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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ID : sisa_16363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CoolFor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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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 269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01/25 03:11:57

김광석 - 부치지 않은 편지

제1 연평해전
1999년 6월6일 북괴 경비정이 매일 NLL을 넘어와 우리측 반응을 살피고 돌아가고 있었다
6월15일 북괴측 움직임이 9일째 되는날 오전 경비정4척이 꽃게잡이 어선20척과 NLL을 넘어왔고
이에 대한민국 해군은 교전수칙에 따라 경고방송후 충각기동을 실행하였다
선체가 충돌하자 북괴 경비정 등산곶 684호는 25mm포로 우리측 함정에 공격을 가했고 북괴 어뢰정3척이 추가남하 하였다
등산곶684호는 우리측 해군의 공격에 반파되어 퇴각하였다
이날 PKM325 정장 안지영 대위가 부상을 입고 수병7명이 부상당해 긴급후송되었으며
북괴측 어뢰정2척이 침몰, 총 3척이 대파되어 최소 7~200여명의 사상자가 있었을 것이라 판단 추측하고있다
이에 북괴측에서는 대한민국에 적반하장으로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고 말도안되게 DJ정부는 수용,
훈장을 달아줘야할 전승제독이었던 박정성 제독은 진급은 커녕 좌천되어 전역했다

 


제2 연평해전
2002 월드컵 마지막날을 하루 앞둔 02년 6월 29일 오전 10시25분
NLL을 침범한 북괴 함정의 선공으로 발발, 아군전사자 6명 부상자 19명남긴 해전
정권교체와 달라진 교전수칙에 우리 해군은 손발이 묶인채 선제공격을 당하지 않는한 공격을 할수가 없었다
제1 연평해전의 패배에 보복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북괴의 기습공격이었음에도 DJ정부는 쉬쉬하였다
전사자들과 부상자들은 박정희 대통령 이후로 근 30년간 바뀌지 않은 법제도 때문에
터무니 없이 적은 보상을 받아야했다.
당시 15대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던 김대중은 일본에 월드컵 결승경기를 참관하러 떠났었으며
돌아와서도 전사자 조문은 하지 않았다.


2002년 6월 제2연평해전 전사자

PKM-357호 정장  소령 윤영하  - NLL침범 북한경비정에 차단기동 실시중 적함의 함교기습타격으로 전사 
         조타장 중사 한상국  - 총탄이 가슴에 관통했으나 함의 키를 돌려 군함의 진로를 남쪽으로 변경한뒤 전사
         병기사 중사 조천형  - 20mm포로 대응 사격중 적탄에 맞아 전사
         병기사 중사 황도현  - 20mm포로 대응 사격중 적탄에 맞아 전사
         내연사 중사 서후원  - M60기관총으로 대응 사격중 적탄에 맞아 전사
         의무병 병장 박동혁  - 부상당한 전우들을 치료하다 적 포탄의 파편에 중상을 입고 3개월간 투병하다 전사

        
생존자들중 한명인 권기형 수병은 왼손의 손가락을 모두 잃었지만 M60에서 손을 떼지 않는 투지를 보였다
하지만 그에게 남은것은 평생 지울 수 없는 고통의 기억뿐이었다.

부정장 이희완 대위는 한쪽 다리를 잃은 상황에서도 쓰러진 정장(윤영하 소령)을 대신하여 함을 지휘했고
희생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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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M-357 정장 故 윤영하 소령 (해사 50기)

 

6월 8일 출동직전 함께 식사
처음이자 마지막 용돈 건네

해군 대위 출신인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아들이 세상을 떠났다는 ‘벼락같은’ 소식을 들었던 2002년 6월 29일에도, 이틀 뒤 치러진 영결식에서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아들의 전우 한상국 중사의 시신은 41일 만에 배와 함께 찾았다. 박동혁 병장은 84일 동안 부상으로 신음하다 숨을 거뒀다. 영결식과 한 중사, 박 병장의 장례식을 포함해 세 번의 장례식에 참석했지만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아버지는 “분하고, 억울하고, 화가 나서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8년이 지나고 아버지는 달라졌다. “사고 처리가 끝난 다음부터는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나왔다”고 말했다. 절에서 아들을 추모하다가, 집에서 아들의 기사를 읽다가 갑자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14일 경기 시흥시 자택에서 만난 그는 꼿꼿한 자세로 인터뷰를 하다가 갑자기 “미안하다”며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흘렸다. 2002년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한 윤영하 소령의 아버지 윤두호 씨(68)다.



