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나이가 딱 두 배 많은 담임은 글씨체가 참 발랐다. 교과서의 똑 부러지는 글씨체와 닮긴 했지만 그렇다고 딱딱하지는 않았다. 칠판에 가까이 붙어서 보니 생각보다 글씨 크기도 컸다. 담임은 국어 과목과 잘 어울리는 글씨체를 갖고 있었다.
나는 담임이 ‘개’자를 쓰는 순간을 기다렸다. 처음 ‘개’자는 글씨체를 감상하다 놓쳤다. 담임이 보고 있는 참고서를 훑어보니 기회가 별로 없었다. 나는 담임과 칠판 사이의 공간에 서서 담임이 필기하고 있는 손에 내 손을 넣었다. 그리고 담임이 ‘개’자를 쓰자마자 힘을 주었다. 칠판에 ‘개미’가 써졌다.
아무 것도 모르는 담임이 어리둥절해 하는 건 당연했다. 담임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미’자를 지우고 ‘념’자를 쓰려 했다. 하지만 나는 다시 ‘미’자를 썼다. 담임이 자기 오른손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이상하네…”
담임이 다시 ‘미’자를 쓰자 반 아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때 정아가 담임을 향해 손가락질을 크게 하고는 급하게 팔을 내렸다. 이 모습을 그 자식이 잘도 목격해주었다. 정아는 마치 무의식적으로 시선이 갔다는 듯 그 자식을 쳐다보았다. 그리곤 서둘러 교과서에 눈을 박았다. 줄기차게 ‘미’자를 써대던 담임의 손이 분필을 내동댕이치던 순간 그 자식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태풍의 눈 같은 고요가 지나가고 동시다발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플래시몹이라도 하는 양 아이들이 삽시간에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자리에서 고개가 푹 고꾸라지는 애들도 있었다. 뚱기와 나머지 똘마니 하나는 그 자식의 뒤통수만 쳐다보고 있었다. 칠판엔 미처 지우지 못한 ‘개미’가 남아있었다.
급기야 임시 휴교령이 내려졌다. 그래봤자 금, 토, 일 쉬고 월요일에 보자는 얘기였지만, 지금 같은 분위기라면 다시는 학교 그림자도 밟지 않을 애들이 상당할 것 같았다.
나는 패스트푸드점 창가에서 넋 놓고 앉아있는 뚱기와 나머지 똘마니(줄여서 나똘)를 발견했다. 미처 별명을 붙여주지 못한 나똘은 살짝만 건드려도 눈물을 쏟을 기세였다. 뚱기도 냉방병 걸린 사람 마냥 허옇게 질려있긴 마찬가지였다. 나똘이 콜라를 한 입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왜… 왜 하필… 개미일까…? 정말 걔가 나타난 게 맞…” “아닥해라.”
나똘은 뚱기의 말대로 아가리를 닥쳤다. 나는 나똘의 밤톨 같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귀에 대고 말했다. 그래, 정말 나 맞아.
같은 시각, 그 자식은 담임과 함께 병원에 와 있었다. 면봉의 엄마 같은 누나는 담임 손을 붙잡고 눈물만 훔쳐댔다. 어쩐대요, 선생님… 이제 어쩐대요… 담임은 죄인처럼 머리를 조아리며 울먹였다. 꼭 회복해서 일어날 겁니다. 희망을 버리시면 안돼요.
