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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 - 추모] 마이클을 추억함
게시물ID : humorbest_23795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_-)
추천 : 49
조회수 : 4683회
댓글수 : 4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09/06/29 19:37:05
원본글 작성시간 : 2009/06/29 18:52:49

[추모] 마이클을 추억함

2009.6.29.월요일
 

중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같다. 지금과는 달리 삐쩍 마르고 키 크고, 책 좀 많이 읽는 것 외에는 별 특별할 것 없었던 나는 다소 건조한 유년기의 막판을 보내고 있었다.

무엇을 좋아해야 할지, 뭐에 열정을 쏟아야 할지, 그런 것들은 아직 어린애였던 내 삶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던 시절이다. 취미라고는 엄마가 사준 작은 카세트 라디오로 팝 음악을 조금씩 듣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우연히, 티비에서 아래의 비디오를 보게 되었다.

절도와 탄력, 유연함이 뒤섞인 평생 처음 보는 동작들. 풍부한 표정과 흡인력. 수려한 외모, 그리고 입이 딱 벌어지는 신비의 문 워크. 마이클 잭슨이라는 가수였다.

나중에 안 거지만 이 화면은 미국에서 소울, 알앤비 등 흑인 음악으로 유명한 모타운 레코드의 창립 25주년 기념 무대다. 사실 이건 립싱크였다. 무대도 공연을 하기에 최적화 된 상황이 아니다. 따지도 보면 백 댄서도 화려한 조명도 없는 썰렁한 무대에서 삐쩍 마른 가수 혼자 입 벙긋거리며 오락가락 하는 광경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현장의 청중을 압도했고, 이어 이 방송을 본 전세계의 젊은이들을 흥분시켰다. 이때부터 마이클 잭슨의 신드롬이 지구 전체를 휘감기 시작했고, 우리들 역시 이 날을 그가 팝의 황제를 향해 첫 발을 내디딘 순간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나의 마이클 잭슨에 대한 추종과 모방도 그날로부터 시작되었다. 연예 프로그램을 할 때면 티비 앞을 지키고 서 있다가 빌리진이나 빗잇 등의 뮤직 비디오가 나오면 급히 비디오의 레코드 버튼을 눌렀다. 대부분 앞이 조금씩 잘렸지만 얼마 안가 나는 마이클의 곡 몇 개가 연이어 붙은 어설픈 뮤직 비디오 모음집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 마이클을 흉내내기에 적당한 몸매를 가지고 있던 나는 어디선가 발목이 나오는 짧은 블랙진과 빤짝이 장갑을 구했고, 또 Beat it 비디오에 마이클이 입고 나온 것과 비슷한 빨간 자켓도 마련했다. 그 김에 라이브 비됴 함 보자.

인터넷이 아예 없었으니 당근 온라인 쇼핑몰도 없던 그 시절에, 중학교 1학년인 내가 그런 것들을 어떻게 구했는지는 이제 기억에서 지워져 거의 불가사의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여하튼 마이클의 어린 시절을 담은 책들, 화보집, 음반, 비디오 영상 등을 닥치는 대로 모으고 섭렵하던 내 모습은 이후에 등장한 빠순/빠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이렇게 마이클에 빠져든 나는 심지어 학교도 저 검은 바지를 입고 다녔고, '감각이 떨어지는' 친구들에게서 짧은 바지 입고 다닌다며 놀림을 당하기도 했다. 동시에 모타운 공연의 분석에 열중하여 얼마 안가 문워크를 포함해 그의 주요 동작을 엉성하나마 대부분 카피하는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문워크를 두고 인간은 저런 동작이 불가능하며, 무대 바닥에 움직이는 벨트를 장착했던 것일 뿐이라는 친구의 주장을, 학교 체육관에서 실제 문워크를 시연하여 일거에 굴복시킨 사건은 아직도 내 삶의 쾌거 중 하나로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이렇게 좋아하고 추종했던 마이클 잭슨. 하지만 나에게 당시 그는 어디까지나 댄서이자 퍼포머였을 뿐이다. 어린 내가 그를 흉내 냈던 것은 그가 열라 멋지고 쿨했기 때문이지 그 이상은 아니었고, 세월이 한 두 해 지나면서 나의 관심은 헤비메탈 쪽으로 옮겨갔다. 문워크를 흉내 내던 자랑스런 기억은 서서히 쪽팔림으로 변했고, 마이클은 그저 잊고 싶은 내 유년의 풋사랑으로 남았을 뿐이었다.

