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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상고사 대토론회 - 2015.11.16 국회
게시물ID : history_2439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임경업
추천 : 2
조회수 : 1592회
댓글수 : 17개
등록시간 : 2015/12/08 00:23:04
 
한국상고사 대토론회
부제 - 한군현 및 패수 위치 비정에 관한 논의
2015년 11월 16일 국회의원회관 제1소회의실
 
2시간13분을 투자해서 동영상을 봤습니다.
국회영상회의록시스템에도 올라와 있다면, 속기록이 있어서 pdf 파일을 볼 수 있을텐데
11월16일자에 안 올라와 있네요. 회의가 아니라 없나봐요.
 
 
공석구 한밭대 교수
- 진서, 사기색은, 통전, 태평환우기, 독사방여에 낙랑군이 갈석산, '장성소기'와 연관되어 나온다.
- 이 사서는 모두 당나라 이후 사서입니다. 한사군 설치 당대의 사서가 아니다.
- 낙랑군 수성현은 현재는 사라진 태강지리지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각종 사서에서 말한다.
- 태강지리지는 한무제, 회제, 원제 등이 나오는 걸로 봐서 한사군 설치 시기가 아니라 384년 이후의 책이다.
- 태강지리지의 자료를 가지고 한사군이 평양까지라고 비정하는 중국의 견해는 잘못된 견해이다. 태강지리지는 4세기 이후 낙랑이 요서지역으로 교치된 이후의 상황을 설명한 것이다.
 
복기대 인하대 교수
- 나는 고고학자다. 한사군은 그에 관한 문헌 자료가 많이 남아 있다. 문헌 자료에 공통으로 많이 이야기되는 부분은 그것을 정설로 보아야 한다.
- 고고학적 유물도 문헌 사료의 정설을 뒤집을 수 없다. 원래 고고학의 연대, 장소 비정은 70~80%가 나오면 맞는 걸로 인정한다. 하지만 30% 이하로 나오면 그건 거기, 그 시대의 유물로 확정할 수 없다. 평양의 낙랑 유물은 30% 정도로 보인다. 이걸 세계 고고학자들에게 말하면 확정할 수 없다고 퀘스쳔마크를 붙일 거다.
- 바이칼 호수 밑에도 그런 유물이 나오고, 일본에도 그런 유물이 나온다. 하지만 유물의 양때문에 그 유물로 그렇게 확정할 수는 없다.
- 패수가 수경에는 동쪽으로 나온다. 그런데 수경주에는 패수가 서쪽으로 흐르는 게 맞다고 나온다. 수경주를 쓴 역도원은 자기가 고구려 사신에게 물어봤는데 고구려 수도는 평양이고 평양 밑에 패수가 있고 패수는 서쪽으로 흐른다는 답을 들었다고 하면서 수경 원작자가 착각했다고 한다. 내 생각에는 역도원은 520~530년 사람인데 이때 고구려는 장수왕 시절이고, 이때는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시기이다. 중국 기록에 의하면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은 중국 요녕성 요양현 일대이다. 요사 금사에 보면 이 자리의 패수는 서쪽으로 흐른다. 고구려 사신은 이걸 말했는데 한사군이 사라진 400년 뒤의 역도원은 갈석산의 패수는 몰라서 패수, 낙랑, 평양을 연관하여 글을 썼고 이게 당나라 괄지지에 들어간 후로 이걸 사람들이 거부하지 못하게 되었다.
 
윤용구 인천도시공사 문화재 담당부장
- 낙랑군 박사는 국내에 3명이 있다. 영남대 권오중(정년/중국사), 윤용구(2002년 박사/한국 고대사), 이화여대 오영찬(2006년 박사) 셋이다.
- 전공자 입장에서 낙랑군 이야기가 나올때 책임있게 말을 했어야 하는데, 대학 밖에 나와 있어서 나설 입장이 아니었다.
- 한군현의 위치는 명청대에 구체적으로 논의 되었다.
- 조선후기에 우리나라의 학자들도 한군현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다. 중국의 사료들도 조선후기 학자들이 거의 다 모았고, 지금의 여러 주장들도 이미 조선후기의 학자들이 다 논의했던 내용들이다.
- 한사군 관련 논문은 1천여편이 되는데, 이병도 선생의 논문은 10여편밖에 안된다. 이병도설을 따른다고들 하는데, 이병도의 학설도 현재 학계에서 부정되는게 많고, 이병도가 한사군 재평양설의 효시도 아니다. 이미 조선후기에 안정복 등도 평양설을 주장했다.
- 불행히도 1910년대, 1913년, 1920년대에 일제가 대동강 유역에서 낙랑 유물들을 찾고,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패수, 열수, 대수 중에서 열수를 확정할 수 있는 비석이 발견되었다.
-청나라 학자중에 지리학에서 최고로 치는 양수경이 진번군을 황해도부터 충청도까지에 있었다고 한 후에, '진번군은 고구려땅에 있었다.'는 부분이 해소되었다.
- 북한에서 얼마전에 공개한 낙랑 목간을 보면 이병도 선생의 학설처럼 한군현이 멸악산맥이남 철령이남에는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 일제시대 일본인이 70기의 낙랑 고분을 발견했는데 대개 후한때 고분이다. 해방이후 북한이 판 낙랑 고분은 3,000여기이다. 한사군은 중국의 군현이었지만, 한사군의 운영자는 고조선인이었다.
 
