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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푸는 식민지시기 농촌 상황
게시물ID : history_2375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MrGuinness
추천 : 10
조회수 : 1055회
댓글수 : 17개
등록시간 : 2015/10/15 01:3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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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기 농촌이라하면 흔히들 순사나 앞잡이들이 농네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쌀이나 소, 심하면 쇠붙이등을 총칼을 휘두르면서 강탈해가는 이미지로 다들 알고 계실겁니다. 그리고 이는 일제가 긴박해지는 40년대에는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게 30년대 이전으로 가면 이러한 이미지를 투영하기에는 너무나도 고민이 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1910년,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일본은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지세제도와 토지소유권을 확정지으며 미곡 증산과 상품화에 시동을 걸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쌀이라는 것은 단순히 먹고살기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귀중한 상품으로써 자리잡게 된 것입니다. 특히 산업화가 시작된 일본은 농민인구 감소와 노동인구 폭증으로 인하여 쌀값이 폭등하였고, 이는 조선에 땅을 소유한 지주들에게는 크나큰 기회였습니다. 거기에 근대 농업기술, 그러니까 화학비료라던가 새로운 농기구들이 지주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들어오면서 조선의 쌀생산량은 크게 증가합니다. 엄청난 양의 현금이 식민지 조선으로 흘러들어오고 그에 따라 농촌에 화폐경제가 유입되기 시작합니다.

 쉽게 예를 들자면 옛날에는 논 한마지기에 100석을 거두면 소작농이 30석을 가져가면 나머지 70석은 지주가 가져갔는데 이게 이제는 논 한마지기에 1000석을 거둘 수 있게 됩니다. 그에 따라 소작농은 옛날보다 소득이 증가했습니다. 그리고 지주들은 어마어마한 생산량에 흡족합니다. 그런데 조선에서 팔면 한 석당 만원인 것이 일본에서는 10만원에 팔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지주라면 조선에다 쌀을 파시겠습니까? 아니면 일본에다 쌀을 파시겠습니까? 이러한 쌀 수출은 소작농들에게도 어느정도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옛날에는 쌀 어느정도를 떼어주면 끝이었는데 차라리 쌀보다는 소작료 지급이 지주랑 소작농 양쪽 입장에서 더 나은 것이었습니다. 지주는 쌀값은 천정부지로 오르는 판에 차라리 쌀보다는 현금으로 지불하는게 나았고 소작농들은 어차피 내다팔지도 못할 쌀(이는 수탈보다는 농민의 한계, 그리고 인프라 부족으로 보시면 됩니다.)로 먹고사느니, 현금으로 받아 비록 맛은 별로지만 2석에 1천원인 중국산 좁쌀을 배터지게 사다먹고, 도시 놀러가서 물건 사고, 애들 학교보내는 것이 낫게 된것입니다. (물론 이는 농민들이 원했다고 보기 보다는 화폐경제의 유입이 초래했다고 보면 됩니다.) 왜냐면 세상은 더 이상 쌀이 화폐가 아닌 세상이 되어버렸으니까요.

 이렇게 누이좋고 매부 좋으면 좋겠습니다만은, 그러면 암울했던 식민지시기 농촌사회의 처절함을 묘사하는 소설들이 나올리가 없죠. 이러한 농촌의 자본주의 도입은 자영농들에게 엄청난 타격을 줍니다. 옛날에는 그래도 쌀농사 지으면 1년은 먹고살고 부족한거 있으면 내다팔거나 직접만들곤 했는데 이제 그게 힘들어진겁니다. 아무래도 지주들이 더 많은 땅, 더 많은 자본을 바탕으로 자영농들보다 더 많고 더 품질 좋은 쌀들을 시장에 내놓고 또 싼 가격의 중국산 좁쌀들이 유입되면서 자영농들이 경작한 쌀들은 그 가치를 잃어버린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농사에 필요한 농자재들은 더 이상 쌀을 받지 않고 화폐를 받게 됩니다. 그럼 짚신이라도 만들어서 시장에 팔아야하는데, 시장에는 이미 짚신보다 더 싸고 질 좋은 고무신들로 가득차게 됩니다. 결국 자영농들은 노오오오력을 해서 지주들을 따라잡던지, 아니면 빈민이 되는지 갈림길에 서게되었습니다.

 소작농들도 이러한 문제에 영향을 받습니다. 아무래도 농사하는 것이 한번의 추수로 인해 1년을 먹고사는 게 결정되다보니 엄청난 노력을 들이지만, 농사라는 것이 매년 잘되는 것은 아닙니다. 풍년이 들 수도 있고, 흉년이 들 수 있는 것이 농사입니다. 그런데 그 농사가 망쳤다? 지주라면 투덜거리겠지만 소작인 입장에선 청천벽력인건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입니다. 옛날이라면 산에가서 고사리를 캐고 짚신이나 내다팔겠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그런 길은 다 막힌지 오랩니다. 거기에 다음 농사를 위해 씨앗이나 비료, 농기구 등, 농사에 필요한 것을 사야합니다. 근데 지금 돈이 없네요? 결국 돈을 빌려야하는데 은행에서 대출? 그건 도시의 모던 보이나 가능합니다. 결국 자기가 알고 가장 친근한 존재인지주로부터 빌릴 수 밖에 없고 소작농은 지주들에게 더욱 예속됩니다.

 20년대 후반이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 집니다. 그 동안 쌀값은 무섭게 올랐지만, 그 쌀들이 시장에 엄청 풀리면서 결국 떨어지는 현상을 겪게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운 대공황이 겹치면서 모든 게 심각해집니다. 팔게 쌀 밖에 없는데 그 쌀값이 미친듯이 떨어지면서 지주나 농민들이나 고통을 겪게 됩니다. 특히 저축은 커녕, 먹고살기 바빴던 농민들에게 더욱 타격이 갑니다. 평생동안 벼농사만 하면서 살았는데, 지주는 벼농사 대신 다른 농사로 넘어가거나 아예 다른 업종으로 돌아섰습니다. 거기에 농사를 짓기위한 농자재 가격들은 엄청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럼 도시라고 가서 막노동이라도 해야하겠는데 도시의 경제상황도 영 안좋습니다. 안그래도 심각했던 양극화가 여기서 제대로 터져버리게 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농민들은 무정부주의나 공산주의 운동등, 당시에는(물론 일본 입장에서) 사상적으로 위험한 운동에 발을 들이기 됩니다.

 이렇게 되자 가장 큰일나게 된 것은 다름아닌 조선총독부였습니다. 비록 도시화를 이루었다 하더라도 조선반도의 조선인 대다수가 농민이었고 이들의 불만은 자칫하면 안정기에 접어들던 식민통치에 크나큰 불안을 조성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부랴부랴 농촌경제 안정화를 위하여 개입을 하기 시작하나, 그 삽을 제대로 뜨기 전에 파시즘, 군국주의적 행보를 보이게 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농촌의 수탈이 나타게됩니다.
출처 이송순 1920~30년대 전반기 식민지 조선의 농가경제 분석, 2015 사학연구
이송순 1910년대 식민지 조선의 농가경제 분석 2011 사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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