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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온전히 혼자인 시간. 오늘인지 내일인지 헷갈리는 시간. 해도 달도 떠올리지 않는 시간. 졸린 눈을 힘겹게 뜨며 침대 위에서 글을 쓰는 시간. 졸리지만 잠들고 싶지 않은 시간. 나와는 다른 시간을 사는 사람들을 생각하는 시간. (이를테면, 지구 거의 반대편에 있는 내 친구들과 가족들은 지금 내가 전화를 건다면 받을 수 있으려나)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 수 없음에 아주 잠시 슬퍼지는 시간. 어쩌면 전화가 걸려오지 않음에 슬픈 걸지도. 나 안 자고 있어요. 말 좀 걸어 줘요.
새벽이 되면 거꾸로 시간을 세기 시작한다. 앞으로 기상 시각까지 다섯 시간, 네 시간, 세 시간...... 그건 마치 시간이 정말 없어지는 느낌이다.
누군가가 그랬지. '감수성 터지는 새벽'이라고. 그런데 나는 시도 때도 없이 감수성이 터지는 인간이라 새벽이라고 해서 별다를 게 없다. 좋아하는 GQ의 강지영 에디터는 고양이도 깊이 잠든다는 새벽 두 시에도 깨어있다는 건, 대체로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나는 새벽에 당신이 보고 싶다. 볼 수 없어도. 옆에 있어도.
감수성
친구가 그런 말을 들었단다. 감수성이란 '상처받을 수 있는 용기'라고.
엊그제 엄마가 많이 울었다는 내 고백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 딸은 감수성이 풍부한 것 같아. 그래서 글 쓰는 걸 좋아하나 보다.'
내게 감수성이란 축축한 무언가다. 수受가 아닌 수水 같은 것. 밤하늘의 달을 보고 슬퍼지는 것. 손을 잡고 걷는 한 모녀의 뒷모습에 잠시 걸음을 멈추는 것. 가슴 떨리는 어떤 문장 앞에서 두 눈을 질끈 감는 것. 나를 향한 말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무도 몰래 입술을 깨무는 것. 여름의 무더운 어느 날, 햇빛이 쏟아지는 길을 걷다가 문득 '지금 이 순간 죽어도 괜찮겠다'라고 생각하는 것. 오늘처럼.
내 감수성은 상처에서 오는 게 맞다. 그래서 축축한 걸지도. 그리고 나는 매번 글을 쓰기 위해 용기 있게 (혹은 바보같이) 내 상처를 헤집고 다시 덮어 도닥이기를 반복한다. 그때마다 감수성은 찰박찰박 자장가를 부른다. 울지 말라고. 꼭 좋은 꿈 꿀 거라고.
출처 | http://blog.naver.com/rimbaudiz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