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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 펌]아버지와 나 그리고 김대중
게시물ID : humorbest_24370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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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 153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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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등록시간 : 2009/08/24 12:05:20
원본글 작성시간 : 2009/08/23 10:54:56
*출처: 딴지일보

[추모] 아버지와 나 그리고 김대중

2009.8.20.목요일


김대중, 1971년

나에게 김대중의 잘못을 지적한다는 것은,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것 만큼이나 어렵다. 큰소리치며 집을 나갔다 결국 아버지의 그늘로 돌아오는 탕아처럼, 나는 날카로운 비판으로 시작했다가도 어느새 그를 위한 변론으로 은근슬쩍 옮겨가는 나 자신를 발견하곤 한다. 이것은 정치를 바라보는 인식의 틀 자체가 김대중을 바탕에 깔고 있는 나의 태생적 한계요 아들에게 이 같은 바탕을 깔아준 내 아버지 업이다. 잠깐 그 이야기를 하고 싶다.

TV에 비치는 김대중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은, 스테이지 위의 락 스타를 바라보는 소녀팬의 그것이었다. 아니 그것은 조금 약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호남인으로 태어나 호남인으로 자란 아버지에게 김대중은 구세주에 가까웠다고 해야 차라리 맞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김대중은 긍정적 대상 그 자체였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본 받을만한 일이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었다.

장충단 유세 연설을 녹음 테잎으로 구해서 듣고 또 들었던 시절을 회상하는 아버지의 말씀은 "남자라면 저렇게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고도 우렁차야 한다."였다. 혼자 6시간에 달하는 장광설로 국회에 필리버스터(filibuster)를 감행한 무용담을 이야기할 땐 "남자라면 역시 저렇게 두둑한 뱃심이 있어야 한다" 는 첨언이 따라 붙었다.

15대 대통령 당선직후 그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교통사고와 납치, 고문에 관련된 일화가 나오자 아버지는 이렇게 주문하셨다. "운동을 열심히 하라". 논거는 "저 양반을 봐라, 수없이 사선을 넘나들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다 체력이 받쳐줬기 때문 아니겄냐. 그러니 너도 평소에 운동을 열심히 해야 한다."

이제 그 김대중이 대통령으로서, 세계 각지의 정상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떠듬떠듬 영어 연설문을 낭독하게 되자 "역시 남자라면 저렇게 영어를 해야 한다"는 말로 외국어 학습의 중요성 까지 강조하셨다. 발음의 유창함과 억양의 높낮이는 애써 외면하시면서. 그러다 영부인 이희호 여사가 잠시 화면에 잡히면 그이가 당시로선 극히 드문 유학파 출신의 여성 활동가였음을 설명하고, 대통령 부부의 만남이 당시 사회적 통념에선 쉽게 받아들여지기 힘든, '애 딸린 홀아비' 와 '엘리트 신여성' 사이의 재혼이었음을 나에게 상기시킨 뒤, 두 분이 겪었을 사랑의 험로를 치하 하시고는 "모름지기 남자라면, 저렇게 똑 소리 나는 색시감을 얻어야한다"는 말로 연애코치까지 김대중을 초빙하셨다.

이쯤 되면 우스개 삼아 김대중은 나에게 속칭 [모태신앙]과 같다 말해도 할 말이 없다.


97년 대선후보시절 DJP연합

그러던 내가 사춘기 무렵, 머리가 굵었다며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이 [모태신앙]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 시작은 김대중-김종필-박태준이 손을 잡은 이른바 DJP 연합이었다. 세상일이 모두 정의와 불의, 옳고 그름, 적과 아군처럼 명쾌히 갈라져야 한다고 믿었던 소년의 눈에 DJP연합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 박정희의 조카사위 및 제자(실제로 박태준은 육사 생도시절, 탄도학을 가르치던 박정희 밑에서 배우던 학생이었다.)와 손을 잡은 것은 변절이 아닌가요?' 라는 질문에 아버지는 답해주지 않으셨다. 그가 14대 대선직후 선언한 정계은퇴를 번복한 점도 달갑게 여겨지지 않았고 임기 말에 터진 아들 삼형제의 비리 문제는 '문민정부의 소통령 김현철'을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5월 광주의 넋들을 위해선 피의숙청으로도 모자랐을 이들을 사면해준 것 또한 나는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임기 중에 유달리 전직 대통령 부부동반 청와대 만찬이 잦았던 일을 기억한다. 그 때마다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눈을 마주치지 않던 전두환, 역시 앙다문 입술의 김영삼, 이제는 다 지난날의 일이라는 듯이 덕담을 건네는 노태우까지 나는 죄다 달갑지 않았다. 그것은 거룩한 용서라기보다 언론, 자본, 기성 정치꾼들이 서로 또아리를 튼 수구 기득권의 눈에 들기 위한 야합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세상을 둘로 나누어야 성이 찼던 어린 내가 바란 것은 응징과 청산이었다.


칭구야...

거기에 해를 더해감에 따라 더욱더 선명해지는 호남이라는 각인은 나로 하여금 일부러 그와 거리를 두게 만들었다. 호남인인 내가 차분한 목소리로 그의 잘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요즘말로 치면 굉장히 '쿨하게' 느껴졌고 이를 통해서 구습과 상처에 매몰되지 않았다는 칭찬과 함께 호남인에게 덧 씌워진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운 몸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때맞춰 '양심적인 영남사람' 노무현이 등장했고 나는 습관처럼 각인된 김대중에 대한 애정을 차갑게 식힌 뒤 노무현에게 전력투구했다.

