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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어라는 말에 흥분하는 사람은 꼭 봐라. 난 경상도 좌파.
게시물ID : sisa_16277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upernova
추천 : 0
조회수 : 911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2/01/21 09:38:43
공주님 어쩌고 하는 글에 잘못된 자료가 있어서 댓글을 달았더니,
말도 안되는 논리로 팀킬하는 분들이 있어서 글을 씁니다.

글을 읽는데 주안점은, SNS에서 정치활동 가능하다는 법례가
인터넷에서도 거짓된 자료를 올리면 처벌이 가능하다는 걸 주지 시켰었는 글입니다.

하지만 포스코 설립 자금의 출처와 박태준 총리의 평가를 
경상도라 무조건 매도하고 밝아버리기에 글을 남깁니다.

먼저 박태준 전총리님은
여러분이 좋아하는 김대중 정권의 총리 입니다.

한국에서 육사를 나와서 전후 사업가로 명령을 받아
일본 전쟁배상금의 대부분을 가져와 포스코를 건립했습니다.
경부고속도로가 먼저였다 어쩌다 말은 많은데,
박태준 헌화방송에서 나왔듯이 전쟁배상금의 대부분이 즉 대일청구권자금이 포스코 건립에 들어갔습니다.
포스코 제철소가 경상도와 전라남도에 있는 것만 생각해봐도 그분의 정치성향을 알게 되지 않습니까?
경상도는 자신의 고향이기 때문에 시작한 곳이고, 광양제철소가 일괄제철소 중에 가장크고 현대적인 곳이라는 걸 생각하면 포스코 내에서도 반발이 있었을 법한데 그걸 잘 아우르신 분입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글이 길기 때문에 요약을 먼저 올립니다.

요약 1. 포스코 건립이 1967년 입지선정 68 대일 청구권 자금의 8천만 달러를 수혈받아 착공.
2.경부선 1968년 박통 지시로 착공 사업금 429억원 약 4천만달러....즉 시기가 포스코가 앞섬.
3.따라서 대일청구권 자금 대부분은 포스코 건립에 들어감. 
4.같은 편 욕하는 사람들은 홍어라 소리 들어도 난 쉴드 안쳐줄 것임.

위키 발췌.
///////, 1966년에 5개국 8개사의 연합체인 대한국제제철차관단 (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 KISA)이 결성되어 1968년까지 예비협정, 기본협정, 추가협정의 세 차례에 걸쳐 협상이 이루어졌다. KISA와의 협상이 진행되면서 1967년 7월에는 포항이 제철소의 입지로 결정되었고 같은 해 9월에는 대한중석이 종합제출사업의 주체로 선정되었다. 이어 1968년 4월 1일에 대한중석을 모태로 하여 포항제철이 창립되었다.///// 결국 KISA로부터 차관을 조달하는 데 실패하였다. 내심 미안했던 포이 측의 배려로 박태준은 하와이의 고급콘도에서 휴식을 보내게 되었다. 이 휴식 기간 동안 박태준은 포철 건설에 관한 자금을 동원할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었는데 그것은 대일 청구권자금이었다. 당시 8천만 달러 정도의 대일 청구권 자금이 남아 있었고, 일본은 자금을 제공하면서 돈의 용처를 명시해뒀으나 그것을 바꿀 수 있다면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있었다. 그 후 박태준은 전원합의체라는 의사결정구조를 가진 일본의 내각을 집요하게 설득한 끝에 결국 일본의 지원 결정을 얻어낼 수 있었다.///////////////

비교해서 경부고속도로는
위키 발췌.
//////////
1968년 2월 1일 :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지시로 착공되었다.
1968년 5월 2일 : 당시 야당인 신민당은 제65회 국회본회의 제13차 회의에서 공식적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반대하는 비난 성명을 발표했다.
1970년 7월 7일 : 모든 구간이 왕복 4차선 도로로 개통되었다. 당시 한국의 차량은 10만6000대였다.////////////////////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기 전 부산과 서울을 통행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경부선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경부고속도로는 서울과 부산을 5시간 내로 잇는 사업으로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키며 429억원이 투입되어 2년 5개월만에 완공되었다. 연인원 892만 8천명과 165만대의 장비가 투입된 대형사업이었고, 77명이 건설과정에서 사망하였다. 16개의 업체와 3개 건설공병단이 참여하여 건설하였다. [2] 2011년 승용차의 서대전-부산간 통행요금은 13800원이나 1970년엔 1000원이었다.

역사적으로 건립 순서가 다릅니다. 

이후부터는 사사로운 이야기와 저의 주장이 시작됩니다.

이것도 요약
1. 고승덕은 박태준 사위 BUT 한나라당 공천 문제로 이혼 시킴.
2. 재산.....아...나... 포스코 회장이었던 분의 재산이 집 1억9천만원짜리 한채...그것도 기부하시고 가심..


차녀: 박유아(朴裕雅, 1961-) - 한국화가
차서: 고승덕 - 이혼
변호사, 정치인
고승덕과의 이혼은 장인이었던 박태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승덕은 1999년의 서울 송파 갑 국회의원 재선거에 한나라당 공천을 받아 출마하고자 했으나, 당시 공동여당인 자민련의 총재였던 박태준이 반대해 결국 불출마를 선언한 바 있다.

즉, 고승덕이 사위였는데, 한나라 공천문제로 이혼 시켰습니다. 이혼 
박태준 집 2억 남짓하는데 그것 마저, 기부하고 가셨습니다.
박태준 헌화 방송 보면서 울었습니다.
10년전 고등학생 일때, 저분이 왜 해외로 정치보복을 당해서 떠나야 되는지 잘 몰랐고,
김영삼이 경제를 파탄낸 것에 대해 고등학교 학예지에 글을 실었을 뿐이지만,
그 분이 이정도로 고귀한 삶을 살았다는게.... 감동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역사를 왜곡하는 건 한나라나 전라도나 같다면,
으로 10년뒤에 한나라의 후예들이 여러분과 똑같이 정권 타도를 외칠 것이고.
여러분들도 지금의 한나라당 일족들 처럼 부패 해 있을 겁니다.

자료 출처
http://ko.wikipedia.org/wiki/%EB%B0%95%ED%83%9C%EC%A4%80_(1927%EB%8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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