고 윤영하 소령의 아버지 윤두호 씨(왼쪽)와 어머니 황덕희 씨가 14일 경기 시흥시 자택에서 아들의 유품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 앞의 훈장이 윤 소령이 사후 받았던 충무무공훈장이다. 사진첩에 해군 복무 시절 윤 소령의 모습이 보인다. 시흥=전영한 기자
○ 날벼락 같은 죽음, 그리고 명예

“서해에서 북한 배하고 교전이 일어났다는데 영하는 괜찮을까요?”

윤 씨는 2002년 6월 29일 오전 외출했다가 집에 있던 부인 황덕희 씨(64)에게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해군사관학교 18기 출신인 윤 씨는 바로 평소에 연락하던 해군 후배에게 전화했다. “사망자 중 장교는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안심했지만 곧 TV에 보도된 사망자 명단에 ‘윤영하’라는 이름이 나왔다.

“1999년 제1연평해전에서 우리 군이 대승을 했으니 분명 북한군의 보복이 있을 것이라 봤어요. 그렇게 되면 북한군이 기습할 테니 우리 피해가 클 것이라고도 생각했죠.”

그는 남의 이야기를 하듯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아들의 죽음이 “명예로웠다”고 했다. 윤 씨는 “군인은 언제든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라며 “국가를 위해 전사했다는 것보다 군인에게 더 명예로운 일은 없다”고 말했다.

다만 제2연평해전 당일부터 오락가락한 군과 정부의 태도는 두고두고 아쉬웠다. 윤 씨가 사고 당일 아들의 시신이 안치된 경기 성남시 국군수도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현장 해군 관계자는 윤 씨에게 “5일장에 을지무공훈장 수여로 예우가 결정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날 저녁 해군은 유가족들에게 “3일장은 어떠냐”고 의견을 냈고 이는 그대로 반영됐다. 훈장도 을지무공훈장에서 한 단계 깎인 충무무공훈장이 수여됐다. 윤 씨는 “해군에 있는 후배에게 왜 훈장 등급이 깎였느냐고 물어보니 ‘미안하다’고만 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대통령과 정부의 태도는 더욱 안타까웠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제2연평해전이 벌어진 다음 날 일본으로 출국했다. 월드컵 공동 개최국 정상으로 결승전에 참석하기 위해서였지만 윤 씨는 대통령의 출국에 문제가 있다고 봤다. “전   쟁이 나면 대통령은 밖에 있다가도 들어와야 합니다. 그게 정상적인 국가예요.”



영국 런던 체류 시절 초등학생이던 고 윤영하 소령의 모습. 해운회사에 다닌 아버지를 따라 초등학교 시절 영국과 네덜란드에서 3년 동안 살았던 윤 소령은 영어와 수영, 테니스 등을 아주 잘했다. 사진 제공 윤두호 씨
○ 마지막 소원

윤 씨가 아들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2002년 6월 8일 출동 직전이었다.

“출동을 나가면 거의 한 달씩 차를 햇빛 아래 세워둬요. 그래서 종종 평택 해군 2함대에 있는 영하 차를 내가 집으로 가져오곤 했어요. 차 가지러 갔다가 부대 앞에서 만났습니다.”

그날은 아버지의 생일이었다. 점심으로 두부전골을 먹은 부자()는 자동차 열쇠를 주고받은 다음 헤어졌다. 떠나는 아버지에게 아들은 흰 봉투를 내밀었다. 아들은 “아버지 생신 축하드립니다”라고 말했다. 50만 원이 든 하얀 봉투는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받은 처음이자 마지막 용돈이었다. “박봉에 아버지 생일이라고 월급을 조금씩 모았을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나네요.”

윤 씨는 기자에게 한 가지 소원이 있다고 말했다. “염치없지만 마지막 바람이 있다면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의 공식 추모식에 대통령이 한 번이라도 참석했으면 좋겠습니다. 올해든 내년이든 상관없어요. 2002년 영결식 당시에는 대통령과 국무총리, 국방부 장관 모두 오지 않았죠.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이 마지막까지 나라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을 책임지는 모습을 봤으면 좋겠습니다.”

