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어이가 없기도 하여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아, 왜요?" 라고 해 버렸다. 대머리는 여전히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는 채로 씨익 웃으며, "아저씨, 콧김이 참 세시네요." 픕, 프하하하하... 아아, 쪽팔려. (마침 한쪽 코가 막혔던 터라 내 콧바람은 더 셌을 테고.. 대머리에 습기찬 바람이 닿으니 꽤 서늘한 느낌이었을 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