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립이 기병을 쓰니 중세 기사단을 상상하신거 같은데, 전혀 아닙니다. 신립이 지휘한 기병대는 돌격과 돌파를 위한 중무장 기병대가 아니라 궁기병이었어요. 물론 궁기병도 칼 하나 쯤은 쓸 수 있었지면 기병돌파는 무리입니다. 이는 여진족과의 전투가 전면전이 아닌거에서 기인합니다.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기병의 임무는 도주하는 잔당 처리였죠. 그런 임무엔 궁기병이 더 적합하죠. 활로 쏘고 도주하는 적 상대로 경무장이 유리하니까요
글구 굳이 논밭을 택해도 상관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말이 논에서 느려진다는건 돌격 전술에서 충격력을 손실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궁기병으로 돌격할 생각이 없다면? 아무리 질퍽거리는 논이고 뭐고 말은 사람보다 오래 달리고 빠릅니다. 전혀 상관없는 문제죠
그러나 전투는 달리기 시합이 아닙니다. 게다가 탄금대 전투 시기는 6월초 막 벼농사를 시작하고 한창 논에 물이 차있을 때입니다. 거의 늪에 가까웠겠죠. 그런 논에서는 적토마라도 별수없겠죠... 속도가 아주 현져히 줄고 줄어든 속도만큼 조총의 사선위에 노출되는 시간은 늘어나고 그만큼 조총병은 심리적 압박없이 침착히 조준하고 장전했겠죠. 총알세례가 몇차례 더 쏟아지고 진창속에 쳐박히고...... 치명적이었을것입니다.
신립의 기병을 궁기병이라고 하셨는데... 엄밀히는 경기병이라고 봐야 합니다. 거기에 궁시는 기본 보유 무장 중의 하나인 것이구요. 그리고 경기병 운용은 추격용이 아닙니다. 조선의 경기병은 활을 이용한 원거리 공격과 말의 빠른 기동력을 이용한 기동에 목적이 있습니다. 원거리에서 적의 '진'이 적합한 대형을 갖추기 전이나 취약 지점을 찾아서 활로 공격해 들어가는 것이고, 지속 사격보다는 일정한 무력을 투과한 뒤 적이 진형을 갖추거나 공세로 나오면 빠져나오는 등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비교적 경무장인 경기병이 치고 빠지기가 안된다면 그건 그냥 보병의 일부 병과인 궁병/일반 보병 따위와 차이가 없는 게 됩니다. 난감한 상황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 앞서 언급하신 궁기병은 사실 경기병+활이 결합된 것으로 봐도 좋고, 궁시만이 주력이었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보여집니다. 적의 보병이나 도망하는 적이라면 당연히 근접전에 투입될 수 있는 병력이죠. 단, 그것이 주목적이라 보기는 힘들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말은 사람 몸무게의 2배가 넘는데, 거기에 무장한 사람까지 싣는 것이고, 그렇게 되었을 때 논과 같은 진창에서의 운동성은 일반 보병보다 떨어진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거의 운신이 불가능해지는 상황이 될 가능성이 높지요. 그 부분을 제외하면 농경지가 아닌 일부 공간만으로 이동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기동력을 살리는 것이나 기병 운용의 묘는 전혀 살릴 수 없습니다.
물론 경기병이지만 조선 기병의 특수한상황이 있었죠 세조 전만해도 전 기병의 40퍼센트는 창기병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조이후 무인들의 진급 초점이 궁술에 맞춰지면서 궁시에 집착하게 되고 왜란쯤이 되면 기창등은 있긴하나 운용법이 거의 실전되는 상황에 이릅니다. 편곤의 경우는 왜란 중 명기병이 쓰는 것을 본이후 본격적으로 채택되게 됩니다. 그니까 조선 기병의 상당수는 궁기병이었죠. 즉 왜란당시 조선 기병의 주력무기는 활이라 볼수 있죠. (환도의 경우 최소한의 방어 무기의 성격이 강하고, 사실 전군이 화포와 활이 주력이었죠)
기병 관련 기록은 대부분 경기병 활용 위주의 기록만 남아 있습니다. 표현도 경기가 대부분이죠. 이걸 대부분 날랜 기병 따위로 번역을 해놓아 문제이긴 합니다만... 그외에도 돌기突騎 따위도 보이긴 합니다만... 역사적 용어는 절대 아닙니다. 그리고 조선 전기 기병의 무장에 대한 기록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데 세조 대에 40% 등은 어떤 기록에서 나온 것인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