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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파의 이야기3
게시물ID : gomin_27210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메이파
추천 : 0
조회수 : 257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2/01/25 18:45:49
좀 오랜만이네요.
설은 잘들 보내셨나요?
전 일했습니다.
백화점은 하루만 쉬게 해주더군요.
물론 추가 수당은 없었습니다.ㅠㅠ

그렇게 하루가 지났고, 공식적인 자리에서 목사들이 우리를 포함한 아이들에게 통보한
배 선생의 처벌은 '근신' 이었습니다.
수업을 할 수 없고 시말서 정도 쓰며 되도록 우리에게 모습을 보이지 않는 내용의 처벌이었죠.
...라고 해 봐야 밥 먹을 때마다 모습이 보이고 종종 학교 내부를 자전거를 타고 돌기도 하더군요.
(중국 학교들은 유치원부터 초, 중, 고가 합쳐진 구조이고 압도적으로 많은 학생/교사들이 
기숙사 생활을 하므로 학교 규모가 매우 큽니다. 운동장도 여러개이고 인공 호수가 있는 경우도 있어
작정하고 돌려면 당시 이 학교의 경우 천천히 뛰어도 대략 1시간가량이 소요됩니다.)
우리 둘은 코웃음을 쳤지요. 기껏 처벌이라는 게 저런 걸 처벌이라고 하나? 처벌은 커녕 저건 그냥
휴가가 아닌가. 우리는 즉시 백 목사에게 항의를 했습니다.
"선생으로써 아이들을 가르치지 못한다는 것은 굉장히 큰 처벌이란다."
이것이 백 목사의 대답이었습니다. 그, 그렇군...하고 우리가 납득하긴 개뿔 그 다음날 오후, 
저는 백 목사가 보는 면전에서 집에 전화를 걸어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것은 곧, 
그동안 종교의 힘을 빌어 갖가지 억압과 부정부패를 은폐했던 이 학교에 헬게이트가 열렸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백 목사, 이사장인 이 목사 내외 등 한국부 선생들은 몇 시간이고 쏟아지는 어머니의
무차별한 폭언과 살인협박에 시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더불어 한국에서 걸려오는 학부모들의 전화도 
폭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곧 식단의 부실함, 성희롱 및 추행, 부당한 억압, 
심지어 용돈의 갈취 및 횡령 등을 당해왔던 우리의 생활도 여기저기서 폭로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나이대가 5~60대인 목사 내외들에게도 그러한 경험은 생소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인간관계란 보통 '아이고 목사님.' 하며 떠받들어주고 점잔을 떨기 바쁜 사람들과의 대화였지 
죽여버린다니 다 들어내버리겠다니 하는 어머니의 소통방식이 아니었을 테니까요. 
어머니는 절 낳기 전만 해도 경찰서 정보과 출신이었고, 어지간한 남정네들도 당하기 어려운, 
왜소한 몸과 곱상한 외모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장부였으니 말입니다. 
오죽하면 제가 인생의 목표로 잡은 것이 어머니를 머리와 힘에서 앞서는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했는지 이 모든 사건의 근원인 배 선생이 저를 찾아와
제 남동생과의 면담을 요구했습니다. 저는 기가 막혔지만 남동생에게 배 선생을 안내해주었습니다.

배 선생과의 대화를 마친 남동생에게 면담 내용을 물으니 별 영양가없는 질문 몇 개 하더니
자신이 우리의 어머니와 통화하겠다며 어머니의 전화번호를 받아가더랍니다.
"미쳤군. 근신이라더니 저렇게 나대는 것도 우습지만 어머니께 전화라니, 차라리 조용히 땅을 파고
들어가 누울 일이지."
제가 한 말은 대략 2시간 뒤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배 선생이 우릴 찾아와 사과를 하며 증명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어머니께 물으니,
"그 개 쌍놈새끼가 배씨라며? 그래서 정말 배 한번 갈리고 싶냐고 했어."
"...그런 내용으로 통화를 2시간을 했다고요?"
"어, 뭐라고 하는 거 같긴 했는데 난 이놈이 죽고싶나 싶어서 열받아서 계속 쌍욕만 했거든."
라고 하시더군요.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역시 어머니를 앞서려면 한참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 꿈이 작가지만, 2시간을 읽을 분량의 욕을, 그것도 '배씨니까 배를 가르겠다.' 라는 내용으로
쓴다는 건 아마 앞으로도 불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하긴 전 어머니에게 맞을때도
5~9시간의 야구방망이로 행해지는 폭력보다 그 이전에 2시간동안 쏟아지는 어머니의 폭언이 더 견디기
어려워서 어머니가 말하는 도중에 종종 구토하러 화장실로 뛰어가다 맞은 적도 많았습니다. 
아마 상식적인 사람에게는 매우 견디기 힘든 일이었겠죠. 배 선생이 상식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머니의 요구는 간단했습니다.
"애들 내놓고, 학비도 내놔. 안 그럼 내가 중국으로 찾아가서 네놈들을 피떡으로 만들겠다."
물론 요구하는 사람은 간단하지만 그걸 들어줘야 하는 입장에서는 전혀 간단하지 않은 내용이었습니다.
우리 둘만이면 모르되, 우리를 빌미로 하여 학부모들이 우리와 같은 것을 요구할지도 모르는 것이고
심하면 그들이 선교를 위해 쌓아온 모든 기반들이 한 순간에 와해될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기에는 그들에게 너무나 생소한 어머니의 태도가 무서웠을 겁니다.

그렇게 부모들과 선교사들이 그들의 싸움을 하는 동안 저와 남동생도 저희 나름대로 행동을 했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규합해서 항의를 할 목적으로 아이들을 선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희의 예상 이상으로 아이들의 태도도 굉장히 실망스러웠습니다. 
분명 그들도 학교 내에 불만이 많았고 갈 곳만 있다면 학교를 옮기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은
같이 생활한 입장에서 분명 뻔한 노릇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눈치만 보았습니다.
다음엔 누가 또 이런 일을 당할 지 모른다, 이 때가 너희의 처우를 개선시킬 가장 좋은 기회다 라고,
제가 아무리 설득해도 그들은 사람의 손을 피해 틈새로 숨어드는 쥐들과도 같았습니다.

물론 큰 의미는 없었습니다. 저희의 목적이야 정말 아이들이 불의에 맞서기를 바랬다기보단,
저희의 행동으로 인해 그들이 더더욱 압박을 받기를 원했던 것이죠.
처음 우리가 당한 일에 우리와 가장 친했던 왕따 출신의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침묵했을 때,
우린 이미 그들에게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원래 개신교인에게 비믿음인이란 
괴상한 칭호를 받은 뒤부터 개신교에 대해 그리 좋은 감정은 없었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저는 개신교를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향후 내내 제 인생의 판단 기준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폭풍같은 일주일이 흐르고 마침내 이사장인 이 목사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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