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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단편] 나에게로 온 꽃
게시물ID : readers_2437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께소
추천 : 3
조회수 : 644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6/03/13 00:5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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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로 온 꽃


       봄치고는 추운 날씨였다. 비는 마치 집안으로 들어와 몸을 덥히고 싶다는 듯이 창문을 두드려댔다. 집은 상당히 컸다. 이 층으로 이뤄진 건물의 아래층과 위층은 뱅글뱅글 꼬인 철제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건물 위층에는 킹사이즈의 침대만 하나가 덩그러니 들어있는 침실과 그 침실보다 더 큰 욕실이 있었다. 그리고 아래층에는 깨끗한 (혹은 텅 빈) 주방과 그 주방 앞에 놓인 이 인용 식탁과 텔레비전이 없는 거실이 있었다.

       그 속에 한 여자가 있었다. 그렇게 큰 집에서 혼자 살기에는 많이 어려 보이는 여자였다. 여자가 자신의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은 식탁이 있는 곳이었다. 친할아버지가 손수 만드신, 그녀가 아끼는 식탁 위에는 절대로 무언가가 놓여있지 않았다. 그런데 늦은 아침에 일어나 보니 식탁 위엔 소주병으로 보이는 물건에 눈에 익은 꽃들이 여러 송이 꽂혀있었다. 여자는 놀라움이 아닌 의문을 품고 식탁으로 다가가 병을 손에 쥐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어제 그녀가 홀로 마시고 던져뒀던 소주병이 분명했다. 병에는 상표 스티커가 그대로 붙어 있었다. 여자는 코를 병 입구에 대고 안에 담긴 액체의 냄새를 맡았다. 술이 아닌 물이었다. 하지만 확인을 하고 난 후에도 여자는 다시 한 번 꽃줄기 사이로 코를 들이밀어 병 속을 킁킁거렸다. 아주 미세한 술의 흔적이라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그게 마치 어떤 중요한 증거라도 되는 듯이. 그러나 술 냄새는 나지 않았다.

       '너구나.' 여자는 생각했다. '그래, 넌 항상 이런 식으로 사과를 하니까. 싸운 지 일주일이나 됐는데, 연락이 한 번도 안 와서 얼마나 서운했는지 몰라. 온종일 전화기만 보고 있었어. 그리고 대문도. 그런데 전화는 울리지도 않고 대문도 절대 열리지 않더라고. 오늘이 내가 너에게 주는 마지막 날이었어. 진심이야. 오늘도 전화가 울리지 않고 대문이 열리지 않으면, 포기하려 했어. 널 영영 보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뜻은 아니고.'

       남자에게 여태 하고 싶었던 말을 생각하자니, 여자는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쉼 없이 내리는 비는 물이 담긴 소주병과 거기에 꽂힌 파란 팬지와 잘 어울렸다. 물론 병에는 팬지만 있는 게 아니다. 작은 보라색 제비꽃도 군데군데 섞여 있다. 여자는 집 안이 제법 쌀쌀한 게 마음에 들었다. 거실 창문 밖으로, 여자가 남자와 함께 가꾼 정원이 비에 젖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저곳에서 팬지와 제비꽃을 꺾었을 것이다. 너무 많이 꺾으면 여자가 화를 낼 거라는 생각에 머뭇거리기도 했을 것이다. 빗방울에 풀잎과 꽃잎이 쉬지 않고 움직였다. 여자는 갑자기 춤을 추고 싶어졌다. 그래서 곧바로 거실에 놓인, 텔레비전 크기만 한 오디오를 향해 달려가 음악을 틀었다. 빌 에반스였다. 여자는 가사가 없는 음악을 사랑했다. 자신이 직접 가사를 지어 부를 수 있어서였다.       