시흥=박재명 기자 [email protected]


윤영하 소령은…
영어 능통 만능 스포츠맨
교관 마다하고 함상근무 자원
진중한 성격 ‘고민 상담사’


1973년 11월 24일 인천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 3년 동안 가족이 해운회사를 다닌 아버지를 따라 영국 런던과 네덜란드 로테르담 등에 체류해 영어에 능통했다. 수영과 테니스도 수준급인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군인 출신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1992년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해 1996년 해사 50기로 임관했다. 가족들은 “영어를 잘하니 해사 교관으로 남으라”고 권유했지만 본인이 해군의 ‘최전방’인 함상 근무를 자원했다.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항상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해 주위의 신임이 높았다. 동생 영민 씨(33)는 “항상 차분했으며 옳은 길을 선택해 가려는 믿음직한 형이었다”고 고인을 기억했다. 해사 동기인 최민석 예비역 소령(37)은 “재학 당시 진중한 성격 때문에 (윤 소령에게) 고민 상담을 하는 동기들도 많았다”고 전했다.


▼ “월드컵 응원했던 아들 월드컵에 묻힐 줄이야” ▼



2002년 6월 14일 MBC 뉴스데스크에 출연해 “(월드컵을) 마음으로 응원하겠다”고 말하던 고 윤영하 소령(당시 대위)의 모습. MBC TV 화면 캡처

“경기장에 갈 수는 없지만 온 국민과 함께 우리 대표팀의 16강 진출을 마음으로 응원하겠습니다.”

전국이 2002 한일 월드컵 열기에 휩싸인 2002년 6월 14일. 당시 29세의 윤영하 소령(당시 대위)이 TV에 나와 씩씩하게 말했다. 이날 한국은 포르투갈을 1-0으로 꺾고 축구 월드컵 출전 사상 처음으로 16강에 진출했다. 전국적인 월드컵 응원 열기를 전한 MBC ‘뉴스데스크’ 프로그램에서 윤 소령은 경기 평택시 해군 2함대 동료들과 함께 출연했다. 해군사관학교 동기인 최민석 예비역 소령은 “해군 2함대에서 출동했다 들어오며 찍은 영상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방송된 화면이 부모에게는 윤 소령의 생전 마지막 모습이다. 어머니 황덕희 씨는 “그때는 별생각 없이 봤지 그게 마지막일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윤 소령은 TV에 나오고 보름 뒤인 6월 29일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했다. 윤 소령은 “대표팀을 응원하겠다”고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포함한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은 월드컵의 열기에 묻혀 국민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시흥=박재명 기자 [email protected]


■ 청와대 찾은 제2연평해전 유족들
묘비문 교체-전사자 예우 개선 등 건의


제2연평해전 전사자 유가족들이 28일 청와대를 방문해 전사자 대우와 관련된 가족들의 요청사항을 전달했다. 청와대 측은 이날 접수한 가족들의 요청을 관계기관과 충분히 협의하기로 했다.

제2연평해전 전사자인 윤영하 소령의 아버지 윤두호 씨(68)는 이날 “1시간 동안 청와대를 방문해 그동안 가족들이 생각하고 있던 문제점들을 이야기했다”며 “청와대 측도 이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도와주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전사자 6명의 가족 중 윤 씨 등 3명의 유가족이 이날 면담에 참석했다. 이들은 전사자 묘비문의 표기를 바꾸는 문제와 한상국 중사의 사후 진급 문제, 전사자 예우 향상 등에 대해 의견을 제시했다. 가족들은 그동안 ‘연평도 근해에서 전사’로 표시된 전사자 묘비를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로 바꿔줄 것을 국가보훈처 등에 요청했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또 교전 당시 41일 동안 실종된 채 진급일이 지났지만 결국 진급하지 못했던 한 중사의 진급 문제도 제기했다.

박재명 기자 [email protected]


■ ‘6용사 사연’ 독자 큰 반향
“너무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것 같아 미안”
“전사자에 예우 다하는게 국격 높이는 일”


“당신을 너무 오랫동안 잊었던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2002년 월드컵의 함성에 가려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던 제2연평해전의 희생 장병들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24일부터 6회에 걸쳐 소개한 동아일보 ‘제복(MIU)이 존경받는 사회-제2연평해전 6인의 용사도 잊지 않겠습니다’ 시리즈가 나간 후 가족들을 돕고 싶다는 독자들의 연락이 이어지는 등 반향이 일고 있다.