호남인인 내가 김대중에게 가혹하고 노무현에게 관대해지는 것은 스스로 보기에 참, 좋아보였다.

호남인 아버지에게서 김대중에 대한 긍정적 선입관을 주입받은 것은 일종의 우연이다. 그 이유로 내가 김대중을 지지한다면 이것은 박정희나 김영삼에게 쏟아지는 영남 사람들의 지지와 대체 뭐가 다를까하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이후 나는 내가 호남인이 아니더라도 그를 각별하게 생각할만한 이유가 있는지, 나름대로 김대중을 객관화 시켜보려 애썼다. 그러나 그가 호남 대표가 아닌 한국 민주주의의 대표이며 뛰어난 정치지도자임을 피력하는 다른 이들의 증언을 접하고도 나는 그를 열정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왜일까, 사람들이 여럿 모이는 자리에서 호남인으로 나서야 할 때, 나는 공개적으로 김대중을 지지하거나 옹호하지 못했다. 허나 혼자 남게 되면 다시 습관적으로 김대중을 위한 변명을 거듭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하였다.

대체 김대중은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

그래서 조금 늦은감이 있지만, 오늘만큼은 이 오래 묵혀둔 질문에 큰소리로, 또박또박 답한다. 그는 뛰어난 정치지도자였고 내가 호남인이 아니었어도 분명히 지지했을 민주투사였다고. 내가 애써 어린 시절 흠을 잡았던 그의 과오에 대해서도 이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사실 나는 진작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치 아버지와 다툰 뒤 마음 속 앙금은 모두 가라앉았는데도, 단 한마디 '죄송합니다' 라는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서 그냥 어색하게 지내온 아들처럼, 나는 김대중을 오래오래 바라만 봐 왔던 것 같다. 그래서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소리 내어 말하련다.

DJP 연합을 정권 획득을 위한 야합으로 치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보다 복잡한 층위를 갖춘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정치적으로 봤을 때 대한민국의 서자 김대중이 대한민국의 적자 이회창에 맞설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었고 개인적 차원에서는 자신의 목숨까지 위태롭게 한 정적들에 대한 관대한 포용이었으며 시대적으로는 그의 집권을 갈망해온 수많은 시민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유일한 쓴잔 이었다. 이제 DJP연합을 두고 비겁하다 욕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것이 집권야욕에 사로잡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늙은이의 욕심과는 다르다고 본다. 그렇게 극단적인 논리를 적용해 본다면 '애초에 깨끗하려면 정치를 하지 말았어야지'라는 말이 차라리 더 타당할 것이다.

그가 자신의 목숨을 노릴 정도로 척을 졌던 일부 수구세력의 암묵적 동의를 얻어 집권에 성공한 뒤 피의 살풀이를 시작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우리는 노무현 같은 대통령을 가져보지 못했을 것이다. 전부터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전라도 빨갱이들이 천년만년 다 해먹을 것이다' 며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여 온 이들에게 직접 칼을 들이댔다면, 대한민국이 빠져들었을 혼란과 분열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김대중은 조금 돌아가는 길이지만 보다 온화한 방식으로 상처를 달래는 포용을 선택했고 노무현 정권으로 바통을 넘겨줌으로써 지속적인 변화를 이어가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한 그가 측근비리와 대북송금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기성정치의 구태를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했다는 점은 나 역시 동의한다. 남들과는 달랐지만 그래도 그는 '20세기 정치인' 이었고, 그것이 김대중의 분명한 한계다. 그러나 사실 김대중에 대한 우리의 비판 중 상당수는 가혹하리만치 21세기적 잣대를 20세기 정치인에게 적용하고 있는 바 크다. 그만큼 오늘 우리시대의 시민들은 김대중마저 불만족스러워 보일정도로 정치인을 바라보는 안목이 높아졌다는 뜻이고 이는 역설적이지만 김대중의 덕이 크다. 권모술수와 파당싸움으로만 가득 찬, 고무신 투표가 횡행하던 시대에 본격적인 정책과 토론을 보여준 정치인. 탁월한 외교적 감각과 수완을 갖추고 국제사회에서 쌓아온 높은 인망을 통해 제대로 된 외교를 보여준, 한국 사상 최초의 국제적 정치인. 그를 지켜보는 동안 자연스럽게 우리의 눈높이 또한 높아진 결과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의 한계는 후임자인 노무현에게 좋은 반면교사를 제공하였으니 김대중의 한계는 또 한계로써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제 난 김대중에 그렇게 매달렸던 아버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좀 극성스러운 면이 있긴 했지만 아버지는 충분히 존경받을 만한 정치인을 흠모해왔고 이걸 아들에게도 가르쳐 주고 싶었셨던 거다. 이제 아버지께 말씀드려야겠다.

"맞어요. 거 참 알고 볼수록 대단한 양반이셨어요,, 그쵸잉?"

그리고 노객에게는 사죄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나의 그 잘난 호남인으로서의 자의식 때문에 애써 그분을 외면해온 시간, 늦었지만 죄송하다고. 그러니 노객께서는 편히 쉬시라. 물론 편할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일단 눈이라도 좀 붙이고 계시라.

이제부터는, 우리 살아남은 자들의 업이다.

         충용무쌍([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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