이덕일 한가람역사연구소장
- 양수경, 이병도, 조선후기 학자의 주장보다 한사군 설치때의 1차사료가 더 중요하다.
-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를 평안남도 대동군 대동면 토성리라고 비정한 사람은 조선총독부 이나바 이와키치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의 홈페이지에도 얼마전까지 낙랑군 조선현이 토성리라고 올라와 있었는데 지금은 내렸다.
- 사기 조선열전에 위만이 동쪽으로 패수를 건넜다고 나와서 대동면 토성리라고 한 것 같은데 위만이 동쪽으로 건넜다고 했지 남쪽으로 건넜다고 하지 않았다. 대동강은 남쪽이다. 동쪽이 아니라.
- 회남자 : 동방의 끝, 갈석산을 지나 고조선...(갈석산은 하북성 노룡현, 산동현 무채현에 있다.) 회남자 저자 유안은 고조선 멸망 10년전까지 살았다.
- 한서 가연열전 : 동쪽으로 갈석을 지나 현도 낙랑으로 군을 삼았다.(가연은 BC43까지 산 사람)
- 응소 : 낙랑군 조선현은 기자를 봉한 곳이다.
- 낙랑군은 옛 조선국이다. 요동에 있다./후한서 최인열전 낙랑군은 요동에 있다.
- 후한서 군국지 : 열수는 요동에 있다.
- 하북성 노룡현의 갈석산은 9명의 황제가 올랐던 산이다. 여기에 낙랑군 수성현이 있었고, 여기가 만리장성의 기점이다.
 
 
<문답>
이덕일 : 낙랑목간에 한사군이 멸악산맥, 철령 이남에는 없다고 구체적으로 나오냐?
윤용구 : 북한은 낙랑목간을 `90년 7월에 발굴했는데 2009년에 공개했다. 공개할 때는 북한은 요동이 낙랑이라고 하려고 했는데 중국, 일본, 남한의 학자들이 다 이 자료를 이용한다. 멸악산맥, 철령이란 지명은 당연히 낙랑목간에 안 나온다. 모든 연구는 기왕의 연구가 축적되어 이루어진다. 연구자들은 대방군의 어디, 원산만에 있었다는 어디를 이미 알고 있다. 그러니 낙랑목간에 나오는 지명에 의해 멸악산맥, 철령이남에 한군현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덕일 : 낙랑을 평양으로 미리 비정하니까 그런 해석이 나오는 거 아니냐?
 
 
윤용구 : 회남자에 갈석산 지나면 고조선이 있다고 나오는데, 갈석산 지나면 바로 나온다고는 안했다. 한참 간 후에 고조선이 나올 수도 있다. 아까 이덕일 소장님이 발표한 기자, 위만 등의 이야기는 사기 원문이 아니라 주석에 나온다. 응소주와 다른 사람의 주인데, 위진남북조에서 당나라까지의 사람들이고 이 주석의 원문도 남아있지 않고 당나라 안사고가 집성한 기록이다. 후한서의 낙랑은 요동에 있다는 이야기들도 후한서 원문이 아니고 다 주석이다. 후한서의 주석가 이현은 7세기때 사람이다. 7세기때 낙랑은 고구려땅이었고 이당시 사람들은 고구려를 요동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낙랑은 요동에 있다고 한거다. 공손연이 대방군을 설치한 사람인데, 공손연은 요동, 산동, 한반도 서북지방을 차지했는데, 양평은 공손연이 차지한 땅의 수도이다. 양평이 떨어지니까 공손연이 차지한 땅의 사람들이 복속했다는 것이지, 양평 바로 옆에 낙랑이 붙어있어야만 낙랑이 복속하는 것은 아니다.
 