       뱅글뱅글 레코드판처럼 춤추듯 제자리를 돌던 여자의 눈에 오디오 옆에 놓인 전화기가 보였다. 그에 여자는, 정말로 오랜만에, 망설이지 않고 수화기를 집어 들었고 자신을 위해 선물을 준비한 남자의 번호를 눌렀다. 수신음이 여덟 번이나 울리고 나서야 통화가 연결됐다. 보통 수신음 세 번이면 전화를 받는 남자였기에 여자는 하마터면 초조함에 입술을 물 뻔했지만, 어쨌든 남자는 전화를 받았다. 여자는 지금 이 순간 그저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데 수화기 너머로 아무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여보세요?" 결국,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 남자가 조금쯤 지친 목소리로 답했다. 여자는 그 목소리마저 비와 쌀쌀한 공기와 소주병과 파랗고 보란 꽃들과 가사가 없는 노래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오늘 올래?" 여자가 물었다. 벌써 전화를 끊고 싶어 안달이 난 채로 말이다. 여자는 전화하는 걸 싫어했다. 당연히 핸드폰도 없었다.

       "내가 갔으면 좋겠어?" 남자가 다른 질문으로 답했다.

       "얘기를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아." 여자가 전화를 끊고 싶은 마음을 최대한 숨기며 말했다. 남자가 그녀의 그런 점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알았어. 지금 갈게." 그렇게 남자는 먼저 전화를 끊었다.

남자의 집은 여자의 집에서 멀지 않았다. 느긋하게 걸으면 삼십 분 정도가 걸리는 거리였다. 그 삼십 분이라는 시간을 늘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있는 줄도 몰랐던 길을 걸었던가. 같은 길을 몇 번이나 돌고 또 돌았던가. 여자는 노래에 맞춰 뱅글뱅글 춤을 추며 가사를 짓는 대신 그녀가 참 좋아하는 옛 생각에 잠겼다. 

            

       남자와 여자의 집을 잇는, 있는 줄도 몰랐던 그 많은 길 중 하나에 꽃집이 있었다. 처음 그곳을 남자와 함께 지나던 중에, 남자가 돌연 걸음을 멈춰 섰다. 여자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남자를 올려다봤다. 몇 분째 둘은 서로의 손을 잡지 못해 꼼지락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용기를 낸 남자의 얼굴이 아니라 꽃집을 향해 고개를 돌린 그의 뒤통수였다.

       "왜요? 꽃 살 일 있어요?" 여자가 섭섭함에 일부러 밝은 목소리를 내며 물었다.

       "아뇨, 그냥." 남자가 얼버무렸다. 발은 꿈쩍도 하지 않으면서.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긴장으로 인해 생겼던 손바닥의 땀이 다 말라버렸음에 아쉬워했다. 그때 남자가 여자의 침묵을 어찌 받아들였는지, 말을 이어갔다.

       "제가 꽃 사는 걸 좋아해요." 남자는 쑥스러워하고 있었다.

       "꽃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요?" 여자는 그런 남자가 궁금했다.

       "꽃보다는, 꽃을 선물하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솔직한 대답이었다.

       ", 뭔지 알 것 같아요. 저도 음식 자체가 좋다기보다는 누구한테 음식을 만들어 주는 게 더 좋거든요." 여자가 조금 웃었다.

       "꽃은요?" 남자가 드디어 여자 쪽으로 고개를 완전히 돌렸다.

       "선물하는 거요?" 여자가 궁금한 마음에 그렇게 물었다. 그녀가 아마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거라고, 남자는 잘못 짐작했다.

       "아뇨, 받는 거요." 하지만 남자는 모르는 척하는 그녀가 싫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여자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잠깐만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꽃집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잠시 후에, 투명한 포장지에 싸인 작은 화분을 들고서 남자가 나왔다. 남자는 화분을 여자에게 건넸다. 화분에는 아직 꽃이 피지 않은 초록색의 무언가가 심겨 있었다. 고마워요. 아뇨, . 짧은 말과 그보다 훨씬 긴 침묵이 오갔다. 그러다 여자가 먼저 입을 뗐다.

       "이거 옮겨 심을 수 있을까요? 안 그래도 집 마당이 텅 비어서요."

       "그럼요. 그런데 집에 마당도 있어요? 부럽다."

