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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읽는 즐거움
게시물ID : readers_2443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봄여름가을.
추천 : 4
조회수 : 903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6/03/18 15:15:10

크고 긴 강의 유장한 흐름처럼 방대한 분량의 장편을 대하大河소설이라고 한다. 통상 10권 전후인 대하소설을 읽기 위해 제 1권의 첫 장을 열면 문득 설악산이나 지리산 종주의 첫 발을 내딛는 느낌이다. 긴 시간 산행할 때는 대하소설의 책장을 넘기는 마음으로 한 발 한 발 우직한 발걸음을 뗀다. 대하소설은 밤 깊은 겨울에 읽어야 제격이다. 이따금 내다보는 창밖에 굵은 눈발이라도 나불거리면 동치미와 날고구마가 감칠맛이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곰삭은 한밤중이면 아쉬움에 쉬이 잠들기 어렵다. 주인공과의 동일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여운으로 휑뎅그렁한 방에 우두커니 앉아 있자면 까닭 모르게 외롭다. 삭풍이 뒷동산 가문비나무의 침엽 몰아대는 소리, 닭들의 홰울음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기 일쑤다.   
 
<토지(박경리,전 21권)>는 네이버 중고나라에서 신간의 반값에 구입했다. 판매자는 아기 엄마였다. 갈피끈이 양장본 1권 후반부에 머물러있는 걸로 미루어 독서는 그 지점에서 포기한 모양이었다. 나머지 20권은 갈피끈이 제자리인 새책이었다. 구한말부터 해방까지 지주의 몰락과 소작인의 상실, 친일파와 의병, 겪지 않으면 얼른 이해 못할 남도와 이북 지방의 차진 사투리들, 만주와 러시아 일본을 배경으로 한 당시의 국제 정세, 풍속과 복식, 관용구, 지난한 사랑 등이 독서 의욕을 꺾었을 것이다. 지지난 겨울 작중에 몰입해 한 분기탱천한 동학당이 되어 얼마나 많은 왜놈과 탐관오리와 밀정들을 참수했던가.
 
<아리랑(조정래,전12권)>도 몇 해 전 중고나라를 통해 저렴하게 구입했다. <아리랑>의 시대적 배경은 <토지>와 유사하다. 강점기 동안 400만을 학살한 일제의 만행, 젊은 이승만의 야비한 처신, 러시아,중국,하와이와 지리산을 범처럼 누볐던 수많은 의병,독립운동가들과 민초들의 애환 등 격랑의 시대를 피로 물들인 생생한 근대의 투쟁사이다. 대하소설의 구심은 서사성과 역사성에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리랑>은 소설에서 장치한 필연적 허구만 걷어낸다면 작금에 급조 중인 친일 지향 국정교과서따위와 비교할 수 없을 훌륭한 대체 근대사 교과서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혼불(최명희,전10권)>은 해방이 몇 해 남지 않은 시점의 남원이 배경이다. <혼불>은 작년에 정년 퇴직한 친구가 퇴임 기념으로 보낸 선물이다. 기대가 컸을까. <토지>와 <아리랑>이 워낙 발군이었을까. 방대하면서 고급한 자료와 혼신의 고증이 무색했다. 유교적 혼례 상례 제례와 무속, 삼국(특히 후백제)의 상고사와 중국의 역사와 노비제도, 종가의 당위 등에 대부분의 지면이 할애되었다. 시종일관 지루한 인용이 반복돼 소설보다는 논문에 가깝지 않았을는지. 서술이 주류가 되자 헤엄치는 물뱀처럼 생동감 있게 빛나는 묘사와 걸쭉한 사투리로 풀어낸 얼개는 빛을 잃고 산만했다. 작가께 대단히 송구하지만 작가가 책을 출산하면 양육은 독자의 몫이란 변명 뒤에 숨는다.
 
<혼불>의 시작 배경과 유사한 1943년, 여주인공 "여옥"은 종군위안부에 강제로 끌려간다. <여명의 눈동자(김성종,전10권)> 도입부이다. 87년 무렵 녹번역 인근 "푸른서점"은 전화 주문만 가능했다. 지하철 역세권에 한해 인편으로 직접 책을 대여했기 때문이다. 당시 종각역 공평동에서 근무할 때 <여명의 눈동자>를 빌려 읽었다. 직장 생활을 했던 90년 대 중반까지 종로서적 같은 시내 대형 서점과 지역의 작은 책방을 이용했는데 "제5열"류 김성종 작가의 모든 추리소설도 이때 구입했다. 귀촌하고 2006년 수해에 책꽂이가 부족해 방에 쌓아둔 추리소설은 공교롭게 단 한 권도 남지 않고 수장됐다.
 
<태백산맥(조정래,전10권)>은 푸른색의 강박으로 경직됐던 시절 최인훈의 단편 "광장"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붉은색을 가미한 분단문학을 견인했다. 예외없이 <태백산맥>도 잊을만하면 꺼내 복습하듯 탐독했는데 같은 내용이라도 시간의 흐름과 시대의 변화, 망각 탓에 책장을 펼칠 때마다 새롭게 읽힌다. <태백산맥>과 동일 배경인 6.25와 빨치산을 다룬 대하소설로는 <남과북(홍성원, 전6권)>, <지리산(이병주,전7권)>이 있다. 이 책들도 푸른서점에서 대여했다. 무슨 연유인지 이 두 소설은 마땅하게 남는 기억이 없다. 책 욕심이 많은 데 비해 소장하려는 마음이 없었던 걸 상기하면 뭔가 불편했던 모양이다. 
 
