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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잘쓴 연애소설이라면 이런게 아닐지....
게시물ID : humorstory_2398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추천 : 11
조회수 : 360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03/08/17 20:38:51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라는 소설의 일부인데요.

이 소설보다가 요즘 나오는 속칭 N-세대 소설이라는, 이모티콘 남발에 꽃미남일진남들과 

띵까띵까 하는 것들을 보면 정말 어이가 없어집니다......개인적으로 말입니다. 

어쩌면 "그래도 우리 귀여니님 책이 더 많이 팔렸어요!" 하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를까봐 덧붙이는 것입니다만.

상실의 시대는 전세계적으로 천만부 넘게 팔린 책입니다.....
(원제가 노르웨이의 숲이죠)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하루키 열풍을 일으켰기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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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존재해서 이렇게 당신 곁에 있었다는 사실을 언제까지라도 기억해 줄래요?"
"물론 언제까지라도 기억하지"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 드는 가을 햇살이 그녀의 어깨 위에서 하늘하늘 춤추고 있었다.

또다시 개 짖는 소리가 들려 왔는데, 그것은 조금 전보다는 훨씬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작은 언덕 같은 곳으로 오르더니 소나무 숲에서 나와, 비스듬한 비탈길을 빠른 걸음으로 내려갔다. 나는 그녀의 두세 걸음 뒤에서 걸어갔다.
"이쪽으로 와, 주위에 우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그녀의 등 뒤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방긋이 웃으며 내 팔을 살며시 잡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남은 길을 둘이서 나란히 걸어갔다.

"정말 언제까지라도 잊지않을 거죠?"
그녀는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언제까지라도 기억하고말고, 내가 나오코를 잊을 까닭이 없지." 



그러나 기억은 확실히 멀어져 가는 것이어서, 나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이미 잊어버렸다. 이렇게 기억을 더듬으면서 글을 쓰고 있으면, 나는 가끔 몹시 불안한 기분에 휩싸이고 만다. 어쩌면 내가 가장 중요한 부분의 기억을 상실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기 때문이다. 내 몸 속에 기억의 변두리라고나 부를 만한 어두운 부분이 있어서, 소중한 기억들이 모두 거기에 쌓여 부드러운 먼지로 변해 버린 것은 아닌가하고.

그러나 어쨌든 지금으로선 그것이 내 손에 넣을 수 있는 전부인 것이다. 이미 엷어져 버렸고, 지금도 시시각각 엷어져 가는 그 불완전한 기억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 뼈라도 핥는 심정으로 나는 이 글을 써나가고 있다.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선 이러는 수밖에는 아무런 방법이 없는 것이다.

오래 전, 내가 아직 젊고 그 기억이 훨씬 선명했던 무렵, 나는 그녀에 관해서 글을 써보려고 시도한 적이 몇 번인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엔 단 한 줄도 쓸 수가 없었다. 첫 한 줄만 나와 준다면 그 다음은 무엇이든 술술 써질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그 한 줄이 아무리 애써도 나와 주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것이 너무나 선명해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너무나 선명한 지도가, 선명함이 지나쳐 때로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였다.

하지만 이젠 안다. 결국에는 - 하고 나는 생각한다. - 글이라는 불완전한 그릇에 담을 수 있는 것은, 불완전한 기억이나 불완전한 상념밖엔 없다는 것을.

그리고 나오코에 관한 기억이 내 안에서 희미해져 가면 갈수록, 나는 보다 더 깊이 그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왜 그녀가 나를 향해 "나를 잊지 말아요" 하고 당부했는지 그 이유도 나는 지금에야 알 것 같다.

물론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 안에서 그녀의 관한 기억이 언젠가는 희미해져 가리라는 것을.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나를 향해 호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를 언제까지라도 잊지 말아 줘요. 내가 존재했다는 걸 기억해 줘요"하고.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견딜 수 없이 서글프다.
왜냐하면 그녀는 나를 사랑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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