       "와서 구경할래요? 그리고 이왕이면 이거 옮겨 심는 법도 가르쳐줘요."

두 사람은 그날 그 길 위에서 결국 손을 잡지 못했다. 여자는 한 손엔 화분을, 다른 손엔 가방을 들고 걷기 시작했다. 남자는 그 모습에 화분 대신 여자의 가방을 들어줬다. 남자가 양손에 두 개의 가방을 든 걸 보고,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으로 그 작은 화분을 들었다. 여자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 둘은 많은 말을 나누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고, 그렇게 밝지 않은 정원에 들어서고 나서야 둘은 꽃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남자가 선물한 화분 속의 식물은 히아신스였다. 여자가 꽃은 무슨 색이냐고 묻자, 남자는 그걸 물어보지 않았다며 탄성을 질렀다. 여자는 괜찮다며 웃었다. 그리고 자신은 파란색을 좋아한다고, 그래서 꽃도 파란 꽃이 예뻐 보인다고 고백했다. 남자는 놀란 듯, 자신도 파란색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얼마 후에는 조용한 목소리로 화분에 든 꽃을 이렇게 직접 옮겨 심는 건 실은 처음이라고 했다. 여자는 아까보다 더 크게 웃었다. 흙을 도닥일 때, 두 사람의 손가락이 여러 번 스쳤다. 상대방의 손가락을 느낀 그 짧은 시간 동안 둘은, 평생 알지 못하겠지만, 같은 생각을 했다. 이 히아신스가 파란 꽃을 피웠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고서도 그들은 며칠 뒤에 연인이 될 수 있었다. 기다렸던 히아신스는 하얀 꽃을 피웠다.

            

       곧 점심시간이었기에 여자는 간단히 에그 샌드위치를 만들기로 했다. 여자는 언제나 넉넉하게 음식을 만들었다. '그게 제 단점이에요'라고 여자가 말했을 때, '저는 혼자서 밥을 못 먹는 게 단점이에요'라고 남자가 답했다. 두 사람은 처음으로 여자의 집에서 함께 점심을 먹고 있었다. 메뉴는 파스타였다. 스파게티 볼로네즈. 두 개의 흰 그릇 안에는 파스타가 가득 들어있었다. 여자가 남자의 대답을 듣고 그건 단점이 아닌 것 같다고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던 찰나에, 그는 이어서 '그래, 앞으로 계속 같이 먹으면 되겠네요'라며 맑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계속 포크에 파스타를 돌돌 말아 먹었다. 우습지만, 여자는 남자가 지나가듯 꺼낸 그 말과 미소와 금방 비어버린 그의 그릇과 아직 천천히 파스타를 씹는 여자를 기다리는 편안한 침묵에, 얼마 남겨두지 않았던 마음마저 전부 내주고 말았다. 마음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된 여자는, 신기하게도, 그제야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달걀을 삶고 껍질을 까는 도중에 남자가 열쇠로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여자는 계속 부엌에 머물렀다. 남자의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면 질수록, 여자의 얼굴에 어쩔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발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을 때, 여자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길 기다렸다. 그러나 집안은 마치 여자만 홀로 있는 듯 조용했다.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낀 여자는 재빨리 고개를 들었고, 눈앞엔 남자가 있었다. 몸은 부엌을 향해 있지만, 시선은 부러 여자가 없는 곳을 향한 채로 서 있는 남자가. 아니다, 여자는 그녀의 생각이 다행히 틀렸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의 시선은 식탁 위 꽃을 향하고 있었다. 안심한 여자는 꽃을 꺾어다 소주병에 꽂는 남자를 상상하며 말을 꺼냈다.

       "배고프지? 샌드위치 거의 다 됐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얘기 하고 싶다며." 남자가 마침내 여자를 보며 말했지만, 여자는 그게 또 싫었다. "나 오래 못 있어. 할 얘기 있으면 해."

       "주말인데, 오늘 무슨 일 있어?" 여자는 싫은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물었다. 여자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을 드러내는 데에, 그녀는 그다지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너는 왜 매번 제대로 듣지 않는 거야?" 남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여자는 오디오의 음악을 진즉 끌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기억 안 나는 척 연기하는 거라면, 그만둬."

