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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섭 교수님...이번 국정교과서의 최대 제거 목표중하나일듯...
게시물ID : history_2405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잠룡815
추천 : 1/12
조회수 : 1562회
댓글수 : 12개
등록시간 : 2015/11/04 14:55:57
이번에 친일독재세력이 노리는 학계의 뿌리는 전 서울대/연세대 교수님이신  김용섭 교수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분은 사학계의 친일세력의 거두인 이병도파벌과도 대립하셨고

그로인해 결국 서울대에서 연세대로 옮기셨고

오늘날 이분에게서 시작한 것들은 오늘날 강단주류학계에서는 다 인정하고있고 교과서에 반영되어있는 상황에서

(

김용섭 교수님은 조선후기 농업사에서 자본주의 맹아의 존재를 확인하는 등, 이른바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한 한국사 연구를 통해서 식민사관을 극복하시고  한국사의 발전과정을 사적 유물론의 방법론을 원용하여 정리하면서도 ‘계급사관’에 매몰되는 것을 경계하셨었죠.

)

한국내 한민족의 타율적을 강조하고 일제가 우매한 한민족을 이끌어주었다고 생각하는 뉴라이트 친일세력들입장에서도 싫을거고



친일반민족 정부차원에서는 이분을 친북이니 친북의뿌리니 뭐니 하면서 이분 학맥을 없애고 싶어하시니...

김용섭 교수님의 학설이나 거기에뿌리를 둔 관련 내용들이 ...

이번 국정교과서의 최대 제거 목표중하나일듯하다는 생각듭니다.



김용섭 사진
김용섭 
전 대학교수
85세
출생
1931년
2000.07 ~

대한민국학술원 인문사회 제3분과 회원

1984 ~ 1985

프랑스 파리 제7대학 방문교수

1977 ~ 1979

한국사연구회 대표 간사

1975 ~ 1997

연세대학교 교수

~ 1975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교수

1959

서울대학교 강사


http://www.h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278451


...........문화평론가 조우석씨 역시 “분명한 건 국사학계 전체가 문제라는 점인데, 저들은 검정교과서들의 반 대한민국, 반 국가의 성격을 바꿀 자정 기능을 이미 상실했다”며 “국사학자 그룹에서 공유하고 있는 민중사관의 뿌리는 연세대 사학과 교수인 경제사학자 김용섭”이라고 특정인 이름을 제시했다.
 그는 “김용섭은 내재적 발전론으로 국사학계의 신이 되었는데, 내재적 발전론은 현재 민족주의 정서로 발전했고, 국가 대신 민족을 들먹이는 우리민족끼리 신조로 변질된 것이 현재의 검정교과서들의 정신세계”라며 “이상한 환상에 빠져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정치적 파산으로 변질됐다는 점도 지금 기회에 재확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국사학계 친북정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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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한국  2015.10.22. 
    지난 4월 연세대에서 감사패를 받은 김용섭 교수(左) 그가 만든 'NL정서'는 민족 나르시즘이라는 괴물을 만들었다 국사 교과서 좌편향 문제는 그게 '젊은이들의 독극물'이란 점에서 걱정이다. 오죽했으면 4년 전 국방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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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데일리는 위 책의 저자인 정경희 영산대 교수와, 이책을 펴낸 비봉출판사(대표이사 박기봉)의 허락을... 이우성, 김용섭의 4인이 1969년에 제출한 정책연구 보고서 「중 고등학교 국사교육 개선을 위한 기본방향」(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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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heiligkeitsgesetz.tumblr.com/post/90765652552/%EA%B9%80%EC%9A%A9%EC%84%AD-%EA%B5%90%EC%88%98-%EC%99%9C-%EC%84%9C%EC%9A%B8%EB%8C%80%ED%95%99%EA%B5%90-%EC%82%AC%ED%95%99%EA%B3%BC%EB%A5%BC-%EB%96%A0%EB%82%98%EA%B2%8C-%EB%90%98%EC%97%88%EB%82%98-%ED%95%9C-%EB%B2%88-%EA%BD%82%ED%9E%88%EB%A9%B4-%EB%98%90-%EC%A0%95%EC%8B%A0-%EB%AA%BB
    “김용섭 교수, 왜 서울대학교 사학과를 떠나게 되었나”  한 번 꽂히면 또 정신 못 차리는 스타일이라 죽어라 하고 뒤져봤다.   한국 역사학계의 큰 어르이신 연대 김용섭 선생님의 회고록을 읽게 되었다. 그 중에 한국사학계가 식민사관을 극복하지 못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일화를 소개하셨다. 식민사관을 극복하려는 과정에서 일어난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들과의 충돌을 회고하신 부분이다.  역사에 대한 충실한 해석은 건전한 역사관을 가지고 있을 때에라야 가능한 이야기이다. 사관이 엉망인데 좋은 역사 해석은 도출되지 않는다. 그럴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 바보들이나 하는 짓거리다.  “이 강좌는 일제하의 잘못된 역사 연구를 성찰·청산하고, 새로운 한국사학을 건설할 것을 목표로 출발한 것이기 때문에, 한국사 연구의 발전과정을 비판적으로 진실 되게 강의하고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당시의 우리 역사학이 당면한 시대적 사명이었다. 그러므로 한국의 중심 대학이고 일제의 경성제국대학을 해체하고 재건한, 국립 서울대학교의 역사학과가 시도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일이었다. 그러한 점에서 나는 이 강좌에 의욕적으로 임하였다. … 이러한 일들이 있는 동안에 학과에서는 야단이 났다. 아마도 학내·학외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대학과 과에 들어왔을 것이다. 한우근 교수와 김철준 교수는 이 일로, 개별적으로 말씀을 하셨는데, 이로써 학내외의 분위기를 알 수 있었다. 두 분 교수는 그러한 분위기를 종합 판단한 위에서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되었다. 김 교수 말씀은 두 차례 있었다. 한 번은 나를 보고 웃으시며 ”김 선생, 김 선생 민족주의는 내 민족주의와 다른 것 같다.” “예, 그런 것 같습니다.” 그 다음은 노발대발하시며, “이○○ 선생에 대해서 무슨 글을 그렇게 써!” 하시며 질책하셨다. 마치 부하직원이나 제자를 대하듯 나무라셨다. 전자는 경고성 발언이고 후자는 절교성 발언이라고 생각되었다. 한 교수 말씀도 두 차례 있었는데, 연세가 높으신 만큼, 말씀의 논조 방법을 아주 다르게 하셨다. 한번은 두계(斗溪) 선생이 덴리(天理) 대학교 초청으로 일본에 다녀오셨는데, 그 대학교에서 한 교수와 나를 초청하니 두 사람이 상의해서 다녀오라고 하셨다며, “김 선생, 같이 갑시다. 김 선생이 간다면 나도 가고, 안 간다면 나도 안 갈래” 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두계 선생이 덴리 대학교에 가시니, 그 대학교에서 덴리교(天理敎)의 도복을 입히고, 예배에 참석토록 하였다는군.”이라고 덧붙이셨다. 나는 거기는 아직도 총독부 시대구나 생각하였다. 그래서 “선생님, 저는 차멀미를 많이 해서 여행을 못 합니다. 선생님만 다녀오십시오.” 하고 사양하였다. 다른 한 번은 여러 사람이 있는 가운데, “… 김 선생, 우리 이제 민족사학 그만하자”고 하시는 것이었다. 이것이 여러 말씀 가운데 핵심이었다. 말씀은 부드러웠지만, 논조는 강하였다. 명령이었다.” - 김용섭,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 (서울: 지식산업사, 2011), 766-771.

