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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생>, 파스칼 키냐르
게시물ID : readers_2447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팔콤
추천 : 1
조회수 : 139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03/21 14:16:03
  그녀의 목소리는 은근하고 낮았다. 항상 부드럽고, 안정되고, 평온하고, 전혀 유혹적이지 않고, 명료하고, 큰 굴곡이 없으며, 언제나 단호하고, 그녀 자신의 논리를 설명하거나 내게로 끌어들였으며, 자신의 명령들을 실어서, 명백하게 나의 내부로 파고들기 때문에 나로서는 거역할 수가 없었다.
  이 목소리에 나는 복종하곤 했다.
  적어도 그 목소리가 들리면 나는 즉시 복종했다.
  사랑의 발생은 어떤 목소리에 대한 복종일 수 있다. 어떤 목소리의 억양에 대한 복종
 
 파스칼 키냐르, 『은밀한 생』, 송의경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1, P.25



  갑자기 그들은 연주를 포기한다.
  사람들은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나중에 그들은 술을 마시기 시작하고, 마약을 하고, 틀어박히고, 절망하다가 자살을 한다. 마치 그들이 극단적인 행동으로 치달음으로써, 정녕 그 원인에 선행된 결단에 설명을 붙여보려고 애쓰는 듯이 말이다.)
  
  나는 그들에게 거의 단도직입적으로――물론 네미를 이해하기 위해서였지만――그 음악적 자살 혹은 최소한 직업적 자살의 이유를 물었다.
  그들은 넋 나간 모습으로 쳐다볼 뿐이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애쓴다.
  
  그들은 설명하려고 진지하게 애를 쓰지만 그럼에도 자신들의 삶을 망가뜨리고――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적어도 명백한 욕망과는 달리――그들의 삶을 거의 강탈하다시피 한 결단을 진정으로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들 중 두 사람은 모른다고 겸허하게 고백하였다. 그들은 의기소침해 있었다. 그들은 두렵다.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이유는 샘물처럼 분명하고 투명하다. 이것은 페드르를 부당하게 살해한 음모의 결과로 절필했던 라신이 한 말이다. 라신은 구르빌에게 창작의 기쁨은 그에게 쏟아지는 비난의 불쾌감에 비한다면 하찮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더 이상 상처받을 위험에 몸을 내맡기려는 욕망을 키우지 않았다.
  
  <…>
  
  그것은 죽음의 가능성이다. 그리고 매번 새롭게 죽을 수 있다는 것이다.
  
  <…>
  
  나는 이 죽을 수 있음이 연주가로서의 그녀를 멈추게 했다고 생각한다.



  파스칼 키냐르, 『은밀한 생』,
송의경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1, 41~42



 영혼을 가진다는 것은 비밀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론.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


  사랑, 타인에 대한 비밀. 이것들은 동일한 것이다. 니체의 가장자리에 있는 사랑은 비밀 같은 것이다: 나체의 가장자리에 있는 비밀.


*


  생각, 사랑은 비밀과 관련된다. 그것은 은밀한 것이고 사적인 것이다. 그것은 비-집단적인 것이고 비-공적인 것이다.
  비밀은 인간보다 더 오래 되었다. 많은 동물들이 죽음을 예감할 때 숨을 곳을 찾는다. 동물들에게서 죽음은 비밀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무덤. 그리고 고독 역시. 사실 죽음은 일탈의 첫번째 시련이다. 일탈은 일탈을 부른다. 죽음은, 그 고독과 비밀(인간들에게 있어서는 나체의 저장소)이 훨씬 간략한 양상일 뿐인 그룹으로부터의, 최대의 일탈이다.


*


  어느 때, 어느 누구와 함께 있어도, 나의 모든 감정에 대뜸 영향을 미치는 고독이라는 일탈을 극복하기는 불가능했다.
  일탈을 비밀스런 곳으로 옮겨가면 그곳에 고독이 내려앉는다.
  나는 웅크린 침묵의 균열을 결코 메우지 못했다. 침묵의 틈새에서는, 모든 것이 우선 내게로 떨어졌다.
  그런데 사랑이란 정확히 이런 것이다: 은밀한 생, 분리된 성스러운 삶, 사회로부터 격리된 삶, 그것이 가족과 사회로부터 격리된 삶인 이유는, 그러함 삶이 가족보다 먼저, 사회보다 먼저, 빛보다 먼저, 언어보다 먼저, 삶을 되살리기 때문이다. 어둠 속, 목소리도 없는, 출생조차도 알지 못하는, 태생(胎生)의 삶.