       "갑자기 화를 내면 어떡해? 나는 네가 지금 왜 화를 내는지도 모르겠어. 화해하려 하잖아, 내가." 음악을 꺼야 했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입혀지는 걸 어떻게든 막고 싶었다. 그래서 손을 씻고 젖은 손을 티셔츠에 닦아 말리며 거실에 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발걸음을 옮긴 그때, 그녀의 눈에 다시 한 번 식탁 위의 꽃이 들어왔다.

       "그럼 저 꽃은 다 뭐야?" 여자가 뚝,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질문이라기보다는 항의에 가까웠다.

       "무슨 꽃?" 이번엔 남자가 물었다. 그건 순수한 질문이었다. 그는 여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무심하기까지 한 질문이 폭력이 되어 여자를 때렸다.

       그리고 견디기 힘든 침묵이 이어졌다. 여자의 귓가에는 제목이 갑자기 기억나지 않는 노래와 그칠 듯 그치지 않는 빗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남자의 지쳤다는 표정에, 그녀가 가리킨 꽃을 앞에 두고도 도대체 그 꽃이 무엇인지, 그게 왜 중요한지 알아차리지 못하는 그의 답답한 모습에, 깨달을 수 있었다. 네가 아니었구나.

       "하하."

여자는 이 상황이 너무나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꽃을 꺾고 빈 소주병을 냄새가 가실 때까지 깨끗이 씻고 텅 빈 식탁을 알록달록한 꽃 몇 송이와 초록색 유리병으로 꾸민 것은 다름 아닌 술에 취한 자신이었다. 어쩌자고 그런 착각을 했을까. 소주병에 계속 붙어 있던 상표 스티커 따위, 그런 종류의 집착은 네가 아닌 나에게 들어맞는 것인데.

            

       일주일 전,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집에서, 남자는 여자에게 그만하자는 얘기를 했다.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이냐고 여자가 물어오자 남자는 고집스럽게 같은 말만 반복했다. 그러다 기어코, 그는 그녀의 입에서 먼저 '헤어지자'라는 말이 나오게끔 했다. 헤어지자는 소리냐고, 끝을 내자는 소리냐고 여자가 양보하듯 물었을 때, 남자는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이라고 대답했다. 여자는 시간을 갖자는 제안을 했다. 아니, 부탁했다. 남자는 그에 한숨을 쉬고는 식탁 위에 뒀던 열쇠고리를 집어 들고 나가버렸다. 그 열쇠고리엔 여자의 집 열쇠도 달려있었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라고, 남자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는 자신의 집 열쇠를 보며 여자는 자신을 안심시켰다. 그와는 이미 몇 번 다툰 적이 있었고, 그때마다 두 사람은 화해했다. 잘못이 있는 쪽이 사과할 때도, 반대로 아무 잘못도 없는 쪽이 사과할 때도 있었다. 여자는 누구에게 잘못이 있든, 그걸 따지는 건 결국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있다' 그리고 '없다'로 나누기만 해서는 매듭지을 수 없는 게 세상에는 너무 많기에. 중요한 건 두 사람이 각자 나눠 가질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남자가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봤다. 남자는 여자와 달랐다. 무엇이 좋고 무엇이 싫은지, 무엇을 원하고 또 무엇에 질렸는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다. 여자가 한 마디를 꺼내기 위해 속으로 수백 번, 수천 번 같은 말을 곱씹는 동안, 남자는 떠오르는 말을 그대로 뱉었다. 남자에겐 그것이 진심에 가까웠다. 여자는 그런 남자의 진심에 감동했고 마찬가지로 상처받기도 했다. 그 상처가 아파 눈물이 찔끔 나올 때면, 여자는 굳이 남자가 보지 못하도록 고개를 돌렸다. 눈물을 훔치려 손을 들 수도 없었다.

