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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우리나라 역사의 비대칭성
게시물ID : sisa_16125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maru2u
추천 : 3
조회수 : 331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2/01/16 13:58:26
역사적으로 인접한 국가들은 서로 밀접한 영향을 주고 받는다.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 전쟁
르네상스 시절 프랑스왕과 이탈리아 도시국가들 (베네치아와 프랑스 왕의 갈등)
신대륙 발견 국면의 네덜란드 독립 전쟁 (스페인과 프랑스/영국 등의 대리전)
소국으로 분리된 독일에서 강대국들의 전쟁 (30년 전쟁)
나폴레옹과 워털루의 연합군
비스마르크의 파리 점령 등등
이 과정에서 서로 정치, 경제적으로 영향을 끼치며 동반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럼 동 시기의 아시아로 눈을 돌려보자. 
우리와 일본, 
우리나라 역사에서 일본은 백제시대 문물 전래, 왜구의 습격 (everytime),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이렇게 크게 4가지 형태로 등장한다. 
이 과정에서 서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사실 나의 질문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서양사에 비해 훨씬 빈약해보이는 서로간의 영향에는 분명히 큰 왜곡이 있을거라고. 

우리가 맺은 강화도 조약보다 약 20년 먼저 (1850년대 중반) 일본은 미국에 문호를 개방하였고
약 40년만에 청일전쟁에서 승리, 약 50년만에 러일전쟁 승리로 동아시아의 최강자로 군림한다. 
즉 19세기 후반, 극명하게 갈리기 시작한 두 나라 역사의 비대칭성을 
불과 20년 먼저 개방한 사실로 설명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뭐 이런 주장이 있을거라 예상한다. 
 - 메이지 유신을 통해 정권의 교체가 신속하게 이루어짐
 - 유럽/미국에 지식인들을 급파하여 각 나라의 장점들을 신속히 받아들임
과연 이것만으로 설명이 가능한가?

1. 봉건체제하의 강한 경쟁관계
일단 내가 접한 일본에 대한 정보 중 큰 부분은 60년대 쓰여진 '야망'이다. 
유명한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쓰에 대한 대 서사시로 무려 30권이 넘는 장서인데, 쉼없이 읽힐 정도로 훌륭한 책이다. 
나관중의 삼국지에 전체적으로 흐르는 낭만적인 분위기와 달리
치열한 두뇌 싸움, 복잡다단한 정치적 암투, 완전 강백호틱한 오다 노부나가의 캐릭터 등 
내가 본 역사서 중에 최고라고 생각한다. 
(물론 60년대 쓰여지면서 많은 미화와 오바가 들어갔을 것이지만)
특히 저 세 영웅의 묘사를 보면 현재 일본 만화 캐릭터의 원형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즉 적어도 이 책에 묘사된 일본의 1500~1600년대는 일본 각 지역 영주들이 유럽처럼 갈갈이 찢어진채 서로 극렬히 경쟁하였고 주인의 힘이 조금이라도 약화되면 바로 하극상이 일어나는 등 말 그대로 전국시대였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철저한 경쟁 환경이었기에 처음 포르투칼 상인의 조총을 보고 전투의 혁신을 이루어낸 오다 노부나가 같은 사람이 승리할 수 있었겠지. 

즉 일찌감치 통일되어 내부 경쟁이 훨씬 덜 하였었던 중국,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의 통일은 불과 300년도 되지 않았다. (19세기 말 기준)

2. 유교의 상대적으로 낮은 영향력
유교는 모든 정치철학이 그랬듯 기본적으로 위정자의 통치 철학으로 변모되었고
과거와 조상에 초점을 맞춤으로서 미래는 없고 변화가 암묵적 금기로 생각되는 사회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하지만 유교가 도입될 시기에 일본은 앞에서 말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유교가 위정자들에게 적극 도입되기 보다는 도쿠가와 막부 시절 일종의 세련미를 띈 유행 정도로만 받아들여졌다. 

즉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는 변화에 대한 강한 저항으로 작용했던 것이 일본 문화에는 없었다. 

3. 도쿠가와 막부의 안정적 통치 안에서 점진적으로 증가된 생산성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서며 기독교를 금지하여 수천명이 순교하였고 항구를 폐쇄하는 등 쇄국정책을 펼치지만 나카사키 항구는 개방하여 부분적으로 서류와 교류를 유지함 
참고로 19세기 중반 도쿄는 인구 약 100만을 헤아려 당시 세계 최고의 도시인 런던보다 오히려 컸으며 평균 생활수준도 런던과 비슷한 수준이었음 (리오리엔트 내용임)
생산성 증가 뿐만 아니라 삼림 보호 같은 환경 친화적인 정책도 아울러 시행되었으며 
당시 일본 여행기에 따르면 일본인의 부지런함과 깨끗함, 높은 생활수준에 대한 언급이 많음

1600년대 초반부터 1800년대 중반까지 어떻게 일본 내에서 이런 수준의 경제 발전을 이루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이 없는 상태임 

4. 막대한 은 채굴량
저 시절 국제 통화는 은이었고 (아편전쟁도 결국 중국 상품 구매로 중국으로 흘러들어가버린 은을 다시 사오기 위해 기획되었듯) 이 시절 일본 내 은의 채굴량이 아메리카 대륙 포함하여 전세계 은생산량의 10%에 달했다라는 사실 (리오리엔트) 

실제로 일본 역사에서 영주들이 광산 개발에 열을 쏟았다라는 언급이 번번히 있으며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도 제일 먼저 광산 개발에 착수했다라는 사실을 보면서 ... 그들은 풍부한 은 생산을 통한 자체적 화폐 경제를 구축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1) 농업생산량이 증가하여 1차적으로 잉여생산물을 양산하기 시작했고
2) 통화량이 충분했기 때문에 거래가 활성화되어 농민 외의 다양한 직종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3) 결과론적으로 복합적인 경제체제를 이룩하지 않았나 하는 예상을 해본다. 

5. 메이지 유신 
이런 상황에서, 
실력과 경쟁에 익숙한, 변화에 대한 저항이 적은, 이미 상당한 수준의 생산적 경제 체제 하에서
미국이 들어왔으나 어리버리한 도쿠가와 막부를 보고 
나카사키 쪽 서방세력과 접촉이 잦은 세력들이 쿠테타를 일으켜 일거에 정권을 바꾸어버림. 

이들이 가장 서양에 대한 이해가 높던 정치세력이라
아주 재빠르게 시스템 변화와 국가 전체의 변화를 이룩해내었음

이 정도가 제 수준에서의 결론입니다만, 
다양한 의견과 반론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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