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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대 영의정(領議政)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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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애비28호
추천 : 15
조회수 : 3863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5/12/05 00:5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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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임금의 피난 이야기 후에 함흥차사 이야기를 올리기로 했습니다만 함흥차사 이야기를 쓰다가 너무 재미 없는 관계로 콘텐츠를 좀 더 보강하기 위해 잠시 접어두고 영의정 이야기를 올립니다.)



조선의 역대 영의정(領議政) (1부)


영의정의 탄생

1401년(태종1년) 7월 13일 개정된 관제에 따라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라 칭하고 초대 영의정부사에는 개국공신 이서(李舒)가 취임한다.

영의정(혹은 영의정부사)은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뭔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상당히 있어 보인다.)이며,

조선에서 임금 아래로 신하들 중 가장 높은 계급이다. 일인지하만인지상(上. 위로 한 명 아래로 만 명)이라고 영의정의 자리를 빗대어 말하기도 한다. (물론 편집자의 경우 만인지하무인지상...ㅠ 주르륵)

의정부의 최고 상급자이며 영상()으로 불렸으며, 상상(), 상대(上台), 영대(領台), 수규(), 원보() 등의 약칭(애칭)으로도 불려졌다.

그러나 개국 초기, 영의정(부사) 자리는 명예적인 느낌이 강하였다.

좌의정은 이조(兼判吏曹事, 겸 판이조사), 우의정이 병조(兼判兵曹事, 겸 판병조사)의 최고 결제권자인 판사를 겸 하는 등 실질적인 권력은 좌, 우의정의 손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어찌하였든 당시는 개국 초기 단계이긴 하지만 의정부에서 대부분의 일을 주관하고 임금은 결제만 하는 분위기인, 정도전이 바라던 재상중심의 정치가 형식적으로나마 엇비슷하게 펼쳐지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태종 임금

​불안했던 초기의 영의정

태종 임금의 집권 후 영의정 부사의 관직이 생긴 1401년(태종 1년) 부터 세종 대왕에게 왕위를 넘긴 1418년(태종 18년)까지 모두 이서(李舒) 2번, 하륜(河崙) 2번, 성석린(成石璘) 할배가 3번의 영의정(부사)를 지내는 등 총 13번의 영의정 교체가 있었다. 평균 1.3년(年)에 1회의 비율로 영의정이 교체 되었다.

개국 공신들도 챙겨야 하고 1, 2차 왕자의 난에 대한 보상도 이루어져야 하는 등 창업공신들에 대한 나눠 먹기성 인사들도 많아 개국 초기의 어수선함이 그대로 들어난다.

​육조(六曹)체제의 강화

강력한 국가는 강력한 군주의 힘에서 나온다는 것을 굳게 믿는 태종 임금께서 이날 의정부, 육조, 승정원 등의 관제를 개정한다.

​1405년(태종 5년) 1월 15일. 이때까지 의정부(議政府)에서 각사(各司)를 총괄하고, 사평부(司平府)에서 전곡(錢穀)을 관장하고, 승추부(承樞府)에서 갑병(甲兵)을 관장하고, 상서사(尙瑞司)에서 전주(銓注)를 관장하게 하고, 좌·우정승(左右政丞)으로 판사(判事)를 겸하게 하여, 육조(六曹)에서는 조정(朝政, 조정의 정사를 논하는 일) 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이 개정으로 인해 사평부를 혁파(革罷)하여 호조(戶曹)로 귀속(歸屬)시키고, 승추부를 병조(兵曹)로 귀속시켰으며, 동서반(東西班) 전선(銓選, 관리의 천거 및 임용)을 이조(吏曹)와 병조(兵曹)로 귀속시키고, 의정부의 서무(庶務)를 나누어서 육조(六曹)로 귀속시켰으며, 육조에 각각 판서(判書) 한 명을 두고, 직질(職秩)을 정 2품으로 하였으며, 전서(典書)와 의랑(議郞) 각각 두 사람씩을 없애고 좌, 우참의(左右參議) 각각 하나씩을 두었는데, 계급은 통정(通政, 정 3품)으로 하고, 정랑(正郞)과 좌랑(佐郞) 각각 한 사람씩 새로 더 두었다.