나라를 위해 싸우다 전사했음에도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되지 못한 아들들 때문에 한이 맺혔던 유가족들은 감개무량한 표정이었다. 고 조천형 중사의 아버지 조상근 씨(70)는 “이제 많이 덤덤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지면에 등장한 아들의 얼굴을 보고 다시 눈물이 났다”며 “늦게라도 아들의 목소리를 담아줘 고맙다”고 거듭 전했다. 고 서후원 중사의 아버지 서영석 씨(57)는 “8년간의 기다림이 그래도 보람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이제라도 정부가 나라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제대로 예우하기 위한 법과 제도를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경찰소방공상자후원연합회 봉사회장인 이학영 씨(53)는 “천안함 사건이 터진 지금 제2연평해전 6용사를 재조명한 것은 시기적절한 일”이라고 말했다. 한 군 관계자는 “당시에 스러져간 분들의 명예를 드높인 의미 있는 기획이었다”며 “앞으로 군에서 전사자에게 예우를 다하는 것이야말로 곧 국격()을 높이는 일”이라고 말했다. 서울 도봉구 광염교회는 유가족들을 위해 써 달라며 600만 원의 성금을 전해왔다. 이석진 부목사는 “전사자 가족들의 사연을 읽으면서 깊은 감동을 받아 조금이라도 돕고 싶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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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교전 고 박동혁 어머님의 편지


내아들아! 누구를위해 목숨을 받쳤니!?

아들아 잘 지내고 있니. 오늘도 엄마는 너의 이름을 불러본단다.
네가 너무나 아파했기에 쓰리고 저미어 오는 가슴 가눌 길이 없구나.

중환자실에서 너의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이, 눈 뜨고는 볼 수가
없었고. 성한 데라고는 머리하고 왼손뿐이었어. 22개나 되는 링거줄에 의지하고 수많은 기계들.
3일 만에 죽었다가 심페기능 소생 기술로 살아났다고 하더라.

한 달 되어가면서 의식을 찾은 내 아들. 왼쪽 다리 빼고 파편 때문
에 대장은 망가졌고 소장은 일곱 군데 꿰매고 배는 오픈 시켜 반창고로 붙여놨고 허리는 끊어졌고
왼쪽 척추에 큰 파편이 있고 화상으로 인해서 푹 패어 그 밑에 인공항문. 오른쪽 다리엔 신경이
다쳤는지 감각도 없고 여기저기 파편 조각들이 상처를 내고 오른쪽 어깨에 총알이 들어있다.
뱃속에는 파편 쪼가리가 100개가 더 있다고 하더라.

깨어나면서 찾아오는 고통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을까. 입을 벌리면
서 통증을 호소하니까, 입술이 찢어졌다. 날마다 떨어지는 저혈압. 수없이 수혈해도 혈소판은
떨어지고 생과 사가 왔다갔다한다.

교전 때 입은 충격일까. 총알이 날아오고 죽은 대장님이 달려든다 네 . 환청에 시달리며 눈이
빨갛게 부어 잠 못들고 통증과 고통에 시달리면서 힘들어 하는 아들의 모습. 내 손을 잡고 울부짖는다.

이 힘든 통증을 어이해야할지.
침상에 누워 꼼짝도 못하는 아들. 안쓰럽고 불쌍하고 처참했다.

다리가 없다는 걸 알았는지 왼손으로 엉덩이쪽을 만지면서 흐느낀다.
‘엄마, 내다리 어디로 갔어.
저리고 아프다.’잠에서 깨어났는데 ‘내 다리가 없어졌다.’

이런 현실 속에서 너와 우리 가족은 피눈물을 토했다. 네가 왜 총
맞고 병원에 누워있어야 하냐고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다.

너는 물만 한모금 삼켜도 장출혈이 심했다.

밤이 되면 통증은 더 무섭다고 했다. 긴 밤을 꼼짝도 못하고 뜬눈
으로 지새우는 아들. 뼈에 사무치는 고통 때문에 차라리 엄마가 아
프고 싶었다. 건강하고 씩씩한 아들이었다.