       "바보구나." 여자가 자신에게 말했다. 그리고 남자는 그에게 하는 말인 줄 알고 여자를 쳐다봤다. 조금 놀라기도 한 것 같은 남자의 두 눈을 똑바로 보며 여자는 생각했다. 매번 제대로 들었다고. 우리가 함께 흙을 도닥이던 소리도, 네게 전화를 걸 때 울리는 수신음도, 내게 다가오는 네 발걸음도, 네가 내쉬는 한숨도, 전부 제대로 들었다고. 기억이 정말 나지 않았던 적은 있었지만, 기억 안 나는 척 연기한 적은 결코 없었다고. 너는 그걸 진짜 몰라서 내게 그런 말을 한 거냐고. 떠오른 대로 꺼낸 그 말이 네 진심이었느냐고.

       "우리 집 열쇠 줘." 여자가 남자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남자는 주춤하더니,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열쇠고리에서 빼다가 여자에게 건넸다. "잘 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남자에게 여자는 그렇게 끝을 알리며 다시 뒤로 돌아 부엌으로 갔다. 껍질은 다 깠으니까, 이젠 달걀을 다지면 된다. 흰자 따로 노른자 따로. 여자는 열심히 생각했다. 그다음 얼마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여자는 등 뒤로 대문 쪽으로 멀어져가는 남자의 발소리를 들었다. 그가 대문을 여닫는 소리도 들었다.

 

       ", 노래 끄는 걸 깜빡했다." 여자는 혼잣말을 하며 달걀을 다지던 것을 잠시 멈췄다. 그녀는 손을 씻고 젖은 손을 티셔츠에 닦아 말리며 오디오를 끄기 위해 거실로 향했다. 그리고 정지 버튼을 누르려던 그녀는, 조금 전 제목이 기억나지 않았던 노래가 떠올라 그 노래를 찾아 다시 틀었다.

       "맞아. 빌 에반스 트리오의 'Spring is Here.'"

여자는 노래를 들으며, 자신이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아는 동물처럼 바닥에 조심히 내려앉았다. 봄을 알리는 노래가 왜 이리 슬픈 거냐고, 그녀는 따지고 싶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비도, 홀딱 젖은 정원의 꽃들도, 쌀쌀한 집 안의 공기도, 식탁 위의 우스운 꽃병도, 이 슬픈 노래와 뭐가 이다지도 잘 어울리는 거냐고, 따지고 싶었다. 여자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 이별해서가 아니었다. 따지고 싶은데, 따질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였다. 앞으로 이 노래를 들으면 바로 떠오를 가사가 생겨버렸기 때문이었다. 좋아하는 파란 꽃을 더는 심을 수 없게 됐기 때문이었다. 식탁 위의 소주병을, 그곳에 꽂힌 꽃이 다 시들 때까지 치울 수 없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봄치고는 추운 날씨였다. 비는 마치 집안으로 들어와 몸을 덥히고 싶다는 듯이 창문을 두드려댔다. 여자는 그 소리를 듣고 창문을 열었다.




한국은 이제 봄이 왔다고 하니까, 봄에 관한 글을 쓰고 싶어서 이런 단편을 썼어요. 사랑에 빠지고 싶은 기분이 드는 계절이 봄이라는데, 그 말과는 상당히 먼 얘기가 돼버렸네요. 하하. 제가 있는 곳은 곧 가을이라 그런가. 처음에 생각한 남자는 저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여자도 저런 사람이 아니었고.

단편의 제목은 김춘수 시인의 「꽃」에서 따왔어요.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그에게로 가서 나도 /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이 문장 보고요.

, 제가 빌 에반스를 좋아해요. 가사 없는 노래는 잘 듣지 않는 편인데 말이죠. 가장 아끼는 곡은'Someday My Prince Will Come'이에요.

요즘 글을 엄청나게 많이 쓰고 있는 것 같아요. 쏟아낸다고 해야 하나. 그게 힘들기도 하지만, 참 좋아요.

 

다들 예쁜 봄 보내시길 바라요.


출처 http://blog.naver.com/rimbaudize/220653269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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