의정부에서 하던 대부분의 기능을 육조로 이관하고 육조에 실무 정원도 많이 늘리는 등 육조를 실질적인 권력기구로 만들고 정승들의 지위를 명예직 비슷하게 낮추는 개정이었다.

이것이 국사책에서 배우는 재상 정치의 의정부서사제(制)에서 왕권 강화 목적의 육조직계제()로 바뀌었다는 뜻이다.

그럼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맡으신 할배들은 뭘 하시는 건가? 과연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최고의 관직에 따른 최고의 녹봉(연봉)을 받는 할배들을 그저 놀고 먹게만 할 것인가? 아래에 나오는 구절에 그 부분이 잘 나오리라 믿는다.​



영의정이 겸(兼) 하는 직책

영의정이 현재 국무총리급의 업무를 수행하지만 당시 본 임무 이외에도 여러가지 업무를 겸(兼) 하여야 했다.

임금이 공부하고 학문적인 토론을 하는 경연(經筵) 자리의 책임자인 경연 영사(經筵領事).

물론 경연이 매일 열린다고 하더라도 실무진들이나 매일 참여하는 것이고 삼정승들이나 높은 직위의 사람들은 번갈아 한번씩만 참여한다.

이 밖에 홍문관 영사(弘文館領事), 예문관 영사(藝文館領事), 춘추관 영사(春秋館領事), 관상감 영사(監嶺), 실록의 편수 책임자인 실록청(實錄廳) 영관사(領館事).

국가적인 중대 사안의 범죄 행위의 조사 책임자인 ​의금부 제조(義禁府提調)

국가의 예법을 제정하는 의례 상정소 도제조(儀禮詳定所都提調)

왕실의 무덤 관리 및 제사 관리인 종묘서 실안 도제조(宗廟署實案都提調)

​국가의 제사(祭祀)와 시호(謚號)를 정하는 봉상시 실안 도제조(奉常寺實案都提調). 봉상시는 원래 정3품이 책임자인 부서이지만 정치적인 사안이 걸린 시호 제정 문제가 있을 경우 영의정이 도제조를 맞는다.

​임금이나 왕자의 혼례 담당 가례색 도제조(嘉禮色都提調)

임금이나 왕비의 장례의 책임자인 국장 도감 도제조(國葬都監都提調)

​외교 문서 담당인 승문원 도제조(承文院都提調)

​한양의 시전(市廛) 관리, 감독인 경시서 도제조(京市署都提調)

선농(先農) 제사의 행사(行事) 집사관(執事官), 군기감(軍器監), 약방(藥房, 내의원), 사복시(司僕寺) 등의 제조.

과거시험 독권관(讀券官). 뭐 더 있는데 이 정도로 써 두어도 다들 업무가 많다는 것을 아시리라... 

결론은 임금 이외의 조선 사람이 잘못하면 전부 영의정 책임이다.

(시대에 따라,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 업무 분장의 변화가 심하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 시대에 따라 더하고 덜하는 직책이 있겠으나 어쨌던 뼈골 빠지게 일이 많으시다.)



가장 오래 재임 한 영의정

1431년(세종 13년) 9월 3일에 취임하여 1449년(세종 31년) 10월 5일 좌의정 하연(河演)에게 영의정 자리를 넘겨 준 그 유명한 황희(黃喜) 정승 되시겠다.

도합 18년 6개월(윤달 5번 포함.), 무려 222개월 동안 영의정을 하셨다.

물론 중간중간에 탄핵도 당하고 병도 걸리고 사표도 쓰고 그러셨지만 이 분 덕분에 세종 대왕이 한글도 만들고 측우기도 만드는 등 여러가지 분야에서 신경을 써서 체제를 정비하고 나라를 발전 시켜 조선이라는 나라의 기반을 다진 주역 중의 주역이다.

