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달이 없다. 집에는 발코니라 부를 만한 야외 공간이 하나 있다. 2층 구석에 남향으로 트인 그 공간은 해를 정면으로 받아 요 며칠 쌓였던 눈도 금새 녹았다. 항상 잠궈두는 서재 한 켠의 문을 연다. 슬리퍼를 얼추 발에 끼워 신고 두세 발짝을 걸으면 바로 오른쪽에는 위로 구부러진 곡선의 반만 떼온 듯이 완만한 집 지붕이 있다. 그 지붕에 팔꿈치를 걸치고 정면을 바라본다. 한 눈에 들어오는 건 좌측의 13번 국도와 볏대 밑만 가지런히 남은 논들, 도로 옆 계량소의 네온사인 가까워서 뭔 지 알 수 있는 건 햇빛을 받아 잘 자란 집 앞 정원수와 나무에 가려진 울타리 어렴풋이 보이는 건 논과 국도 사이에 자리잡은 열 걸음이면 끝날 법한 작은 다리다. 그리고 이 모든 걸 경계선 없는 밤어둠이 감싸고 있다. 밤이 다 그렇겠지만 여기 이 풍경에서도 다채롭던 색깔 위로 깜깜함이 내려앉은 모양새다. 그 와중에 송곳으로 뚫은 듯 점점이 빛나는 빛구멍이 시야에 세네 군데 보인다. 달이 없는 오늘은 어둠이 정말로 까맣다. 빛은 콕 찍은 점에서 단추구멍만한 크기까지 점차 몸집을 키운다. 기껏해야 단추구멍이다. 그러나 그 작은 빛은 지나가는 차에 잠시 지워졌다가 이내 나타나 넘실거린다. 자정이 넘도록 잠이 안오면 이따금 발코니에 나와 밖을 본다. 요즘이 아니면 언제 여길 나와볼 수 있을까 매번 생각하면서 삶은 바쁨과 바쁨의 연속이다 오늘 아침 여섯시에 일어났고 내일도 아침 여섯시에 일어나겠지만당장 침대에 눕기보다 발코니에 나와서 시간을 보내는 건 내가 원하면서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하는 걸 할 수 있는 삶이라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짐을 깨닫는다 사람은 내가 말한 대로만 듣지 않고 상황은 내가 의도한 대로만 흐르지 않는다 눈치라는 게 참 뾰족한 가시 같다 그래서 이 곳 발코니에서의 밤은 제발로 서울에 올라가 제손으로 가시박힌 옷을 입으려는 내가 옷 안에 받쳐입고자 뜨고 있는 속옷이다 앞으로 서울에 올라가기 전에 남은 밤은 열 하고도 세 밤 그 중 오늘처럼 달 없는 밤은 몇 번이나 될까 쌩 하니 차 한 대가 도로를 지나간다. 목적지에 이르기 전까지 거쳐야 할 수많은 좌회전과 우회전을 운전자가 일일이 기억하진 않는다. 그러나 그 좌회전이 하나라도 비면 차는 먼 길을 돌아가야 한다. 나는 오늘 밤 모퉁이 하나를 돌고 있다. 이렇게 가면 더 빠르게 도착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