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스 막, 막사
2015.8.8~28
초대일시: 8월8일 5시 오프닝 쇼: 8월8일 6시 플래시 플러드 달링스
’ 결국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신체의 표피가 아니라는 것을 자주 까먹어요. 이미지에는 이미 관능이 남아 있지 않죠. 이미 관능이 휘젓고 난 뒤 흔적만 남아 있는데 그것도 까먹을 때가 많아요. 관능은 신체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신체가 발아시킨 아름다움에 대한 기억이라는 것을, 그것은 찰나에 가깝고 시간에 대한 이야기나 감각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 작가 에세이, ‘사랑에는 이름이 없다’ 중 -
여 기 욕망이 있다. 그리고 그 욕망의 표피를 감싸 안은 고독이 있다. 욕망은 구체적인 형체가 없기 때문에 형태를 그리려다 보면 어렴풋한 느낌마저 손가락 사이로 허무하게 사라진다. 마찬가지로 글도, 회화도, 막연하게 떠오르는 이미지를 지면에 옮기거나 캔버스에 물감을 묻히는 행위에서 그 생명력은 상상력에 미치지 못하는 모양으로 박제되어 버리는 것이다. 작업의 대부분의 시간을 상상을 통한 전희(forepleasure)의 과정으로 보낸다는 오용석에게 회화는 차곡차곡 쌓아놓은 욕망과 고독의 밀도라기 보단 한순간의 분출에 가깝게보인다. 비밀과 정액은 동일한 것이라 간직하면 고통을 받고 배출하면 잃게 된다는 파스칼 키냐르의 문장처럼 오용석의 그림을 호모아트 혹은 동성애 코드로 풀어내는 순간 인간 본연의 고독과 쓸쓸함이 빚어낸 3류 통속 미학이 그 특유의 빛을 잃는다. 하지만 작가의 작업실 가득 스크랩된 사내들의 신체와 포르노그래피 장면들을 보고 있자니 관음증 환자처럼 자연스레 그 욕망의 전희와 고독의 변주과정이 궁금해진다.
처 음 오용석의 그림을 접했던 2011년 가을 즈음부터 나는 언젠가 그에 대한 글을 쓰고 있을 내 모습을 그려보았다. 적당히 농염하고 적당히 고통스럽고 적당히 해학적으로. 그가 마주한 한국의 현실과, 그가 처해진 사회적인 관계와, 또한 그의 개인적인 성정을 종로3가 이발소에 걸린 플라스틱 차양 사이에서 관조하듯이 설명해 보려했던 것은 아마 내 개인적인 욕망의 발로였다. 오용석은 ‘혼자서는 선뜻 용기를 내기 힘든 엉뚱한 일들, 조그만 설렘이라도 부추길 말동무’를 필요로 하는 소녀적 감수성과 더불어 문신이 가득한 육덕한 몸뚱이를 탐닉하는 욕정이 복잡하게 섞여있는 인물이다. 노란색의 신체를 가진 포르노그래피 주인공과 더불어 그의 그림에 종종 등장하는 –싸구려 관광온천이나 동네 목욕탕에서 보았을법한- 야자수는 영화 아비정전의 시작과 끝에 등장하는 열대우림의 그것과는 달리 그 앙상한 줄기와 얼마 되지 않은 개체수 때문에 더더욱 그 쓸쓸함이 극대화 되는데, 오용석은 때로 그 앙상한 화폭에 마저 불을 놓아 그 자신의 황량한 유토피아와 내면의 고독에 점멸등을 내린다. 그리고 우리는 앙상하게 타다 남았을 그 가여운 야자나무와 그 장면을 그리고 있을 화가의 모습을 상상해보게 된다. 종로 구석진 뒷골목에 이름도 없이 존재하는 여인숙의 벽지를 더듬는 심정으로 끝 간 데 없는 고독을 가늠해 본다. 이러한 과정은 시간을 두고 바라볼수록 빛이 나는 모종의 미학을 발견하게 되는 이치와도 같은 것이라서(나는 이것을 벽지의 미학이라고 말하곤 한다) 내밀하고 은밀하게 그의 감수성을 곁눈질로 지켜봐야한다(그리고 그것은 인내를 필요로 한다). ‘사랑에는 이름이 없다’라는 납득이 어려운 문장을 전시제목으로 선정한 작가를 위해 궁리하다 오랜만에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우연히 한 문장을 읽게 됐는데 그 문장은 아래와 같다.
‘사 랑의 순수성, 그것은 침묵하는 초라한 나체가 맨 앞쪽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순수성이 필연적으로, 억제할 수 없게, 우스꽝스럽게 , 멋지게, 고집불통으로 우뚝 선다. 사랑이란 이미 피할 수 없는 뻔뻔스러움이다. 사랑이란 언어에 선행하는 것의 벌거벗음, 언어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으며 사회가 망각하고자 하는 –그토록 나체는 자연스럽고 수치스러우며 비사회적인 근원을 가리킨다. - 벌거벗음이다, 선적인 것은 명명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사랑은 이름붙일 수 없는 것의 비밀에 헌신한다. 사랑은 위선적이고 수다스럽고 선명하지 못한 인간의 사회에서는 표현할 길이 없는 동물적인 순수성이다. 두 다리 사이에 몸통을 처박고 있던 늙은 은자가 내미는 얼굴이다. 그러나 언어의 수다스러움이 현실을 비틀어서 조금씩 뿌리째 뽑아내고는 잊어버린다. 고 독에 이미지를 입히고 사랑을 명명하여 잠시 곁에 붙잡아 두려 노력하지만 사실 우리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사랑에는 이름이 없다. 언어 이전의 삶을 갈망했던 키냐르에게 언어로 사랑을 표현하는 일은 경멸에 가까운 일이었다. 습득된 언어가 감정을 재단하고 섹스를 재미없게 만든다. 자가당착에 빠지고 자기모순을 즐기는 언어를 구원할 길은 세상의 모든 이름 없는 것들을 지각하는 것이리라. _ 신은진 큐레이터
플레이스막+막사 _ 서울 마포구 동교로46길 36 / 관람시간 12시~8시 월요일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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