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와 빛고을 광주 민주의 성지이며, 전통의 고장으로 자긍심을 갖는 광주! 자신의 입신 영달을 위해 광주시민의 아픔과 통곡을 외면한 체 미국으로 망명했던 노벨평화상의 주인공 DJ가 32년 전 5.18을 민주화운동이 아닌 폭동으로 정의한 장본인이다.
DJ는 5.18 하루 전, 신군부에 의해 내란음모죄로 사형이 선고됐다.(1982년 11월) 그는 당시 우선 사형을 면하기 위한 목적으로 신군부가 추궁하는 모든 걸 그대로 인정했다. (5.18이 불순 세력들의 내란에 무장 봉기이며 총과 폭약을 탈취한 자들의 폭동이었다고)
이렇게 조사에 순순히 응한 김대중은 훗날 이 진술은 360도로 뒤 바뀐다. 대통령 당선 직전 방송에 출연, 5.18 당시를 회자하며 “저 역도들과는 절대 타협할 수 없었으며 차라리 내 목숨을 던지고 말겠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전두환 장군이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김대중은 감옥에서 1차 편지를 보내 목숨을 구걸했으나 단호히 거절당하고 저 역도들과 절대 타협할 수 없다고 했다.
(옥중서신) 편지 전문
전두환 대통령 각하
국사에 전념하신 가운데 각하의 존체 더욱 건승하심을 앙축하나이다.
각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본인은 교도소 재소 생활이 2년반에 이르렀사온데 본래의 지병인 고관절변형, 이명 등으로 고초를 격고 있어 치료 받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본인은 각하께서 출국허락만 해 주신다면 미국에서 2~3년간 체류하면서 완전한 치료를 받고자 희망 하온데 허가하여 주시면 감사천만이겠습니다.
아울러 말씀드릴 것은 본인은 앞으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일체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으며 일방 국가의 안보와 정치의 안정을 해하는 행위를 하지 않겠음을 약속드리면서 각하의 선처를 앙망하옵니다.
1982년 12월 13일 金大中
5.18사태 직후 오열하는 광주는 뒷전에 두고 혼자 살아남겠다며 보낸 문제의 편지 내용 중 “일방 국가의 안보와 정치의 안정을 해하는 행위”라고 한 것은 5.18이 단순시위 데모 수준이 아니라 공권력을 무력화시키고 나아가 북괴의 지원으로 무력내전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는 것을 시인하고 반성하는 의미에서 쓴 편지라는 의미를 남긴 것이다.
5.18 이후 왜? 북괴는 광주민중봉기 기념관을 세우고, 5.18 잠수함을 만들고, 역마다 5.18을 찬양하는 구호를 새겨 놓고 해마다 평양중앙노동자 회관에서 기념행사를 가지는 것인가. 올해도 어김없이 지난 5.17일 광주민중봉기 32돌 기념행사를 동 장소에서 성대하게 갖게 된다.
이를 근거로 광주시민들이 과연 북한에 5.18 기념관을 세우기 위해 그토록 많은 피를 흘린 것인가, 광주시민들이 과연 북한에 잠수함 명을 새겨 넣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투쟁을 한 것인가, 광주시민들이 과연 북한에 기념행사를 기대하며 폭도의 오명을 들으며 끝까지 싸웠던 것인가?
자신 있게 답하고 말할 수 있는 광주시민은 단 한명도 없을 것이다.
정권이 바뀌면서 5.16이 군사반란으로 5.18이 민주화운동으로 재평가 됐다. 광주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제정으로 신군부가 누리던 모든 특혜는 물론 서훈 훈장이 전부 취소된 사실에 힘의 역사는 무엇이든 또 변화 시킬 수 있음을 일깨워 준다.
그는 옥중 서신 후 곧 바로 대통령특별 사면에 의해 신병 치료차 미국으로 떠날 당시 20년으로 감형된 상태이지만 미국에 도착하자 강제 추방했다는 거짓으로 자신의 건재를 부각시켰다.
최근 세계적 싱크탱크 헤리티지재단, 미국의 수재들이 머리를 맞대고 세계적 이슈나 정책을 검토해 분석 결과를 리드해 주고 있다. 한국에 입국한 이 재단서 광주시위를 면밀히 조사한 후 단호하게 반정부무장 폭동(Riot)으로 최종 결론 내린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