영의정의 연봉과 복지혜택

​태종 7년, 정승에게 녹봉(祿俸, 연봉)으로 녹미(祿米) 1백 석(石), 주포(紬布)·정포(正布) 합하여 32필(匹)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다 과전(科田)으로 1백 50결(結)의 경작용 토지를 따로 주었다.(대충 발로 계산하면 여의도의 절반이 넘는 크기 정도 되겠다.)

2품 이상의 관리들에게는 나라에서 품위유지용으로 아예 노비 2명을 내려주어 관리의 거동을 돕게 하였다. 그러나 각 부서별로 부서의 업무를 보조하는 관청노비들이 있는데 이 노비들을 직급에 따라 사노비처럼 사용하기도 하여 폐단이 생기기도 하였다.

세종 7년의 기록을 보면 좌, 우의정 등 정승들이 관청노비를 대략 30, 40명 까지 데리고 행차를 하기도 하고 또,행차 이외에 개인적으로 집을 짓거나 농사일을 시키기도 하여 문제가 되었다는 기록도 있었다.

(태종이나 세종 임금 시절의 역사 드라마에서 대감님 행차에 가마꾼 몇 사람에 옆에 집사 같은 사람 하나 데리고 다닌다면 명백한 고증오류이다.)

(조선 시대에 관노비를 사적으로 이용하는 정도는 아주 바람직한​ 관리의 표본이었다. 그거 가지고 크게 흠 잡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오죽하면 나라에서 주는 녹봉으로만 생활하고 노비도 자기집 개인노비만으로 생활을 꾸려가던 사람을 '청백리(淸白吏)'라고 하였다. 황희 정승이 청백리로 불리는 이유가 관청의 재물을 자기집으로 실어 나르지 않고 자기 재산으로만 재산증식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의정부서사제(制)로의 회귀(回歸)     

​1436년 (세종 18년) 4월 25일 세종 실록의 한 부분을 그대로 옮겨본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대단치 않은 상시(常時)로 행하는 일은 그대로 육조에 맡겨서 전대로 시행하게 하고, 또 육조가 경외(京外)에서 품외한 공사(公事)를 다만 본문(本文)에 의거해서 전보(轉報)하고 가부(可否)를 의논하지 아니함은 옳지 못하오니, 이후로는 해조(該曹, 육조 각 부서)로 하여금 의논하여 결정해서 본부(本府, 의정부)로 보고하게 하고, 본부에서는 즉시 의논하여 계문(啓聞)하게 하되, 그 변경의 완급(緩急)과 모든 기일에 바쁜 군사에 관한 일들은 해조로 하여금 계문한 뒤에 본부로 보고하게 하며, 미두(米豆) 10석, 돈 10관, 베 10필 이하는 호조로 하여금 본부에 보고하고 시행하게 하여, 연말에 가서 계문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세종실록 18년(1436 병진 / 명 정통(正統) 1년) 4월 25일(신유) 2번째기사
결론은 사소한 일은 각 부서에서 알아서 하고 사후 보고, 중요한 일은 의정부에 보고해서 협의 후 임금에게 보고하고 임금의 명령도 중요한 것은 의정부를 통해서 육조에 하달. 외침과 같이 아주 시급한 것을 제외하고는 의정부에서 다 해먹겠다는 소리다. 물론 이 때 영의정은 일복 터진 황희 할배였다.



의정부서사제(制)의 효과

1436년(세종 18년) 10월 1일. 의정부에서 모든 업무를 주관하기 시작하고 6개월 정도가 흐른 시점.

그전까지만 해도 육조의 어느 부서에서 안건이 올라오면 해당 부서와 다른 부서간에 의견대립이 시끄럽게 자주 있었다.

그런데 근래에는 그런 논쟁 없이 의정부에서 어느 부서의 안건이라고 임금에게 보고하면 다른부서에서는 아무소리도 없이 결론이 나는 것이 수상하신 세종 임금. 이날 세종 임금과 황희 정승간의 대화를 들어본다.

