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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에 대해 많이 하는 오해가 이거지요.
게시물ID : history_2451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소침
추천 : 3
조회수 : 2967회
댓글수 : 15개
등록시간 : 2015/12/13 13:5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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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송태조의 문치주의로 무를 경시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더라고요.
물론 문치주의 내세운건 사실이고 병법 좀 읽은 문인을 장군에 봉한다던가 하는 병크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중원의 자잘한 국가들을 정복하면서 흥성한 나라가 송나라인데 무를 경시할수만은 없었습니다.
970년대 초 22만 명이던 군대가 태조 치세 후반기에는 약 38만 년에 달하게 되고요, 송 태종의 제위 시기에는 66만 명으로 늘어납니다.
다음 황제였던 진종은 군사를 줄이자는 의견을 내놓는데 이 때 송군의 수는 91만 2000명.
송나라는 매년 제정의 70%를 국방비에 쏟아부었고, 맹화유궤, 당차, 연발궁노, 포석기(당나라때도 비슷한게 있었지만), 벽력화구 같은 수준높은 무기들을 수입하거나 자체제작할 정도로 군사력에 관심이 많았던 나라였습니다. 장갑차 비스무리한 것도 만들어졌고.
원군과 송군이 회수 강에서 싸울 때 송나라군대의 배에서 폭탄이 날아오니까 몽골군대가 쇼크받았다는 기록은 덤.(물론 원나라도 당시에는 회회포라던가 하는 사기급 무기들이 있었지만 배에서 폭탄쏘는것까진 생각못한듯)

어떤 분들은 또 이렇게 질문하실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요 금 원한테 뚜들겨맞고 다녔냐. 
당나라가 동돌궐 서돌궐을 잇달아 정복하고 (고종 말년에 둘다 독립했지만)사마르칸트를 넘어 서역 72개국을 정복한다던가 하는 간지폭풍 기세에
유목민들은 컬쳐쇼크받고 스스로 각성하게 됩니다. 이후 요의 건립자 야율아보기에 의해 새로운 기병전술이 도입되고 중국의 공성기술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빠른 시간 안에 강국이 되었구요. 송나라가 약해졌다기 보다는 주변 이민족들이 강해졌다고 보아야지요.


이게 맹화유궤인데, 맹화유는 석유를 뜻합니다. 안에 있는 기름이 불에 붙으면 폭발하면서 분사하는 방식. 물론 송나라가 직접 개발한건 아니고 동남아에서 수입한 거라네요.








당차. 공성전에서 주로 사용.


그리고 사진은 없지만 벽력화구는 똥그랗게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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