그런 내가 음악인 마이클 잭슨을 다시 발견한 것은 스무살이 넘어서다.


마이클 잭슨은 80년대 초 ‘Thriller’ 앨범을 대 히트시킨 당시부터 이미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즈 등과 동급으로 비견되었다. 그가 단지 댄서에 불과했다면 아무리 인기가 높았다 한들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들과 나란히 놓일 리는 만무한 일이다. 그러나 엘비스도 비틀즈도 모르던 어린 내가 그런 의미를 이해할 리 없다.

헤비메탈만이 음악이라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넘어 다시 다양한 쟝르로 돌아오던 무렵의 어느 날, 나는 박스안에 간직해 두었던 마이클 잭슨의 자료들을 별 생각없이 꺼내 보았다. 아마도 할일 없는 일요일 오후쯤 되었으리라.

그러다가 나는 과거 마이클의 어린 시절의 기록으로 남겨두었던 아래의 비디오를 다시 보게 된다. 마이클 잭슨이 16살 때인 1975년의 공연이다(마침 유튜브에 있길래 붙여 본다. 이 노래도 마이클 잭슨 노래였나 싶은 분덜 있을 거다)

나쁜 음질과 촌스런 의상, 어설픈 몸 동작... 열 세살의 내게는 그저 빌리진의 '댄서' 마이클 잭슨으로 가는 과정의 시행착오로만 여겨졌던 이 시절. 하지만 스무살의 나는 그에게서 가창력과 표현력을 겸비한 뛰어난 R&B 싱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댄서와 엔터테이너 이미지 뒤의 뮤지션, 아티스트로서의 마이클 잭슨을 처음으로 느낀 거다.

그날 이후 나는 갖고 있던 마이클의 앨범과 테잎의 먼지를 털어내고 다시 하나씩 듣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그저 촌스런 옛날 음악으로 생각했던 곡들이, 그간 성장한 나의 귀에 새롭게 받아들여지는 경험은 무척 신선한 것이었다.

물론 '드릴러'는 마이클 잭슨 음악의 정점에 선 앨범이며 거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마이클은 그 이전 이미 15년 가까이 프로 음악인으로 생활해 왔었다는 점과, 그 기간 동안에도 알앤비와 훵크의 전통에 투철한 흑인음악 뮤지션으로서 언제나 최고의 음악을 들려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그제서야 깨닫게 되었던 거다.

그리고 마이클 자신이 빌리진, 빗잇을 포함한 많은 히트곡을 스스로 작사, 작곡했음은 물론 편곡에도 깊이 관여했다는 사실도 이때서야 알게 되었다. 드릴러 직전에 나온 'Off the Wall' 앨범부터 마이클은 거의 전곡을 만들고 프로듀스 하는 등 진정한 싱어 송 라이터이자 아티스트의 지위를 갖게 된다.
 
빌리진 빗잇 등에 비해 80년대 댄스 뮤직 색깔이 적은 대신, 화려하고 세련된 디스코/훵키/퓨전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이전의 대표곡들, 함 감상해 보시기 바란다.

http://www.youtube.com/watch?v=4_hz2am90Hk&feature=fvst
Don’t Stop ‘till You Get Enough (Off The Wall 1979)

아래는 당시로는 파격적인 영상 효과를 담은 비디오라 울나라 티비에도 여러 번 나왔는데, 한 마흔쯤 먹은 분들은 기억날지도 모르겠다. 처음에 나레이션도 나오고 하는데 잘못 링크된 거 아니니 계속 보시길.