도승지 신인손(辛引孫)에게 명하여 정부에 의논하기를,

“내가 의논하도록 명령한 일은 서로 논박하면서 각기 마음속에 쌓인 바를 진술하면서도, 육조의 상신(上申)하는 일은 뇌동(雷同)하여 계달(啓達)하면서 아무런 다른 의논이 없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니, 영의정 황희(黃喜) 등이 아뢰기를,
“성상의 명령이 진실로 마땅합니다. 그러나 신 등이 어찌 육조의 상신한 것을 소홀히 하여 그렇게 한 것이겠습니까. 다만 상신한 것이 만약 합하지 못한 점이 있으면, 다시 마감(磨勘)하게 하여 신 등의 의견에 모두 합한 후에야 이를 계달하게 한 까닭으로, 다른 의논이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결론. 세종 임금은 왕따 당한거지만 일 잘하는 정승들 덕분에 임금에게는 여유시간이 너무너무 많아지셨다. 왕따는 외로운건가...
덕분에 한글창제, 측우기 등 천문 기상 기술보유, 서적 인쇄 출판 기술 확보, 왕자와 공주 무한 생산 등의 업적을 이루실 수 있었다.

세종 대왕 당시의 영의정

1418년 태종으로 부터 왕위를 물려 받은 세종 대왕은 1450년(세종 32년) 돌아가시기 전까지 32년 동안 겨우 5번의 영의정 교체만이 있었다.

황희 정승이 18년간의 재임 하였고 이직(李稷) 7년, 유정현(柳廷顯) 6년 등으로 5명의 영의정들이 재임하였다. 평균 재임 기간 6.4년.

태종 임금이 잘 다진 왕권을 세종 대왕께서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나라의 기반을 확실히 다듬어 놓은, 정치가 안정된 국가 다운 모습의 반증이라 할 수 있겠다.


 

비운의 영의정 심온(沈溫)

1375년 출생. 1418년(세종 즉위년) 12월 25일 사망. 사망 원인은 자살로 기록된다.

1408년(태종 8년) 딸을 충녕대군과 혼인 시킨다. 세종 대왕 즉위년인 1418년 9월 3일에 영의정에 제배된다.

(중략)... 이조판서·공조판서를 역임하고, 양녕대군을 대신해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고, 이어 세종으로 즉위하자 국구()로서 영의정이 되어 정치의 실권을 가까이하기에 이르렀다. 1418년에는 사은사(使)로서 명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이 때에 그의 동생 정()이 병조판서 박습()과 함께 상왕인 태종의 병권 장악을 비난한 것이 화근이 되어, 이듬해 귀국 도중에 의주에서 체포되어 수원으로 압송, 사사되었다.(세종 실록의 기록에는 자살한 것으로 나온다.)

이 사건은 그가 국구로서 세력이 커짐을 염려한 태종과 좌의정 박은()의 무고로 밝혀져, 뒤에 세종은 관직을 복위시키고, 안효()라는 시호를 내렸다. 죽기 전 유언으로 박씨와 혼인하지 말도록 당부하니, 오랫동안 지켜졌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강경파와 온건파

강(强), 온(穩)의 조화를 이루었던 세종 대마왕 시절의 영의정

세종 대왕 시절의 영의정은 심온(沈溫, 1년 미만 재임), 유정현(柳廷顯, 6년 재임), 이직(李稷, 7년 재임), 황희(黃喜, 18년 재임), 하연(河演, 2년 재임)의 순서다.

심온은 태종이 상왕 시절에 외척세력 확장 방지 등의 명목으로 처형 시켜버렸고 곧바로 태종 때도 영의정을 지낸 경력이 있는 좌의정 유정현(柳廷顯)을 임명한다. 유정현은 순탄한 관직생활을 보냈으며 성품이 무척 과단성이 있고 또한 검소, 근면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도 이치를 따지고, 옳은 일을 주장할 때에는 조금도 꺼리지 않았다고 한다. 결정적으로 그는 태종이 양녕대군의 세자위를 폐할 때 누구도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였으나, 그가 먼저 현명한 이를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주장한, 태종 임금의 입장에서는 친 충녕대군파라 볼 수 있는 인물을 영의정에 세운 것이다.