6.25의 후예들이 번민하는 대하소설로는 단연 <변경(이문열,전12권)>과 <한강(조정래10권)>이 압권이다. <변경>은 이념 논쟁에 휘말려 자신의 책이 불태워진 쓰라린 경험이 있는 작가가 연좌의 그늘에서 고통 받았던 자전적 연대기이다. 밀양을 몇 차례 간 경험이 있어 작가의 소년 시절 공간적 배경인 밀양과 대표적 명소인 영남루를 묘사할 때는 이웃처럼 친근해 더 꼼꼼히 살폈다. 이런저런 사유로 <변경>은 여덟 차례 정독을 했다. 한 번은 여행 길에 들고 다니던 제7권을 분실했는데 이빨 빠진 대하소설만큼 볼썽사나운 것도 없어 중고사이트를 뒤지다가 혹시나해서 출판사인 "문학과지성사"에 문의해 어렵사리 파본 재고를 구해 충당해 두었다.
 
근대사는 대략 구한말부터 8.15 해방까지로 구분한다. 해방 이후의 과정인 <한강>은 본격적으로 현대사가 전개된다. 부정선거와 이승만의 몰락, 4.19와 5.16, 친일과 군부독재인 기득권 군상들의 불편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서독 파견 광부와 간호사들의 애환, 산업화 시대 피폐한 농촌과 공순이, 버스 차장 같은 우리들의 쓸쓸한 자화상, 박정희의 살해와 광주항쟁으로 연결되는 굴곡진 비극적 체험을 양지로 끌어낸다. <한강>은 수해 때 뻘 찬 방바닥에 엉겨있는 걸 맑은 물에 헹궈 그늘에서 말렸다. 그리고는 눌어붙은 책갈피를 찢기지 않게 한 장 한 장 뜯어냈다. 쿰쿰한 뻘 냄새는 온전히 가시지 않았다. 시집이었던가 갈피에서 만 원짜리 다섯 장이 팔랑팔랑 떨어진 적이 있었다. 다람쥐처럼 묻어두고 잊어버리기를 잘하는 큰형 덕분에 짭짤했던 좋은 기억과 배치된 책갈피의 작은 악몽이었다.    
 
전두환이 광주를 진압하려고 작전 명령 "화려한휴가"가 떨어진 <한강>의 마지막 장면을, 종군 기자로 월남에 참전했다가 "white badge"라는 영문 소설로 미국에 출간해 100만부 이상을 팔았던 "전쟁과 도시"를 나중에 "하얀 전쟁"으로 개작 발표한 작가 안정효가 <태풍의 소리(전6권)>로 이어받았다. 국민이 국민을 지키라고 사준 총으로 국민을 무수하게 살상한 전두환과 신군부와 하나회를 낱낱이 파헤쳐 언론이 언론답게 역할을 제대로 하려고 언론이 군부와 전쟁을 치뤘다. 광주 항쟁이 종료되자 시민에게 발포하라고 명령했던 지휘관을 찾아다니며 보복 살해해 독자에게 작은 카타르시스를 제공했다.
 
조선대학교에 공수부대가 진입하면서 본격적으로 촉발된 광주의 실상을 <봄날(임철우,전5권)>은 냉철하게 자세히 적었다. <봄날>은 평온했던 한 도시가 아비규환의 지옥이 되었다가 항쟁의 도시로 변모하는 과정이 매 시간별, 각 지역별로, 아이를 조준 사격한 다양한 사건 별로 몽땅 실명을 기록한 피눈물의 실록이다. 바른 미래를 지향하는 인류는 역사의 뒤안길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의식 있는 작가들의 민간 역사책이 대하소설이기도 하다.
 
<장길산(황석영,전10권)>도 수해의 아픔을 겪었다. 한 권이 빠지니 전체를 못쓰게 되었다. 끊어진 교각의 상판을 이을 길이 난감하다. 이 글을 쓰다가 혹 지폐라도 날릴까봐 책갈피를 훑어보니 활자도 작고 종이도 누렇게 바랬다. 84년 현암사에서 출판되었으니 30년이 넘었다. 세로 쓰기였어도 학생 때 재미삼아 여러번 독파했던 박종화 <삼국지>는 중국인들의 시선처럼 눈에 띄게 유비와 촉나라 일방이었던 반면, 이문열 <삼국지(전10권)>는 원호제를 시행한 조조의 재평가라는 비교적 객관적 입장이었어서였는지 여섯 번쯤 읽었다. 일본 종합상사 이야기인 <대벌(일본,전26권)>도 열댓권이 떠내려갔다. <혼불>과 함께 친구에게 선물받은 <객주(김주영,전10권)>는 다소곳하게 책꽂이에서 손길이 미치길 기다린다. 어떤 이야기가 긴 호흡으로 전개될지 미리 흥미진진하다. 
 
79년 10월 26일. 구의동 명성여고 근방의 숙직실에서 박정희의 피살 소식에 눈물을 흘렸다. 삼엄한 유신독재 국정교과서로 공부하며 언론에 세뇌된 결과였다. 80년 5월의 봄, 광주 폭동에 분개했었다. 군부에 굴종해 철저하게 허위를 보도한 비겁한 언론들 때문이었다. 박정희와 광주의 실상은 외신과 전단지와 독서를 통해 알게됐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게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당시 뒤늦게나마 세상을 보고 읽는 눈이 밝아진 건 얼마나 다행이던가. 여전히 왜곡과 기울어진 보도를 일삼는 다수 언론과 과거의 세뇌에 경화돼 사실에 눈 감은 청맹과니 국정화 세대가 아직도 그 얼마던가. 대하소설은 삶의 행간을 돌아보게 한다. 책을 펼치면 시대 정신과 사회 의식을 종횡하며 많은 삶을 대리 경험하는 새 세상이 열린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윈스턴 처칠). 역사를 잊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신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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