Can you feel it’ (The Jacksons, 1980)

그리고는 83년 초 발매된 '드릴러'를 통해 마이클은 과거 쟝르적 특성이 강했던 흑인 음악을 팝의 메인 스트림으로 끌어 올리게 된다. 흑인 음악은 거의 모든 대중음악의 바탕이지만, 그 자체로서는 언제나 백인 음악의 등쌀에 가려 왔던 것이 사실이다. 또 이전의 흑인 아티스트들은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백인 청중의 아이돌로 군림할 수는 없다는 인종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마이클을 통해, 세상은 엘비스와 비틀즈에 버금가는 음악성과 스타성, 그리고 인종의 벽을 넘어서는 매력과 호소력을 가진 이 흑인 아티스트를 만나게 된다. 대중음악에서 흑백의 경계와 한계는 마이클을 통해 처음으로 무너졌고, 이후 랩이나 힙합등 흑인 음악과 문화가 백인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킬 수 있게 된 시금석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음악적 재능과 수많은 명곡들, 그리고 음악사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이후 마이클이 조금씩 쇠퇴의 길을 걸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비록 다음 앨범 는 물론 발매하는 음반의 대부분이 여전히 천만 장 단위의 판매고를 보이며 크게 성공했고 등의 사회적 이슈를 담은 곡들이 국제적으로 히트하기도 했지만, 드릴러의 영광을 재현하는 수준에 까지는 도달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안타깝게 만든 것은 깊어가는 그의 기이한 행동과 병적인 집착이었다. 단순히 유명인의 괴벽으로 치부하기에도 지나친 그의 행동들은 기사거리를 찾는 언론의 관심을 끌었고, 뮤직 비디오와 공연에서는 그토록 쿨하고 섹시하고 자신감에 차 보이는 마이클이 실제 삶에서는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이 조금씩 드러나면서 환호와 추종은 비웃음과 멸시로 변해 갔다.

그가 왜 그렇게 되어 갔는지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너무 어려서부터의 활동, 그리고 솔로 가수로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지나친 성공, 그 과정에서 멀어져 간 형제들과 부모와의 관계가 단초를 제공했을 거라고 보는 시선이 많다.

사실 내가 마이클의 심리 상태에 대해 진짜 우려되기 시작한 것은 아래의 앨범들이 발매되는 모습을 보면서였다.

위쪽의 앨범은 95년에 발매된 히트곡 모음집 + 새 앨범인 2장짜리 CD 다. 필자가 거북하게 느꼈던 것은 내용물이 아니라 표지 디자인이었다. 거대한 마이클의 석상이 세상을 굽어보고 있는 듯한 이 표지. 제 아무리 위대한 아티스트라도 자기 자신을 이렇게 '우상화'하는 디자인을 앨범에 사용한 적은 없다. 나는 현실에서 이런 광경은 김일성 동상 외에는 본 적이 없다.

후자는 2001년에 발매된 이다. 여기서 거슬린 것은 '무적' 이라는 뜻의 앨범 제목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별 생각이 없었겠지만 마이클 잭슨이라면 이 제목이 범상치 않다. 그는 예전에도 당시에도 팝의 황제 자리를 놓친 적이 없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왜 굳이 앨범 표지에 또 저런 단어를 써야 하는가.

사소하다면 사소한 거지만 이런 광경이 끊임없는 그의 기행들과 오버랩 되며, 나는 그가 내적으로 무척 불안해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을 채우려는 것인지 끝없이 이어지는 성형수술로 해가 지날수록 흑인도 백인도, 남자도 여자도 아닌 상태로 변해가는 외모, 또 수술 부작용으로 무너져 가는 코는 대중에게는 놀림감이 되었고, 인터넷의 보급과 발달로 그 정도는 더 심해졌다.


마이클의 외모를 조롱한 합성사진. 패러디에 대해 본지가 비판할 계제는 아니다마는, 외모를 평가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미국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무척 심한 수준에 도달했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최악의 사건은 어린이 성추행으로 법정에 선 일이다. 필자는 솔직히 마이클이 성적인 욕구에서 그런 행동을 하진 않았을 것 같고 그의 어린애 같은 순진함과 미국이란 나라의 풍토가 만나 빚어낸 오해지 싶지만, 여하튼 이 일로 인해 마이클이 내외적으로 엄청난 타격을 받았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 이후로 이제 마이클의 이미지는, 괴짜의 차원을 한참 넘어선 'monster'의 경지에 오르게 된다. 엄청난 부와 명예, 그러나 극도의 결벽증과 비밀에 둘러 싸인 사생활, 개인 놀이 동산과 동물원을 미끼로 어린이들을 끌어들여 침대에서 유린하는, 인간의 얼굴마저 갖지 못한 괴물.