  
파스칼 키냐르, 『은밀한 생』,
송의경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1, 93-94



   사랑은 가차없는 관계다. 아무것도 그 요구를 들어주지 못할 것이다. 어떤 평화도 그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건 사랑의 잘못도, 두 사람 중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사랑은 두 사람을 묶어두는 동시에 쫓아내는 것이며,
  
  사랑은, 모른 체하며, 그들 각자를 상대방의 내벽에(상대방의 피부 뒤에) 거주시키는 것이며,
  
  끼워넣고, 그리고 죽이는 것이다.
  
  가공될 수도, 타협될 수도, 극복될 수도, 초월될 수도, 가려질 수도, 승화될 수도 없는 인간 개개인의 원천에 바로 성의 차이가 있다.
  
  그것은 순수하다.
  
  그것은 절대적이다.
  
  그것은 불가해한 것, 부단한 것, 내재적인 것, 번식하는 것, 증식하는 것, 질긴 것, 계절과 무관한 것, 집요한 것이다.
  
  성적 관계는 다음과 같은 불가피한 점을 지니고 있다: 성적관계는 양면적이다. 그것은 나체가 아니라 노출에 관련된다. 동물적 순수성은 소위 인간의 혐오감 혹은 성적 수치심으로 오염되었다. 나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노출에 의해서. 사랑에 대한 증오가, 사랑의 의식(意識)으로서, 사랑 안에 있다. 그리고 이 의식은 새의 깃털이 물고기에게 유익한만큼 사랑에 유익하다.  
 

  파스칼 키냐르, 『은밀한 생』,
송의경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1, 101-102



   어느 때, 어느 누구와 함께 있어도, 나의 모든 감정에 대뜸 영향을 미치는 고독이라는 일탈을 극복하기는 불가능했다.
   일탈을 비밀스런 곳으로 옮겨가면 그곳에 고독이 내려앉는다.
   나는 웅크린 침묵의 균열을 결코 메우지 못했다. 침묵의 틈새에서는, 모든 것이 우선 내게로 떨어졌다.
   그런데 사랑이란 정확히 이런 것이다: 은밀한 생, 분리된 성스러운 삶, 사회로부터 격리된 삶, 그것이 가족과 사회로부터 격리된 삶인 이유는, 그러한 삶이 가족보다 먼저, 사회보다 먼저, 빛보다 먼저, 언어보다 먼저, 삶을 되살리기 때문이다. 어둠 속, 목소리도 없는, 출생조차도 알지 못하는, 태생(胎生)의 삶.

  파스칼 키냐르, 『은밀한 생』



   아름다운 텍스트는 발음되기도 전에 들린다. 그것이 문학이다. 아름다운 악보는 연주되기도 전에 들린다. 그것이 미리 준비된 서양 음악의 찬란함이다. 음악의 원천은 소리의 생산에 있지 않다. 그것은 듣기라는 절대 행위 안에 있다. 창조 행위에서 이 절대 행위는 소리의 생산에 선행한다. 작곡이라는 행위가 이미 그것을 듣고, 그것으로 작곡을 한다. 연주가 이미 들은 것으로서가 아니라, 지금 듣고 있는 것으로서 그것을 솟아오르게 한다. 그것은 의미하기가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드러내기도 아니다. 그것은 순수한 듣기이다.

 *

  소리내지 않고 연주하기.
  하나의 언어는 말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언어를 들을 수 있다. 글로 씌어지는 언어는 읽혀진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읽혀지기도 전에 읽는 행위에서 언어 그 자체가 들린다.
  그런 까닭으로 모든 문학은 옛날 표현들이라고나 불러야 할, 사어(死語)들과 개인적 관계를 유지한다.
  소리 없이 악보를 읽는 것, 소리내지 않고(손가락도 활도 쓰지 않고) 연주하기, 실제로 연주하기,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소리를 듣는 동일한 행위이다. 그것은 동일하게 울리는 소리다. 그러나 그것은 악보로 기록되면 영원한 결별로 어긋나버리는 울림이다. 바로 그것이 야릇함, 숭고함, 난해한 음악이라는 다른 세계에 적함한 이타성을 만들어낸다. 기보법에 의해 난해한 음악은 스스로 숨결에서, 자신의 소리를 듣기에서 이미 어긋나 있다. 소리의 반향에서까지도, 작곡자 자신에게까지도.

  파스칼 키냐르, 『은밀한 생』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을 읽으며 너무 좋아서 옮겨 적어두었던 문장들의 일부입니다.

 사실 이것보다 더 많고, 제가 가장 좋아하는 단락은 뺐습니다만, 후에 이 책을 읽을 이들을 위해 의도적으로 뺐습니다.

 타인의 책 읽기의 즐거움을 너무 많이 빼앗을 수는 없어서..

 은행나무 출판사의 문학잡지인 Axt에서 파스킬 키냐르와의 서면으로 진행한 문답이 실려서 대충 보다보니 생각나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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