담임과 누나가 병실 밖에서 눈물을 주고받는 동안, 그 자식은 면봉의 팔뚝을 꽉 붙든 채 복화술을 선보이고 있었다. 너 헛소리하면 알지? 그러나 면봉한테는 그 자식이 애써 뿜어내고 있는 위협적인 기운을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이 새꺄, 내 말 무슨 소린지 알지?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자신의 말이 면봉한테 전혀 먹히지 않고 있다는 걸 그 자식은 잘 알고 있었다. 면봉의 시선이 불안스레 허공을 떠돌았다. 나 무서워, 나 어떡해, 나 무서워, 나 무서워 죽겠어! 지금처럼 면봉이 그 자식한테 자기 할 말을 다 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누나가 뛰어 들어왔다. 그 자식이 침대에서 물러섰다. 담임이 들어오자 면봉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선생님, 저 무서워요! 그 자식이 면봉을 향해 이리저리 눈알을 굴렸다. ‘허튼 짓 하지마라’는 말이 그 자식의 눈에서 자막으로 나오는 듯 했다. 담임은 그저 면봉의 손을 잡고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목 다친 게 나으면 일어날 수 있을 거야, 조금만 기다려보자. 미안하다…
그 자식의 머리에서 김이 나오고 있는 게 보였다. 미간에 주름이 가득한 것이 누가 살짝만 건드려도 호랑이처럼 으르렁댈 기세였다. 아니나 다를까,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 자식과 스친 사람은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의 살기어린 시선을 영문 모르고 받아야 했다.
선생과 병원 앞에서 바로 헤어진 그 자식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1시간 뒤, 그 자식은 새로운 룸 카페에 와 있었다. 예전에 룸 카페에서 본 여자애가 들어왔다. 그 자식은 다짜고짜 여자애를 침대 위로 쓰러뜨렸다. 여자애가 싫다고 발버둥을 쳤다. 이번엔 필사적이었다. 나는 여자애가 그 자식의 눈에 들어차있는 광기를 빨리 알아채길 바랐다. 하지만 여자애는 그 자식의 손을 쳐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식식대던 그 자식은 한 손으로 여자애의 양 손목을 잡아 침대에 붙이더니 다른 한 손으로 여자애의 목을 졸랐다. 여자애가 발을 마구 버둥거렸다. 나는 나대로 소리쳤다. 그만해!! 하지만 그 자식의 귀에 들릴 리 없었다. 나는 더 이상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 자식의 손에 내 손을 넣었다. 얼마 뒤 여자애가 자기 목을 감싸 쥐고는 룸에서 뛰쳐나갔다.
그 자식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기 손을 들여다보았다. 두툼한 입술이 괴성을 마구 토해냈다. 곧 점원이 달려와 문을 두들겼다. 그 소리가 마치 그 자식한테 장단을 맞추는 것 같았다.
아침부터 정아는 앉은뱅이책상에 붙어 앉아 또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방구석에서 잠자코 있던 나는 얼굴에 물음표를 띄웠다. 어느 순간 정아가 커진 눈으로 나를 빤히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 확실히, 조, 좀, 이, 이상, 해.” -뭐가…?
정아가 나의 어딘가를 가리켰다.
“흐… 흐려… 졌어.”
정말이었다. 특히 손 부위가 심했다. 손가락은 내 눈에도 잘 보이지 않을 만큼 희미해져 있었다.
“저, 전엔, 아, 안 그랬, 는데.” -역시 대가 없는 건 없구나…
나는 털썩 주저앉았다.
“부, 분신, 사바, 하, 면, 수명, 짜, 짧아, 진다, 더니.” -그게 사람한테만 해당되는 게 아니었나봐… “어, 어, 떡해.” -……
오후가 되자 비가 내리면서 세상이 한결 시원해졌다. 나는 정아를 따라 근처에 있는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비에 젖은 벤치에, 비닐을 깔고, 무지개 우산 아래 앉아있는 정아의 모습이 그렇게 근사해 보일 수가 없었다. 나는 맞은 편 벤치에서 마냥 부러워하다가 빗속으로 걸어 나갔다. 떨어지는 빗줄기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마음껏 몸을 맡겼다. 정아가 앉아있는 곳을 중심으로 크게 원을 그리며 나무와 나무 사이를 누볐다. 신이 났다. 불현듯 정아를 바라보니 이번엔 정아가 나를 부러운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산책을 끝내고 정아네 집에 거의 다 왔을 때 손님이 나타났다. 아니, 불청객이었다. 핏발이 한껏 선 눈으로 정아를 막아선 그 자식은 주위를 의식하며 ‘어디 가서 얘기좀 하자’고 말했다. 정아는 그 자식을 다시 공원으로 데려갔다. 나는 정아 뒤에 바짝 붙어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