그래서인지, 그나마 가진 재산마저 서서히 잃어가게 된 마이클은 이제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 막 재기를 노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되었고, 끝없는 내리막길의 종착역은 결국 이런 허망한 죽음이었다.

그의 나이 51세. 내가 그의 모타운 비디오를 본 지 26년만이다.


비록 심장마비라는 사인은 나왔지만, 과연 왜 거기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는 아직 조사 중이라고 한다. 가족들은 사인에 의문을 표하고 있고, 재 부검도 실시했다. 아마도 조만간 공식 입장이 나오겠지만, 구체적인 마지막의 상황은 어쩌면 끝까지 미궁 속으로 남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내용과는 관계없이, 나는 마이클에게서 내면과 외면을 너무나 소진시켰고 그 결과 외롭게 무너져 간, 고립된 한 인간의 모습이 느껴진다.

9살 경 데뷔한 이래 마이클의 삶은 숨쉴 틈 없는 긴장감과 불안의 연속이었다. 강압적인 아버지 아래서 마이클과 형제들은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끝없이 무대에 오르고 대중들에게 노출되어야 했다. 유년기나 사춘기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마이클 잭슨 흉내를 내던 나이보다 훨씬 어릴 때부터 그는 이미 프로 가수로 공연을 다니고 있었던 거다.

본인 말에 따르면, 대중의 질타를 받으면서도, 얼굴이 망가지면서도 끝없는 성형수술을 반복한 이유는 나이가 들며 아버지를 닮아 가는 자신이 싫어서였다고 한다. 재능과 매력으로 거대한 성공을 거머쥐었지만 막상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어려서부터 쌓여온 강박관념과 내면적 갈등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알지 못한 채 소년기에서 멈춰 버린 그의 삶.

그런 그의 심장은, 차마 주인이 그 상태로 노년에 접어들게 놔 둘 수는 없었던 것 아닐까.

... 누군가의 뜻하지 않은 죽음을 접하게 되면 우리는 황망해진다. 그가 나와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흔히 작은 상처 하나는 마음에 남곤 한다. 그것들이 모이면 어쩔 수 없이 점점 세상과 삶에 대한 허무감이 쌓여 간다. 우리는 요 몇 해 동안, 크고 작은 그런 상처들을 유독 많이 받았다.

오랜 세월의 노력 끝에 최고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 후 세간의 몰이해와 잔인한 비아냥, 언론의 집요한 감시와 사법 기관과의 마찰 속에서 외로운 삶을 살다 간 마이클 잭슨. 그러나 그가 죽은 그 순간부터 그 모든 것은 다시 진정한 음악 천재를 향한 찬사와 추모의 열기로 돌아서고 있다.

이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니, 어쩌면 비슷한 과정을 거쳐 얼마 전 죽음에 이른 또 다른 한 사람이 떠오른다. 두 죽음이 같은 의미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나는 내가 한때 사랑했던 마이클에게도 의리를 지키지 못했다는, 그리고는 죽고 나서야 이런 것을 쓰고 있다는 데 대한 한 가닥 미안한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뿐이다.

요즘 들어 생각이 많다. 복잡하고 혼란스럽고 때론 잔인한 세상사 속에서 나는 과연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사람일까. 나를 믿는 누군가가 힘들고 외로울 때 옆에 있어줄 수 있는 사람일까.

...열달 내 어린 딸이 자꾸 바지 가랑이를 잡아당긴다. 이제 그만 쓰고 애와 놀아주러 가야겠다.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이 작은 사람과의 의리. 세월이 지난 후 다시 후회를 남기면 안 될 일이니.

마이클. 멀리 안 나가오. 잘 가시오.

딴지 전임 오부리 파토 ([email protected])
트위터 : pato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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