    “이 강좌는 일제하의 잘못된 역사 연구를 성찰·청산하고, 새로운 한국사학을 건설할 것을 목표로 출발한 것이기 때문에, 한국사 연구의 발전과정을 비판적으로 진실 되게 강의하고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당시의 우리 역사학이 당면한 시대적 사명이었다. 그러므로 한국의 중심 대학이고 일제의 경성제국대학을 해체하고 재건한, 국립 서울대학교의 역사학과가 시도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일이었다. 그러한 점에서 나는 이 강좌에 의욕적으로 임하였다. … 이러한 일들이 있는 동안에 학과에서는 야단이 났다. 아마도 학내·학외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대학과 과에 들어왔을 것이다. 


    한우근 교수와 김철준 교수는 이 일로, 개별적으로 말씀을 하셨는데, 이로써 학내외의 분위기를 알 수 있었다. 두 분 교수는 그러한 분위기를 종합 판단한 위에서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되었다. 김 교수 말씀은 두 차례 있었다. 한 번은 나를 보고 웃으시며 ”김 선생, 김 선생 민족주의는 내 민족주의와 다른 것 같다.” “예, 그런 것 같습니다.” 그 다음은 노발대발하시며, “이○○ 선생에 대해서 무슨 글을 그렇게 써!” 하시며 질책하셨다. 


    마치 부하직원이나 제자를 대하듯 나무라셨다. 전자는 경고성 발언이고 후자는 절교성 발언이라고 생각되었다. 한 교수 말씀도 두 차례 있었는데, 연세가 높으신 만큼, 말씀의 논조 방법을 아주 다르게 하셨다. 

    한번은 두계(斗溪) 선생이 덴리(天理) 대학교 초청으로 일본에 다녀오셨는데, 그 대학교에서 한 교수와 나를 초청하니 두 사람이 상의해서 다녀오라고 하셨다며, “김 선생, 같이 갑시다. 김 선생이 간다면 나도 가고, 안 간다면 나도 안 갈래” 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두계 선생이 덴리 대학교에 가시니, 그 대학교에서 덴리교(天理敎)의 도복을 입히고, 예배에 참석토록 하였다는군.”이라고 덧붙이셨다.

     나는 거기는 아직도 총독부 시대구나 생각하였다. 그래서 “선생님, 저는 차멀미를 많이 해서 여행을 못 합니다. 선생님만 다녀오십시오.” 하고 사양하였다. 다른 한 번은 여러 사람이 있는 가운데, “… 김 선생, 우리 이제 민족사학 그만하자”고 하시는 것이었다. 이것이 여러 말씀 가운데 핵심이었다. 말씀은 부드러웠지만, 논조는 강하였다. 명령이었다.”

출처 http://www.h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278451

http://heiligkeitsgesetz.tumblr.com/post/90765652552/%EA%B9%80%EC%9A%A9%EC%84%AD-%EA%B5%90%EC%88%98-%EC%99%9C-%EC%84%9C%EC%9A%B8%EB%8C%80%ED%95%99%EA%B5%90-%EC%82%AC%ED%95%99%EA%B3%BC%EB%A5%BC-%EB%96%A0%EB%82%98%EA%B2%8C-%EB%90%98%EC%97%88%EB%82%98-%ED%95%9C-%EB%B2%88-%EA%BD%82%ED%9E%88%EB%A9%B4-%EB%98%90-%EC%A0%95%EC%8B%A0-%EB%AA%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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