황희(黃喜)이직(李稷)은 태종 말기 양녕에서 충녕으로 세자를 바꾸는 논의를 반대하다가 태종에게 미움을 사서 유배 당한 인물이다. 

보통 이런 사건에서 나중에 배척 당한 왕자가 왕이 된 경우 반대파들을 숙청하는 것이 흔한 일 아닌가?

그러나 세종 대왕은 자기를 세자 자리에서 배척한 인물들을 중용하여 영의정까지 해먹게 하신, 능력만 있으면 과거 따위는 무시하고 등골을 다 빼다 드시는 악덕군주로 유명한, 좀 변태스런 훌륭한 왕이었고 또, 이 신하들도 그 기대에 맞게 최선을 다하여 신하의 도리와 임무를 수행하던 시기였다.

하연(河演)은 세종 대왕 말년인 세종 31년에 영의정이 되어 세종조에서 영의정으로는 별다른 활약을 보일 시간이 없었으나,

그가 세종 대왕 시절  대사헌으로서 조계종() 등 난잡했던 불교 7종파를 선(), 교() 양종(), 36본산으로 통합하고, 혁파된 사원의 토지와 노비는 국가로 환수 하였고 판이조사로서 이조의 일을 맡아 공세법()을 마련했으며(우리가 예전 역사책에서 배웠던 연분9등, 전분6등법을 이 분이 세종 대왕과 함께 만든것이다.) 각 품의 행수법()을 제정 하는 등 세종 대왕에게는 치밀한 행정능력을 과시한 인물이라 다음 임금을 위해 자리를 정비하고 왕권을 넘겨 주는 중요한 시기의 영의정이었다.(물론 하연이 영의정에 제배 된 때 그의 나이가 74세라는 핸디캡이 있었지만...)



1466년 세조12년 1월 15일 부터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를 영의정(領議政)으로 고쳐 부르게 된다.

정부 문서에 '영의정부사'라고 다섯 글자를 쓰자니 잉크(먹물)가 아까웠나 보다.


최연소 영의정

​세조 임금 때 이준(李浚) 28세로 최연소 영의정이다.

이준(李浚)은 세종 대왕의 네째 아들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의 2남이다.

이준은 세조 임금 막바지인 1467년(세조 13년) 발생한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믿을 사람이 없었던 세조 임금에 의해 병조 판서가 되었다가 1년 뒤인 1468년(세조 14년) 7월 17일 제헌절에 영의정에 제배 되었다.

물론 어릴 때 너무 잘나가면 한방에 훅~ 가는 수가 있다는 것을 직감한 이준의 아버지인 임영대군 이구(李璆)가 이준이 영의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대궐에 나아가 세조 임금에게, 이준(李浚)은 어리석고 어리어 수상(首相)에 거(居)하는 것이 마땅치 않으니, 청컨대 성명(成命)을 거두어 주소서.”라고 하지만 거부 당하고 이준은 영의정에 오른다. 

세조가 죽고 예종 임금이 즉위 한 후 잠시 영의정 자리에 있다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나지만 1470년(성종 1년) 최세호의 난언 사건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유배를 가게 되고 ​1479년(성종 10년) 1월 28일. 유배지인 영해(寧海)에서 39세의 젊은 나이에 쓸쓸하게 죽고 말았다.



(2부 제작 중입니다.)



(개인적인 사견이 좀 많이 들어가는 내용들이라 갑론을박 할 부분도 좀 있으리라 봅니다. 어디까지나 편집자 개인적인 사견이오니 너그러이 양해 하여주시기 바라고 완전 틀린 부분에 대해서는 과감한 지적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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