무능력한 부모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너의 상처를 바라보며 사
무쳐오는 슬픔을 되새길뿐. 겨우 고개를 돌려 문쪽만 바라보는 아 들.

아빠 엄마 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이 정말 가슴이 아팠다. 불쌍하
기도 하고. 이런 속에서 약간 호전되더니 점점 심해져 2002년 9월
1일 중환자실로 내려갔다. 주렁주렁 매달린 약병들.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많은 상처에는 도움이 별로 되지 못했다.

엄청난 상처를 뒤로 한 채 9월 20일 새벽, 저 멀리 하늘 나라로 가버렸다.
그 힘든 통증 속에서도 살아준 내 아들에게 고마웠다.

대전에 너를 묻고 쏟아지는 빗방울을 보면서 엄마는 왜 이리 슬프고 초라한지 서글퍼진다.

6월 29일 국군수도병원으로 간 우리 가족은 가을이 되어서 피멍
진 가슴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 아들
에 대한 보고픔, 웃음을 잃어버린 가족들, 내 젊은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전을 수없이 다니면서 아들이 한없이 보고싶다. 처음엔 전사자
여섯 가족은 서먹서먹했지만 자주 만나다보니 요새는 친하게 지낸다.

2002년은 힘들고 고통을 주는 씁씁할 한 해였다. 내 응어리진 가슴에 한을 남겼다.
무슨 약으로도 치유가 안된다. 평생 흘릴 눈물을 쏟아버렸다.

새해가 밝아오지만 아들에 대한 보고픔은 더욱 간절했다.「 한 국
주둔 미사령관이 위로의 편지를 보내왔다. 최고의 대우와 예우를 한다던 정부와
기관은 전화는커녕 편지 한 통 없다. 국방부도.
내 젊은 아들은 어느 나라, 누구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말인가.
화가 치밀고 분통이 터졌다. 과연 우발이었을까 누가 책임을 진단
말인가.

모 신문 인터뷰에서 국정원 내정자라고 한 서 동만 교수는 서해교
전은 김정일 책임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 우리 아이들이 장난을 치다가 죽었단 말인가.」
많은 상처를 안은 부모 마음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화가 치밀어올라 청와대 민원실로 전화했다.
이런 미친 인간은 국정원 기획조정실장 내정자로 뽑으면 안된다고 항의했
다. 국방부에도 항의했다. 지금까지 소식이 없고.

2003년 6월 11일 기다리던 아들의 제대날이다.
대문을 열고‘나 왔어’하는 소리가 귀에 들어올 것만 같다. 문도 열어보고 대문 밖에 나가 서성거린다.

안절부절못하는 어미의 심정을 누가 알까. 해가 뉘엿뉘엿 져도 아들은 오지 않는다. 북받쳐
오는 설움에 남편을 붙들고‘왜 동혁이는 오지 않냐?’고 미친사람처럼 목놓아 울었다.

치가공과 나와 치공소 차려 아빠 엄마 행복하게 해준다던 아들.
씩씩하고 건강하게 반듯이 자라준 아들이다. 속 한번 썩이지 않고 장학금 받아 공부한 아들이다.

6월은 힘들다. 내 아들의 흔적들을 찾아서 여기저기 다녀본다.
마음이 편치가 않는다. 여러 사람들 중에 해군이 보이면 눈이 번쩍인다.
혹시 내 아들이 아닌가하고 말이다.

동혁아, 세상에 태어나 피어보지도 못하고 너는 가버렸지만 엄마
는 너를 너무너무, 엄마의 분신(扮身)보다도 너를 사랑했다.
반듯하게 잘 자라준 아들에 대한 연민일까. 오늘도 내 아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하루해가 저문다.
총소리, 전쟁없는 하늘 나라에서 아프지 말고 부디 건강하고 행복하자.

이 글은 엄마가 하늘나라에 부친다. 사랑하는 내 아들에게로.
서해교전 부상자를 치료해준 수도병원 모든분들게, 성금을 내주신
국민 여러분들게 감사드립니다.

서해교전당시 중상을 입고 국군수도병원에서 치료받다 같은해(2002) 9월20일 숨진
고 박동혁병장의 어머니 이경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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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가 제2연평해전 10주년임

 

월드컵에 묻히고 이리저리 많이 잊혀졌을텐데

 

잊어서는 안되겠지

출처 : http://www.ilbe.com/34085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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