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먼저 오신 선교사는 -카를 귀츨라프 프로이센 출신의 목사이자 의사로서 1832년 영국 동인도회사의 무장 상선 로드 앰허스트호의 통역관으로 충남 홍성군 고대도에 25일 동안 정박해 있으며 선교 활동을 하였다. 조선에 나타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이다. (주기도문 번역, 성경보급)
귀츨라프 선교사님은 통역관 신분으로 오신반면 언더우드 복음 선교사는 공식적을 선교본부에서 파견된 분이시죠. [장로교] 그래서 두분 다 최초를 붙이긴 하지만 인지도나 공식적인 면모, 그리고 활동 내용을 볼때 많은 분들이 언더우드 선교사님을 최초의 '복음'선교사라고 부릅니다. [개신교]
-그는 엘린우드 박사의 지원과 '맥윌리암스'의 기부(6천달러)로 1884년 7월 28일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에 의하여 한국 최초의 목회선교사(Clerical Missionary)로 파송되었다.-
밑에 어떤분이 어떤 신부님을 대셨는데 신부님은 천주교이구요~
언더우드 선교사님 활동을 소개하자면
입국과 선교 활동 부활주일인 1885년 4월 5일에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와 함께 인천에 입국한 그는 아직 조선정부에서 선교활동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중원에서 물리와 화학담당교사로 활동했다. 또한 그는 한국어 문법책을 영어로 집필하였다. 그 후 성서 번역 위원회 초대 위원장·대한 기독교서회 회장·한국 기독교 교육회 회장 등으로 일하는 한편, 연희전문학교(현재 연세대학교)를 창설하였으며 초등학교도 설립하였다. 서울 경신 중학교도 설립하였다.또한 교회 연합 운동을 지도하는 등 한국의 종교·문화·언어·정치·사회 등 여러 분야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1]
개신교 선교사로서의 그의 가장 큰 업적은 교회설립과 전도여행이었다. 1887년 언더우드는 조선인 교우들의 참여로 대한민국 최초의 교회인 정동교회(현 새문안교회)를 설립했고, 초기 개신교가 활발한 지역이었던 북한지역에서의 전도여행을 3차례나 하였다. 피어선 성경기념학원(현 평택대학교)에서 교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성서번역에도 공헌했는데, 1887년에 상임성서위원회 위원 자격으로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와 함께 마가 복음서 한글판인 <마가의젼 복음셔언ㅣ>를 번역·출간하는 업적을 남겼다.
1916년 1월 무리한 공부로 몸이 쇠약해진 그는 그해 10월 12일 뉴저지주 애틀랜틱 시티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시신은 한국으로 옮겨져 양화진 외인 묘지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한국에 대한 열정은 자손들에게 계승되어 3대에 걸쳐서 언더우드 집안은 의료선교, 한남대학교 설립으로 한국사회발전에 기여하였고, 특히 4대손인 원한광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당시 계엄군의 광주시민학살만행을 해외에 알려서 전두환 정권에 의해 강제추방당하는 고난을 받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