 
복기대 : 양수경은 일본에 가서 일본학자들과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다. 양수경이 역사지리부도를 만들때 일본에서 거의 만들었다. 양수경 수제자가 담기양이고 그 수제자 중에 정천수란 분이 있는데 그 분에게 배워서 내가 내막을 좀안다. 대동강 지역의 유물이 낙랑 유물이 된 것은, 문헌 해석에서 여기를 낙랑으로 여겼기때문에 이 유물들을 낙랑 유물이라고 한 거다. 한군현의 운영자는 고조선인이었다는 건 무슨 말이냐? 교치는 어디서 어디로 한 거냐?
윤용구 : 북한 낙랑 무덤에 세형동검이 들어 있다. 세형동검은 고조선의 유물이다. 그리고 부장품에 중국 유물도 들어 있다. 낙랑군의 실제 지배는 토착세력에게 위임한다. 그 사람들이 협조하지 않았다면 낙랑군이 유지되지 않았을 거다.
공석구 : 교치 설명합니다. 대전 사람이 진해에 가서 밥집을 열고서 '대전식당'이라고 한다. 그러면 그 식당에 그 지역의 대전 사람들이 온다. 진나라는 A지역의 사람들을 B지역으로 옮긴 후에 B지역의 행정구역 명칭을 A라고 한다. 그런데 이게 나중에 B지역의 사람들을 또 C지역으로 옮기고서 또 행정구역 명칭을 A라고 한다. 낙랑군은 313년에 고구려에게 멸망된다. 이때 요동 장통이 선비 모용외에게 귀순한다. 그리고 낙랑군 천여호가 따라간다. 그러니까 모용외가 이들을 낙랑태수로 임명하고 여기가 낙랑이 된다.
 
이덕일 : 주석이라고 하셨는데, 조선총독부에서 한 이야기는 윤용구 박사님이 '수다한 문제에 대한 종지부를 찍는 대사건이었다.'라고 하시고, 양수경은 일본식민사학자들과 교류한 사람인데, 이 사람은 대단한 정설이라고 하고 사기주석은 양수경보다 1,500년 전의 기록인데 이걸 가치를 깎아내리냐? 한사군 박사하셨다고 하는데, 나도 그만한 공부한 사람이다.
 
복기대 : 한반도에서 하북성 갈석산까지 교치했다면 700km~800km인데, 이렇게 교치가 되었다면 중국 영토가 갑자기 700~800km가 줄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게 설명이 되냐?
공석구 : 바로 옮긴게 아니라 조금씩 여러번 옮겼다.
 
 
공석구 : 한서에 낙랑호수가 45,000이 나온다. 후한서 군국지에는 62,000 호수가 나온다. 진서 지리지에는 호구수가 3,000으로 확 준다. 이건 뭘 뜻하나요? 낙랑군이 갈석산이라면 진서 지리지때 3천호수로 줄어들만한 정치적 사건이 없다. 진무제가 여기 동쪽 지역을 안정시켜서... 복기대 교수님은 백제본기에 낙랑 교류가 한번 나오고 그 뒤에 절연되었다고 쓰셨는데,  고구려, 백제, 신라본기에 낙랑과의 교류 기사가 많이 나온다.
이덕일 : 모본왕때 북경 근처 어양, 북평, 상곡,태원을 공격한 기록이 있다. 이건 후한서에도 나온다. 고구려는 단군조선의 강역을 회복하려고 계속 서진을 시도한 거다. 이건 고구려때문에 낙랑의 입지가 좁아져서 줄어든 것이다.
공석구 : 고구려가 갈석산까지 공격하는 사료는 없다.
복기대 : 일부러 불리한 기록을 빼지는 않았다. 주최측에서 원고를 줄이라고 해서 빠진 거다. 여러분 우리가 아는 삼국시대의 강역은 언제 정해졌을까요? 일본 사람들이 확실하게 정해놓은 거다.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고구려의 평양이 어딘지 학자들이 몰랐다. 평양이 어딘지 모르겠다는 상소가 올라온 적도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강역을 일본 사람들이 정해 놓을 때, 여기에 낙랑도 끼워졌다. 낙랑 대방을 그때 일본 사람들이 정해놓지 않았다면 우리 학계의 그 지역 그 시기 인식은 지금과는 매우 달랐을 거다. 고고학적 해석도 일본 사람들이 정해놓은 문헌 해석을 기초로 놓고 한 거다. 낙랑 대방을 빼면 그 자리에는 어떤 역사가 올 수 있을까? 고구려 연구학자들도 광개토대왕이 정벌한 성 숫자도 안 세봤다. 내가 세보니 120성이 넘어가고, 2,000촌이 넘어간다.
공석구 : 내가 `89년도 쯤에 쓴 논문에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58성을 전부 다 셌다. 너무 질타하진 말아달라. 오늘 사료 가지고 이야기 하자는 데에는 모두 동의한다. 그리고 각자가 유리한 사료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상대편의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사료에 대한 것도 합리적인 설명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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